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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하는 십자가 (딤전 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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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화> Literary digest 지상에 알프스의 개미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게재된 일이 있습니다. 
  “개미 집 속에 불타는 초를 세워 놓으면, 개미는 동무들을 돕기 위해 그 불에 올라가 몸으로써 불 끄는데 진력합니다.
  개미가 불 가운데 들어가 몸이 불타면 그 가죽에서 키츤스라는 불연성의 진액이 나와 불이 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희생적 행위가 개미 나라를 곤충 가운데서 가장 강한 것이 되게 한 것입니다. 
  남미에 있어서는 식물까지도 개미에게 숙소를 주고 개미의 도움을 빌며, 개미의 생활에 적응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실로 희생 행위만큼 무섭고 강한 것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산상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인간에게 주는 형벌 중, 최대의 악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극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① 육체적인 고통은 물론,
  ② 정신적으로 자결만도 못한,
  ③ 마음의 작용을 주는 형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처형을 당한 사람의 자손은 돌에 맞아 죽거나, 먼 타국으로 도망을 가야만 했습니다. 
  이 고난의 십자가를 주님이 지신 것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언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일곱 교회에게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을 우리는 유기물이라 부릅니다.  시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중심이 되지 않는 기독교는 죽어 버린 종교에 불과합니다. 

  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① 멸망의 자식들을 생명의 자녀로 옮기셨고,
  ② 그리스도인의 가난한 삶을 부유하게 변화시켰으며,
  ③ 황폐해져 가는 교회에 생명의 능력을 부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이 십자가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전 700여년전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예언했던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그는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 하였도다.”(사53:2-3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에 대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방인에게 뿐만 아니라, 선택의 백성들에게까지 버림받을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절)고 감격스럽게 외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오직 한가지, 곧 십자가뿐이었습니다. 
오늘도 피로 물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골고다 언덕에 우뚝 서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시려고 그 치욕된 십자가를 피로 사신 교회 위에 남겨 두셨습니까?
십자가를 통해 들려 오는 두 가지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십자가는 우리가 죄인임을 말해 줍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딤전1:15절)
  십자가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은 영원한 증표입니다.
이 증표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자 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죄인 됨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치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아무런 의미 없는 죽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회개시키기 위하여, 치욕의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신학교의 교과목 중에 설교학이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설교학의 권위 있는 학자들 중에 한사람은 “죄에 대해 설교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교인의 숫자가 줄어듭니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는 드러나야 합니다. 
벌거벗은 채로 그 더러운 상처들을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것을 아무리 싫어해도 말씀을 통해 여러분 안에 있는 죄악들을 지적해 낼 것입니다. 
  그것이 몰고 올 심판이 얼마나 불같이 무서운 것인가를 끊임없이 선포할 것입니다.


  예화> 어느 한 사형수가 사형 당하기 전에 할말이 있으니 잠깐 임금님을 뵙게 해 달라고 하여 임금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죄수는 품에서 금덩이 하나를 꺼내더니 “이 금덩이는 죄 없는 사람이 심으면 싹이 나서 금덩이가 열립니다. 
  그런데 저는 이미 죄인이므로 심어도 소용이 없으니 임금님께 이 금덩이를 드리고 세상을 떠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임금은 속으로 ‘나도 죄가 있으니 심어도 싹이 안 날거야. 
그리하면 망신만 당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도 곤란하지 않겠나!’
  생각하고 대신들에게 심어 보라고 권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대신들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사양하면서 누구 하나 심으려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본 죄수는 “온 세상 사람이 다 죄인인데 왜 하필 나만 죽어야 하는가…” 하며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임금님 이하 모든 대신들은 얼굴이 빨개져서 이 죄인을 방면해 주었습니다.

  하나의 우화에 지나지 않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언가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성경에도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롬 3:10절) 고 했습니다.
  왜 이러한 죄의 지적이 이처럼 필요합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롬 3:23)
  ② “너희는 허물과 죄로 죽었다.” (엡 2:1절)
  ③ “너희는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엡 2:3절)
  십자가는 말합니다.  죄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과연 그렇게 죄인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① 그는 도덕적인 젊은이였습니다. 
  ② 그는 종교적인 인물이었습니다.
  ③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엘리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 앞에서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절)

  사도 바울이 이 글을 쓴 것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약 30년이 흐른 뒤의 일입니다. 
  이제 그가 순교를 1-2년 앞둔 때입니다.
① 주님을 만난 이후로 30여년을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
② 주님을 위해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많이하고 매도 수없이 맞았으며,
③ 이제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순교를 앞에 둔 백발의 사도가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는 모습을 보십시오.

  무엇이 이 성자가 된 사도에게 ‘너는 죄인이다!  다만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다’ 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십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가 들려주는 음성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여기에 모인 저와 여러분이 들어야 할 음성 인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죄인” 이라고 말합니다.
  그 많은 죄인들 중 “괴수”(프로 토스)라고 말합니다.
“괴수” - 이 말은 헬라어 원어의 의미로, 첫 번째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적마다, 참으로 죄인의 서열대로 줄을 선다면, 제일 앞에 서야 할 인생임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은 몇 번째쯤 된다고 생각되어 집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앞서 고백한 죄인 됨을 뒤엎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었도다”(딤전 1:16절)고 말합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소망 없는 죄인에게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독생자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것을 가능케 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죄와 형벌에서 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절)
  여러분은 이 사랑을 믿으십니까?
이 사랑이 나타난 십자가를 자랑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이어서 본문은 “죄인 중에 괴수”인 바울에게 이같은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 지를 말해 줍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딤전 1:16절)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으심”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참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마음을 다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말하는 십자가로부터 들려 오는 두 번째 음성을 들으십시오.

  십자가는 말합니다.
소망이 없는 죄인들인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너를 사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너를 사랑하신다”
① 이 십자가를 보라!  너를 구원하려 하심이라.
② 이 가시 면류관을 보라!  너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이라
③ 이 못 박힌 손발을 보라!  내가 너를 사랑하기 위함이라.

여러분이 진실로 이 고난의 십자가를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되신 것을 믿으십니까?
  진심으로 이 부족한 종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①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② 십자가를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구했습니다.

  치욕의 십자가에 나타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이제 20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는 사라진지 오랩니다.
  그러나 이 시간도 우리들은 십자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강단 위에 우뚝 서서 이 세상의 버려진 영혼,
            하나님을 등진 영혼들을 향해 말합니다.
  “너희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또 “하나님이 죄인 된 너희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 십자가의 음성 앞에 어떻게 하시렵니까? (설교 / 강인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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