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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아버지를 생각하는 그의 아들 예수 (요 1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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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되는지 모른다. 거리에서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보라. 바지 위에다 치마를 입고, 속 옷같이 생긴 옷을 겉에 입는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정신이 없다. 특별히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급격한 변화를 겪은 민족이다. 신발의 예만 들더라도 인류 문명이 여러 종류의 신을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이 인류의 역사 속에 흐르는 다양한 종류의 신을 한 세대에 다 신어본 사람들은 유일하게 대한민국의 어르신들이라고 한다. 우리 아버님 세대에만 해도, 짚신 > 고무신 > 운동화 > 군화 > 가죽구두 > 국내외 고급 브랜드 구두를 신으셨다.

이같이 우리 나라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그런 세대이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옷 입는 스타일만 바뀐 것이 아니라 생활 스타일도 많이 바뀌고 있다. 굳이 결혼해서 얽매여서 아이 낳고 살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예배 시간에 어느 학생이 모자를 쓰고 있어서 목사님이 모자를 벗으라고 권하였다. 그러더니 끝까지 벗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가면서 목사님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이 안경 쓰고 계신 것이나 내가 모자 쓰고 있는 것이나 다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세대의 톡톡튀는 그런 생각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니까 신인간이라 혹은 신인류라고 부를 정도이다. 그리고 미래학자들이 예견하기를 앞으로는 도덕의 원칙, 종교의 원칙 등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실제로 어느 딸이 낳아준 엄마에게 “탈렌트처럼 예쁘게 낳아주지 않았으니 나를 책임지라. 나에게 성형수술비 얼마를 내 놓으라”는 식으로 원망을 하였다고 한다.

새롭게 변화되는 것은 좋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삶의 중요한 원칙들은 지켜져야 되지 않겠는가? 오늘 함께 나눌 삶의 중요한 원칙은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삶의 원칙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으로 향하여 갈 때에 열가지 삶의 원칙을 가르쳐 주셨다. 첫 번째 계명부터 네 번째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원칙을 지키고 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 까지는 주변의 사람들과 이러한 원칙을 지키며 살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을 향하여 지켜야할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세월이 지난 후에 모세가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십계명을 풀어서 전한다.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십계명에 기록된 이 말씀, 특히 인간과의 관계에서 부모를 향하여 공경하라는 이 말씀은 과거 수 천년 전에 세운 약속이 아니다. 시내산에서 세운 약속이 아니다. 이 약속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바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러기에 이 약속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지금도 유효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고별의 기도문이다. 예수님의 기도문 속에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마음, 그리고 육신의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마음, 그리고 주변에 어르신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배우기 바란다.

분명한 말씀을 드리자면, 예수님은 철저히 아버지께서 베푸신 은혜를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가 곧 아버지로부터 온 것을 고백하신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공로임을 자랑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세밀하게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또한 부모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릴 때의 일이다. 어머님이 영일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나도 그 학교의 학생이었다. 체육시간에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나는 꼴찌를 했다. 운동장을 몇 바퀴를 달리는 오래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달리다가 나도 모르게 우연히 엄마가 가르치는 교실을 바라보았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고 운동장에서 꼴등으로 달리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계신 것이 아닌가? 나는 어릴 때에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앞서기를 위해서 몸을 틀었을 것이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며” 이 찬양을 부를 때면 어렸을 때에 어머님의 이 눈빛이 생각난다.
이같이 부모님의 마음은 한결같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한 가지의 마음 밖에 없다. 이 시간에 우리의 부모님들을 생각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함께 불러보자.

1.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2. 어려선 안고 업고 얼러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어머니 아버지의 이런 마음이 없었다면 이 세상이 이렇게 유지될 수 있을까? 부모님은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 하나뿐이다. 베푸신 은혜를 세밀하게 기억하자. 자식의 허물이 있으면 소리없이 그것을 덮어 주시려고 뒤에서 애쓰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우리는 세밀하게 기억해야 할 줄로 믿는다.

어느 햇살 따스한 오후, 그네에 걸터 앉아서 아빠와 아이는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빠, 내가 이기면 장난감 사주고 아빠가 이기면 제가 안마해 드릴께요.” 꼬마 아이는 신나서 가위바위보를 한다. “와! 내가 이겼다. 아빠, 이번엔 피자 내기 가위바위보 해요.” 계속해서 가위바위보를 했지만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이의 신이 난 표정을 보며 흐뭇한 미소로 말한다. “이제 우리 가위바위보 그만하고 장남감도 사고 피자 먹으로 갈까?”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한 할아버지가 ‘참 다정한 아버지구나.’ 생각하고 다가와 말을 건네었다. “보기 좋구려. 아들이랑 다정하게 가위바위보 하는 당신 모습이 말이오.” 아버지가 이렇게 말한다. “가위바위보는 우리 애가 너무 좋아하는 놀이예요. 하지만 저는 단 한번도 이길 수가 없답니다. 우리 애가 무엇을 낼 것인가를 이미 전 다 알고 있거든요. 그 놈은 일년 전 사고로 손가락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지요. 언젠가는, 녀석이 철이 드는 언젠가는...더 이상 가위바위보 놀이를 하지 않으려고 하겠지요. 그런 날이 안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면 제 가슴이 많이도 아플 테니까요.” 아들은 손가락이 없으니 매번 주먹만 낸다. 아버지는 그것을 알고서 언제나 가위만 낸다. 아버지는 언제나 이길 수 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져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이 아닌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이길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져주신다. 부모님은 우리를 언제나 이길 수 있었지만, 언제나 져주셨다. 자식 사랑 때문에.... 어버이 주일을 지나는 이날 우리는 부모님의 세밀한 사랑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는다.

그러면 이렇게 베푸시는 은혜와 고마운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보답해야 되겠는가?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의 기대를 이루어 드렸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 드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는 고통이 앞에 놓여져 있었다. 예수님 스스로도 그 길을 피해서 다른 길로 가고 싶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소리 내어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래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십자가를 져야 하는 그 모진 고통의 길을 회피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원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면 나는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고백하셨다. 십자가의 길을 갈지라도 아버지의 기대를 이루어 드려야겠다는 효자의 길을 걸으셨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아버지의 기대를 이루어 드렸다. 부모는 자식을 끔찍하게 사랑한다. 그 사랑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부모님의 기대를 이루어 드릴 책임이 있다. 자기의 뜻 데로 되지 않는 다고 하여 부모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그 사람은 천하의 불효자가 아닌가? 분명한 것은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에 대한 기대가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 말씀은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다는 점이다. 부모님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그 말씀은 곧 우리를 향한 부모님의 기대가 있다는 점이다.

시골 어떤 지역에는 닷새 만에 장이 선다. 장이 서게 되면 아들은 그동안 모은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서 장에 팔러 나간다. 늦은 저녁이 되면 어머니는 이제나 저제나 아들을 기다린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 걱정이 되어 동구 밖까지 나가본다. 멀리서 한 사람씩 보이기 시작한다. 어머니는 좀 더 자세히, 좀 더 멀리 보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간다. 이 애틋한 마음을 한자에서는 어버이 친(親)이라고 한다. 이제 아들은 시장에 가서 나무를 팔아 그 돈으로 어머니께 드릴 반찬과 몇 가지 일용품을 사들고 오다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만난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공손하게 말한다. “어머니! 다리 아프실텐데 어찌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제가 업어드릴 테니까 이 지게 위에 타십시오.” 그래서 노인을 지게 위에 태우고 오는 아들의 모습이 한자의 효도 ‘孝’자이다. 부모님은 자식을 언제나 나무 위에 올라서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신다. 언제 오나. 어떻게 되고 있나. 잘 하고 있나. 궁금한 마음으로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우리는 그 부모님의 눈빛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으로 부모님을 편안하게 지게에 모시고 돌아오는 모습이 바로 효이다.
질서와 원칙이 무너지는 이 시대에, 혼란스럽게 변화되는 이 시대에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시려는 효를 통해서 우리 나라의 좋은 전통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정신이 우리의 가정에도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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