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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스승으로서의 다윗 (삼상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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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스승의 날’입니다. 교회에서는 따로 스승의 주일로 지키지는 않지만 해마다 이맘때 우리는 스승의 고마움을 새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교회학교에서 수고하는 모든 교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또 ‘석가탄일’입니다. 석가탄일이 국가 공휴일로 제정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이 나라가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길거리에 늘어져 있는 연등을 보면서, 이제는 도심 한복판에도 있는 절들을 보면서, 우리가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스승의 날과 석가탄일만을 아는 우리에게 오늘이 또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이 땅에 성령이 최초로 임한 날입니다. 성령과 함께 교회가 시작되었고, 기독교 역사가 출발되었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오늘 석가탄일과 겹쳐 성령강림절을 맞이한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석가’가 아니라 이제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민족의 가슴마다 풍성한 축복으로 새겨져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생명이 있고, 회복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강림하신 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성령이 곧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진정한 스승은 성령이십니다. 그분의 참된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맡겨진 모든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난 뒤 그의 스승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분의 지도를 잘 받으며 다윗은 좋은 스승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과연 스승으로서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첫째, 잘 가르친 것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도망 다닐 때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방랑생활을 하다가 정착한 곳이 ‘아둘람’이라는 동굴이었습니다. 산악지대이고, 요새이며, 동굴이어서 사울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여기에 기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숫자가 40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장관’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그들의 ‘선생과 스승’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다윗과 함께 공동생활을 했는데 거기에서 다윗이 그들의 스승으로서 먼저 행한 일은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면 그들을 가리켜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라고 짤막하게 알려줍니다. 당시 사울의 폭정아래서 극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울의 옳지 못한 정치 때문에 정의를 위해 자기 몸을 내던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사울의 긴급명령을 위반한 자로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여 억눌려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지금 다윗에게로 모여든 것입니다. 또한 가진 자들의 착취 때문에, 불공정한 거래 때문에, 혹은 일을 하다가 사기를 당하여 어쩔 수 없이 파산하여 빚지고 깊을 길이 없는 극빈자도 모였습니다. 그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깊은 상처받아 마음이 원통하고 불만이 가득한 자들입니다. 이들과 함께 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착하고 순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준비가 된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은 아마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문제 많고 골치 아픈 사람일 것입니다. 다윗이 그들을 가르칩니다. 그들을 훈련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먼저 다윗은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얼마나 존귀한 자라는 자존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패잔병이 아니라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꿈과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그들을 펄펄 나는 용사들로 키웠습니다. 무술, 활쏘기, 창검술, 전술 등을 훈련시켰을 것입니다. 장차 블레셋을 비롯한 원수와의 싸움에서, 나라의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백전백승 할 수 있는 강건하고, 정예화되고, 실력 있는 장군들이 바로 여기에서 다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무술만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상처 많은 그들을 안정시키고, 정서를 순화하여 부드러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합창을 부르고, 수금과 비파를 가르쳐 찬양의 위대한 힘을 알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이 시절에 만든 노래들이 대부분 시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그들에게 신앙과 인생, 민족과 역사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여러분, 교사로서 학생에게 가장 귀한 사역은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교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사는 잘 가르치는 은사가 있어야 하고, 학습의 효과를 보도록 준비해야 하고, 또 교회는 교사가 잘 가르치도록 모든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 교회교육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이 일이 한때 한국에서 얼마나 잘 이루어졌는지 모릅니다.

  근대한국의 역사에서 최초의 교육이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이 일을 먼저 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좋은 학교로 우뚝 선 고등학교와 대학들이 모두 그런 배경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좋은 교육의 방법도 모두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구연동화, 시청각교육, 교재사용 등 우리 나라 교육의 모체가 되었던 교육은 교회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전에는 교회가 가장 현대식이었습니다. 배우기를 원하는 학생이 가장 가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교회 교사가 인기가 많았습니다. 모두 교사를 하고 싶었고, 뛰어난 교사들이 교회에 모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회가 가장 뒤떨어진 장소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교육이 세상의 교육보다 훨씬 뒤집니다. 교사로서의 헌신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젠 웬만해서 아이들을 집중시키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아이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일에 관심을 갖고 고민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아낌없이 투자해야 합니다. 좋은 교사를 만들고, 잘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자꾸 오고 싶어하는 그런 터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일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둘째, 본을 보인 삶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둘람에서 400명의 거친 사람들에게 그냥 말로 교육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스승으로서 다윗은 삶의 본을 보였습니다. 함께 살면서 보고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큰 신뢰감을 주었고 나중에 다윗을 평생 따르게 했던 요인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나중에 다윗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다윗이 단순히 그들을 교육하고 훈련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면서 가까이 에서 다윗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그들에게 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본이었을까요? 이 때에 지었던 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시편 57편과 142편입니다. 이 시를 분석해 보면, 다윗이 그들에게 2가지 귀한 삶의 본을 보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의 본입니다. 이것이 시편 57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찾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신앙인으로서 경건생활을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말씀과 기도를 삶의 우선 순위로 삼았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아마 다윗부터 새벽기도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다윗은 기도하는 사람이고, 말씀을 가까이하고, 예배드리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강한 인상으로 남은 것입니다. ‘그래 신앙인이라면 저렇게 하는거야’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이런 다윗을 보면서 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또한 그가 보였던 본은 진실한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시편 142편의 내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외식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하지 않았습니다. 겉과 속이 같았습니다. 회칠한 무덤 같지 않았습니다. 늘 진지했고 솔직했습니다.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살았습니다. 이런 진실한 삶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다윗처럼 살아야지, 저렇게 하는 거야,’ 그들은 다윗을 보면서 그렇게 마음에 고백했고, 그런 다윗을 존경하고, 배우고, 따라갔던 것입니다.

  교육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말로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을 보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학생들은 교사를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따라합니다. 나중된 자는 먼저된 자를 따라합니다. 경건의 본을 보이고, 진실한 삶을 살면 그것이 큰 영향을 주게 줍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실 까요? 좋은 본을 보이겠다고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강한 자로 우뚝 세운 것입니다. 본문은 짧은 두절로 끝나지만, 아둘람에서 다윗과 함께 했던 이들의 삶은 다윗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성경은 이들의 관계를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이라는 말로서 강조하는 것을 봅니다. 여기에서 함께 한 사람들이 결국 통일 이스라엘의 주역이 되고, 다윗 왕권의 핵심인물이 나왔습니다. 압살롬의 반역 때에 끝까지 다윗 곁을 지켰습니다. 마지막에 반란군과 싸워 이길 때에도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특히 사무엘하에 보면 다윗의 3대 명장과 30명의 용장들의 공적이 실려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아둘람 시절 다윗과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이 다윗과 목숨을 건 사랑으로 묶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처음 뭔가 인생이 뒤틀어진 사람들이고, 상처받아 삶이 삐뚤어진 자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약하고, 허물 많은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다윗의 훈련과 삶을 배우면서 결국 강한 자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들도 온전한 자로, 성숙한 자로, 남을 이끄는 자로, 본을 보이는 자로, 스승으로 서게 된 것입니다.

  교육의 목표는 학생을 온전한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들도 이제 스승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약한 자였지만 강한 자로, 미숙하지만 성숙한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스승이 필요하고, 교육이 있고,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감당한 일이었고, 앞으로도 해야 할 일입니다.

  누가복음 6장 3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이 말씀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는 법입니다. 둘 다 소경이면 구덩이 빠집니다. 그래서 한사람은 소경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눈이 떠진 자가 안 보이는 자를 인도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구조와 교회의 모습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가슴에 품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를 이끕니다.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도와주고, 성숙한 자가 미숙한 사람의 몫까지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이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다음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언제까지 학생으로서 남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가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부족한 자가 온전케 되어야 하고, 약한 자가 강한 자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제 그들도 선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워싱턴에 ‘세이비어 교회’가 있습니다. ‘고든 코스비’라는 사람이 지난 1947년에 세운 이 교회는 현재 150명의 작은 교회이지만 미국을 움직이고, 사회에 영향을 주고, 세계의 크리스천들에게 커다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먼저, 철저한 모임입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미국의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출석교인, 등록교인, 세례교인, 정교인으로 나눕니다. 이 교회는 150명의 성도는 모두 인턴과정을 거친 정교인입니다. 이들은 교회의 무슨 모임이 있으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참여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주일 낮 예배와 주중모임의 숫자가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감동의 예배요,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의 예배라고 합니다. 이들은 무엇을 행하기 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가장 우선순위를 두고 모임에 마치 영적생명을 걸고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철저한 헌신입니다. 특히 물질의 헌신자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온전한 십일조를 포함하여, 그 이상의 헌금을 드립니다. 교회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다면 열심히 모은 그들의 소중한 물질을 인색하지 않고 바칩니다. 그래서 이 교회의 일년 예산이 1000만 불인데,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0억에 해당됩니다. 우리 나라 교회의 평균으로 말하면 약 만 명에 해당되는 예산입니다. 150명이 만 명의 몫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요, 철저한 헌신입니다.

마지막으로, 철저한 봉사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사회를 위해 봉사가 필요한 현장이면 언제든지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 작은 교회에서 이웃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기관과 단체가 7개 분야, 70가지의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거사역, 가족사역, 치유사역, 영성사역 등 이들이 지금 일하는 분야가 그 지역과 미국 전역에 펼쳐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의 모습이 이상일까요? 이것은 미국에만 있고 한국에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이 땅에 전 인구의 25%가 믿는다고 하는데 지금 한국은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고, 그 약한 자가 다시 강한 자가 되어 모두 온전해 지는 진정한 교회의 모습, 이것이 주님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언제까지 마냥 약한 자로 남겠습니까? 우리는 영원한 학생으로서 인생을 끝내야 하는 아닐까요?

  여러분, 이제 우리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해야 합니다. 먼저된 자가 나중된 자를 이끌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를 이끌어야 합니다. 모이는 자가 모이지 않는 자의 몫까지 감당하고, 기도하는 자가 기도하지 않는 자를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약한 자가 강한 자가 되고, 나중 된 자도 먼저 되고, 기도하지 않는 자가 이제 기도하고, 제자가 선생이 되어 모두가 주님이 기뻐하는 자리까지 서도록 소원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일이 우리 시대에 이루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여기 한국교회에 일어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서부터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스승이 되어서 진리로 이끌고 날마다 가르치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그 진리 안에서 좋은 교사, 좋은 사람, 성숙한 성도로 변화되어 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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