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울며 가슴 치며 (창 27:30-34, 계 18:9-20, 눅 23:27-29)

  • 잡초 잡초
  • 272
  • 0

첨부 1


역사에는 "나폴레옹의 눈물"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적과 싸우는데 적이 사방에서 진을 좁혀서 공략해 들어오는 바람에 부득이 퇴각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적이 모든 교량을 다 끊어버렸기 때문에 여기서 빠져나가려고 하면 새 다리를 놓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디 가서 무슨 자재를 가지고 와서 다리를 놓을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다리를 건설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지금 나폴레옹 군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교량을 건설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충성스럽고 튼튼한 군인들을 선발해서 강으로 들어가서 서로 몸과 몸을 부둥켜안고 다리를 만들어 자기들을 밟고 군인들이 건너가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여간 그렇게 하여 구사일생으로 그 위기를 넘기고 나폴레옹의 군인들은 무사히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다시 나폴레옹의 명령이 내렸습니다. 이제는 다리를 만들었던 군인들도 강에서 올라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날 날이 너무 추워서 강에 내려가서 다리를 만들었던 군인들은 찬 강물로 인하여 서로 얼어붙어 버렸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충성스런 군인들을 바라보는 장군 나폴레옹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 계시록 본문에는 울고, 애통하고, 가슴 친다는 말씀이 여러분 등장합니다. 성경에는 눈물 또는 울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눈물에는 긍정적인 눈물도 있지만 그 반대인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눈물들을 한번 살펴보기로 합니다.

1. 먼저 부정적인 눈물을 살펴보십시다.

(1) 어떤 사람이 그린 성화에 범죄한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는 보습을 그린 것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아담이 한 손으로 아내 이브의 손을 잡고 나오는데 다른 한 손으로는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사탄에게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범죄하고 났을 때 그들에게 내린 벌은 너무도 엄청나고 불행한 것이었습니다. 축복의 동산에서 쫓겨나서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는 땅을 경작하라는 명령, 그리고 끝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흘린 눈물은 바로 회한의 눈물이었습니다.

(2) 그러나 성경에서 가장 슬프게 우는 장면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구약 본문인 에서의 눈물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이었습니다. 그래도 형이기 때문에 축복의 승계는 자연히 에서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장자 명분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사냥하고 돌아와서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야곱이 끓여놓은 팟죽을 보는 순간 말하자면 정신이 횅하니 돌아버렸습니다. 그는 야곱이 요구하는 대로 장자의 명분을 팟죽 한 그릇과 교환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나중에 두고두고 그 운명을 불행하게 결정짓는 일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듯이 아버지가 마지막 유언을 하기 위하여 에서에게 사냥을 해오라고 했습니다. 그 사냥해온 고기 요리를 먹고 나서 에서에게 축복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어머니와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눈이 어두운 것을 기화로 요리를 만들어 대접해 드리고 축복을 가로채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가지고 아버지에게 갔을 때는 이미 야곱에게 모든 축복을 빌어주고 난 후였습니다. 에서가 아무리 울며불며 복을 빌어달라고 했으나 이미 모든 것은 "상황 끝"이었습니다. 에서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기는 했으나 그것은 아무 필요도 없는 눈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요한 계시록 본문을 보십시오. 9절에 "울며 가슴을 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11절에 "울며 애통한다"고 했습니다. 15절에 "서서 울고 애통한다"고 했습니다. 19절에도 "티끌을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며 외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눈물들은 한푼 어치의 가치도 없는 눈물들입니다. 이들이 왜 웁니까? 하나님 없이 그동안 죄악과 함께 누리던 영광들이 살아졌기 때문에 울고 애통합니다. 더 이상 향락을 누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저들은 이미 회개할 마음도 기회도 잃어버린 불행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12:17)에 보면 에서의 일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바가 되어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기회를 놓진 사람의 불행을 말합니다.

(4)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시고 난 다음 여러 차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룟 유다를 깨우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었습니다. 에서의 팟죽 한 그릇과 너무 흡사합니다. 그러나 그가 잘못했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기회가 지나간 뒤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매어 자살하는 것으로 비참하게 그 생애를 끝내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성경은 지금이 바로 기회라고 합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주 자주 여러분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물도 흘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헌신도 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주님께 무엇을 드린다고 할 때 그것도 기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기회가 바로 지금이라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치게 되면 우리 눈물도 소용없는 그런 때가 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 계시록 본문의 애통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금 주님 앞에서 여러분의 신앙과 헌신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2. 눈물의 긍정적인 측면을 살펴봅시다.

(1)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때 다윗은 충성된 장군 우리야를 죽이면서까지 자기 욕정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다윗을 책망했습니다. 우리는 왕과 선지자의 관계를 지금 대통령과 목사 차원에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요새같이 대통령을 마치 개 패듯 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당시는 "짐(朕)이 곧 국가"였습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일개 선지자가 왕을 찾아와서 책망을 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방바닥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해 주는 대로 다윗은 베개를 적시기까지 눈물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 눈물을 헛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천사들을 보내셔서 그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으셨습니다. 다윗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윗이 그런 엄청난 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신약에는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 흘리며 통곡하면서 회개했기 때문에 다시 수제자의 위치를 회복하였습니다. 이것이 눈물의 효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래서 고통 하십니까?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눈물 흘리시기 바랍니다. 칼빈은 눈물의 기도야말로 성도의 가장 강한 무기라고 했습니다.

(2)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가실 때 갈릴리에서부터 온 여자들이 가슴을 치면서 울면서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뒤를 돌아보시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부르시면서 그 멸망을 애통해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져도 좋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자기 민족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런 표현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자기 민족을 너무도 사랑했습니다. 아니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구약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얼마나 눈물을 흘렸으면 아예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까지 일컫습니다. 특히 에스더와 유다인들의 눈물이 있습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눈물을 요구하십니다. 지금 이 나라는 정말 "누란(累卵)의 위기"라고 할 만큼 어렵습니다. 우리는 마치 국외자처럼 마냥 비판만 할 것이 아닙니다. 눈물 흘리며 이 땅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은 우리 눈물이 그냥 땅바닥에 흘러 버리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뜨거우셔서 이 땅을 구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 일을 위해 오늘 우리를 이 땅에 두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우리는 구약 성경의 히스기야가 흘린 눈물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죽을 병이 걸렸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때 히스기야의 병이 아마도 암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죽는다는 선고를 받고 났을 때 먼저 나라가 걱정되었습니다. 자기 할 일이 아직도 태산같이 남아 있는데 만약 지금 이대로 이 병으로 죽는다면 그 후에 반드시 혼란이 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면벽(面壁)하여 울며 통곡하며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자기 병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죽을병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고 그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를 다시 히스기야에게 보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히스기야는 수명을 15년이나 더 연장 받았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 뜻에 맞게 산다면 우리 육신의 질병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눈물을 보시고 응답해 주신다고 하는 이 사실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주께서 일으키시리라"고 했습니다. 

(3) 그러나 눈물이라고 하면 무엇보다 우리 주님의 눈물입니다. 히5:7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게쎄마네 동산의 기도를 말합니다. 땀을 핏방울 같이 흘리면서 3차례에 걸쳐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를 위한 중보 기도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롬8:에 의하면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여전히 우리 위하여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게쎄마네의 기도와 같은 기도입니다.

주님의 이 기도가 있어서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의 이 기도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놀랍고 또 확신에 넘치는 은총입니까? 이런 우리를 누가 그리스도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두 말할 것 없이 우리가 받은 은혜는 우리가 감당해야할 사명입니다. 우리도 남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기도를 통하여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고, 약한 이들이 든든한 신앙을 가지게 되고, 시험에 바진 이들이 이기게 될 것입니다. 저 모리아 산에 이삭을 제물로 요구하셨듯이 오늘 우리 교회에서는 주께서 여러분의 기도의 제물, 중보 기도의 제물을 요구하신다는 이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와 이웃,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때 주님은 이 기도를 그의 병에 담으시고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흘리는 눈물이 어떤 것입니까? 지금 여러분이 흘려야 할 눈물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계시록 본문에 나오는 눈물 같은 헛된 눈물을 흘리기 전에 정말 주님이 찾으시는 고귀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사오나 오늘 이 땅에는 아직도 가치 없는 눈물 흘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들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옵소서. 주여, 저희들로 하여금 이 땅의 현실을 보며 눈물 흘리며 기도하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또한 주님 백성들이 흘리는 눈물을 받으시는 주께서 주의 뜻을 속히 이루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설교 / 김오동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