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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엡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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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 가운데 경남 마산시 봉암동에 거주하는 67세의 안영준씨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부인 박대동씨 결혼할 때에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가 내 부모 네 부모를 따지지 말고, 양가의 부모님을 똑같이 함께 모시자”고 말입니다. 그는 38년 동안 그 약속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이 양가의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를 다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작년 11월 사고로 아내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지금도 자신의 아파트에 101세 된 친어머니와 96세 되신 장모님을 함께 모시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친어머니는 시력과 체력이 쇠약한 상태이고, 장모는 치매에 걸려서 누군가 돌봐주어야 될 입장이지만 그는 오히려 그의 효심을 칭찬하는 기자들에게 “자식이 부모님을 당연한 일인데, 그게 뭐 칭찬거리가 됩니까?”라고 하면서 오히려 부담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임과 동시에 어버이 주일입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어머니의 날이 한국에 건너오면서 1975년부터 어버이날로 이름을 바꾸어 지켜지고 있습니다. 어버이날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자녀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에 무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일은 당연하고 지당한 일인데, 그것이 선행으로, 칭찬거리로 비추어지는 가운데 오늘 우리 세태의 모순을 보는 것도 같습니다.

  오늘의 성경 1절에 보니“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옳다”는 것은, 지당하고 합당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당연하게 하지 못함은 무슨 이유일까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먼저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돌보고 계십니다. 세월이 변해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호세아 10장 8절에 보니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너희를 향한 내 사랑은 불붙는 것 같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을 향해서 사랑을 전하고 계십니다. 마치 그 사랑은 집 나갔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두 번 째 로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습니다. 품에 안았을 때에 그 자식에 대한 사랑이나, 나이가 들어서 가정을 이루고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는 자녀를 보는 부모의 사랑은 여전이 같다고 합니다. 출근하는 50세의 아들을 향해서 80세의 노모는 오늘도 “얘야, 차 조심해라’라고 당부하신다고 하지않습니까. 

  일본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청상과부가 되어서 하나밖에 없는 독자를 잘 키웠습니다. 이 아들이 커서 늠름한 청년이 되었는데, 어느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여자는 아주 몹쓸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유명한 의사를 찾아가서 진찰을 했더니, 이 여인의 병을 고치려면 사람의 간을 먹어야 된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어날 수 없는 일 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진 이 아들은 ‘우리 어머니가 살면 얼마나 오래 살까? 우리 애인이 오래 살아야지’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 그 어머니를 죽여 간을 가지고 자기 애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달려가는 이 아들을 향해서 어머니의 혼이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아들아, 조심해서 천천히 가라. 넘어질까 염려된다...’자신의 간을 파 가는 아들에게 넘어질까 걱정하는 어머니의 심정이 드러난,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을 다윗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훌륭한 왕이었지만 허물이 있고 죄도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들 중에 압살롬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그 가 반역해서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가까스로 위기를 피한 다음에, 요압 장군을 보내서 압살롬을 진압하게 했습니다. 요압을 보내면서 다윗은 “여보게, 내 아들 압살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게나. 그를 너그럽게 대해 주게나. 제발 그의 생명만은 빼앗지 말게나. 그를 살려서 내게 데리고 와 주게나!”하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머리가 긴 고로 노새를 타고 가다가 나무에 그 머리카락이 걸려서 동동 매달린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요압에게 체포되고 요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병사가 와서 승전보를 알리는데, 다윗은 압살롬이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먼저 묻습니다. 압살롬이 죽었단 말을 듣고, 다윗은 기뻐하기는커녕 통곡하며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하고 통곡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그 왕위를 빼앗고자 하였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여전히 변함없이 그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이토록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데, 우리 자식들의 사랑은 늘 변덕스럽기만 합니다. 평생 부모에게 효도를 다할 것 같던 마음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종종 변질되어가기도 합니다. 어릴 때 아이들을 불러놓고 “너 이 다음에 커서 엄마, 아빠한테 잘 할 거지?”하고 물으면 “그럼요! 엄마,아빠! 전 잘할거예요”하고 넙죽 대답한다고 해도 30, 40년은 지나 봐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향한 자식들의 마음은 이렇게 늘 변질되어 가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왜 부모를 공경해야 할까요?

  첫 번째,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 1절, 2절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아멘.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네 부모에게 순종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개의 십계명 돌판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 돌판에는 첫 번째 계명에서 네 번째 계명으로, 주로 하나님과 관계된 계명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돌판은 인간에 관한 계명들인데, 그 가운데 첫 번째로 기록되어 있는 다섯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비중 있는 계명으로, 약속있는 첫 번째 계명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보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주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 명령은 이것을 지킬까 안 지킬까 고민할 문제가 아닙니다.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이 명령입니다. 저울질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모님께 얼마나 효도하고, 얼마나 공경할 것인지 잴 일이 아닙니다. 복종의 문제요, 순종의 문제일 뿐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공경은 부모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은혜와 은덕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생명을 몸속에 10개월 동안 담고 있습니다. 낳고, 기르고, 그의 인생을 위해서 늘 기도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깊고 크고 놀랍기에 우리는 그 사랑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보답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 공경이고 효도인 것입니다.

  빅톨 위고의 소설 가운데 “나인티들(?)”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정국이 몹시 큰 혼란과 가난에 빠져있었습니다. 어느 부대가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 길 옆에 지친 아주머니 한 분과 세명의 기진맥진한 아이들이 함께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는 이 부대의 상사가 자기 주머니에서 빵을 한 덩어리 꺼내어 아주머니에게 던져주었습니다. 빵을 발견한 아주머니는 그 빵을 정확히 3조각으로 나눠서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나누어 주더랍니다. 그걸 바라보던 한 병사가 상사에게 물었습니다. “상사님! 저 여자는 배고프지 않은 모양이죠?”그 때 상사가 말하기를, “그게 아니야. 저 여자는 바로 어머니이기 때문이야.”라고 대답했습니다. 자기도 배가 고파 죽어가고 있지만, 사랑하는 아들에게 빵 세 조각을 나눠주는 그 마음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부모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부모 공경입니다. 

  또한 부모 공경은 인간됨의 도리입니다. 사람이 제 도리를 못할 때에 금수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짐승들은 자기 새끼를 낳아서 기릅니다. 그러다가 새끼가 크면 부모와 새끼가 같이 싸움을 합니다. 때로는 물어 죽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짐승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 마지막까지 효도를 다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고, 됨됨이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가지로 그 부모를 대게 순종하고 공경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상에 매달려 죽어가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자기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며 제자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요한아 네 어머니라.” 요한에게 그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한 것입니다. 요한은 그 이후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처럼 모시고 평생을 공경하며 살아갔습니다. 그것이 인간됨의 도리인 것입니다.

  나오미란 한 여인의 가정이 베들레헴의 기근을 피해서 모압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방 땅에 가서 좀 살아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남편을 잃어버리고 두 아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나오미 자신과 과부된 두 며느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며느리들은 이제 이 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너희는 아직 젊은데 다시 재가해서 너희 인생을 꾸려야지, 과부된 나를 따라오면 어떡하겠느냐?”고 만류했습니다. 오르바라는 며느리는 그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 모압 땅에 남습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를 끝까지 따라 갑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고, 어머니의 조국이 나의 조국입니다. 나는 어머니와 떨어질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며느리 룻은 이 늙은 어머니 나오미를 모시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추수하는 밭에 나가서 일꾼들이 추수하다가 흘린 벼 이삭을 주워가지고, 음식을 만들어서 어머니를 공경하고 봉양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됨의 도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후회할 일이 많지만, 가장 마음 아픈 것은 부모님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효도하는 일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효도 할 시기가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부모에게 효도할 수 없습니다.

  송강 정철은 그의 ‘훈민가’에서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 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라고 노래했습니다.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지금 어려워도, 부족해도 최선을 다해서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부모님을 공경 하라고 했는데, 공경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섬기듯 부모를 높여 드리는 것이 공경입니다.

  부모 앞에서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그를 존경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내 부모를 존경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결코 내 부모를 존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부모는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 받는다고 서양의 속담은 이야기 합니다.
  공경이란 자기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까?

  또한 공경은 부모의 실수 까지도 덮어 드리는 것입니다.

  나이가 드시면 지각이 떨어지고, 생각하는 것이 우둔해질 수 있고, 움직이는 것도 느려져 실수 하실 수 있습니다. 진정한 공경은 부모의 실수 까지도 덮어드리고 숨겨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종종 그런 말을 잘 합니다. “우리 엄마는 주책 중에 주책이야. 얼마나 주책인지..” “우리 아버지는 망령이 들어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실수를 덮어드리고 숨겨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그 위대한 믿음의 사람 노아도 홍수가 끝난 이후에 나이가 들고 긴장이 풀려서 포도주를 먹고 만취해서 옷을 다 벗어 던지고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함이란 아들이 와서 보고는 동네방네 다니며 다 소문을 냈습니다. 어떤 자녀들은 부모의 흉 거리를 발견하면 자기 형제자매 가족들에게 다 전화하고, 자기와 상관없는 이웃 동장, 반장에게 까지 전화해서 우리 부모가 이런다고 흉보고 다닙니다. 함이 그랬습니다. 자기 부모가 하체를 드러낸 것을 조롱하고 소문내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으로 들어가서 옷을 덮어 드렸습니다. 나중에 노아는 그 사실을 알게 되고, 함을 저주하게 되고, 셈과 야벳에게 큰 축복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공경이란 부모의 실수와 허물까지도 덮어드리는 것입니다.

  공경이란 또한 순종이란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내가 진정 부모님을 공경한다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미덕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젊은 세대이고, 부모님은 연로한 세대이면,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내 생각이 올은 것 같고 부모님의 생각이 잘못된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라도 부모님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고 함부로 거역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순종입니다.

  또한 공경은 봉양이란 말로도 사용됩니다.

  부모의 먹을 것, 입을 것, 그의 모든 살림살이를 돌봐드리고 공급해 드리는 것입니다. 의식주의 부족함이 없도록 살펴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봉양입니다. 룻이 바로 이렇게 그 시어머니를 봉양해 드린 것입니다. 나중에 룻과 결혼한 보아스라는 사람은 룻에게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늘 필요한 양식을 준비해서 시어머니에게 만족감과 풍족함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물질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생각에 ‘노인들이 돈 쓸데가 어디 있다고, 무슨 용돈이 필요하겠어.’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노인일수록 용돈이 필요합니다. 부모들에게 돈을 드리면 부모님들은 손자들에게 다시 돈을 돌립니다. 그렇더라도 자식의 그 마음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자들에게 줄 용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 또한 그것이 공경입니다.

  잠언 23장 25절에 보면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네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진정한 공경이란 사치스런 옷으로 감싸드리는 것, 진귀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부모님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밥 한 끼를 드려도 정성스런 마음이 담겨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식 집에 가서 며칠 있는데,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다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집에 왔는데, “어머니 언제 가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갈비가 아닌 생선 한 마리를 구워드리더라도 맛있게 드시고, 기쁘게 드실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공경입니다.

  성경은 공경에 따른 축복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할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 공경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축복이 따르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면 잘되고, 형통한 삶을 살고, 장수 한다는 것입니다. 통계적으로도 보면 효도 잘하는 집안에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또한 번영하고 잘되는 가정은 그 부모에게 효도하는 가정이 많다고 합니다.
  룻은 그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정성껏 공경했는데, 유력한 보아스와 재혼하게 되었고, 다윗왕의 할머니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평생 동안 보살펴 드렸는데, 열 두 제자 중에 가장 장수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유대 사회에는 양로원이 없다고 합니다. 나이 드신 어른이 계시면 젊은이들이 서로 자기 집에 모시려고 한답니다. 나이 든 어른들을 모시면 그분들의 경험의 지혜가 내게 유익하고, 그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내 자녀들이 유익하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을 내 부모로 삼아 모시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내 부모가 아닐지라도 나이든 어른들을 자기 부모로 삼아서 모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의 진정한 복이 그것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양로원이 필요하지 않는 사회, 서로 어른들을 모시려고 하는 사회,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가정입니다.

  성경에는 부모를 거역하는 자, 부모를 조롱하는 자,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에 대한 저주와 심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 30장 17절에 보면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출애굽기 21장 15절에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라고 말씀하셨고, 17절에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6.25동란의 일사후퇴 때였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 날에 미국에서 온 선교사가 지프차를 타고 급히 어딘가를 가고 있었습니다. 강원도 시골길 도중에 다리가 하나있는데, 다리 위가 빙판길이었습니다. 차를 세우고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지를 살피는데, 다리 밑에서 그 추운 겨울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상해서 다리 밑에 내려가 보니 한 여인이 벌거벗은 채 갓 난 아이를 가슴에 품고 죽어 있었습니다. 일사후퇴 때 만삭의 몸을 이끌고 피난 가다가 진통이 오니까 피할 곳이 없어서 다리 밑에서 출산하게 되었는데, 추운 겨울에 아이가 추위에 죽어가자 자기 옷을 벗어서 아이를 가슴에 감싸고 자신은 죽은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아이가 살아있어 선교사는 그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가서 키웠고, 전쟁이 끝나자 같이 미국으로 돌아가서 자기 양녀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크면서 자기 양부모와 자기는 머리색이 다르고, 코도 다르고, 얼굴도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유치원을 들어가고,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아이들이 “너하고 너의 아버지 어머니는 얼굴색이 달라. 넌 고아지? 넌 주워 온 아이야?”라고 놀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이의 성격이 삐뚤어져만 갔습니다. 그녀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어두운 뒷골목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20세가 되었을 때, 그 딸을 불러 놓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의 출생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겠다. 6.25 동란에 한국에 선교사로 갔을 때, 내가 다리 밑에서 너를 만나게 되었다. 너의 어머니는 만삭이 된 몸으로 그 추운 겨울에 피난을 가다가 출산을 하게 되었는데, 갈 곳이 없어서 눈을 피해 다리 밑에서 너를 낳았단다. 그러나 추운 날씨에 네가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어서 자기 옷을 다 벗어서 너의 몸을 감싸고, 너를 가슴에 품고, 자신은 얼어 죽었으나 너는 다행히 살아있어서 내가 데려와서 키웠단다.”
  그 때 20대 딸은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며 “내가 나를 낳은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하고 저주했는데요. 내가 큰 잘못을 했습니다.”라고 용서를 빌면서 회개 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 딸은 마음잡고 열심히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추운 겨울에 혼자서 어머니가 묻힌 강원도 시골 양지바른 언덕의 어머니의 묘를 찾아가 자기 옷을 한 가닥 한 가닥 다 벗어서 눈 덮힌 무덤위에 덮어드리고, 울었습니다. “어머니 저를 낳으실 때 얼마나 추우셨어요? 저를 살리고자 어머니는 그 추운 겨울에 얼어 죽어가셨지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저를 낳은 어머니를 얼마나 저주하고 원망했는데요. 어머니 저를 용서해 주세요.”하면서 오랫동안 목 놓아 울고 용서를 빌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 부모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내 부모는 몹시 냉정하고, 내게 아무런 사랑도 베풀어 주신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부모님의 마음속에 자식을 향한 사랑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하나님을 섬기듯 효도를 다하고 그리고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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