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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성령강림의 축복 (왕상 18:36~38, 행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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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오순절을 맞이하여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님께서 임재하신 날입니다. 동시에 오늘은 우리 교단이 정한 청년주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청년들은 한결같이 자랑스러운 젊은이들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학교생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이들에게서 우리 교회의 희망이 보입니다. 특히 ‘이태백’ 즉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고 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때에 여러분의 앞날이 주님이 인도하시는 날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 우리 청년들 대견합니다. 이들에게 미래 우리 교회를 맡겨도 되겠다고 느낄 만큼 자랑스럽습니다. 오늘은 교회력에 맞추어 성령강림의 축복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성령 강림의 두 가지 과제는 예수님의 승천과 맛디아를 선택하여 12사도를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성령을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가시고 성령님께서는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님은 임재하신 것입니다.

  성령 강림의 구체적 동기는 기도입니다. 처음 제자 120명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님을 초청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은 오십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오십니다.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어도 기도 없이는 안 오십니다.

  흔히 성부시대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시대(God for us)라고 합니다. 성자시대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시대(God with us)라고 합니다. 성령 시대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시대(God in us)라고 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던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이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이 땅에 임재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탄생은 교회의 두 가지 요인인 신적 요인과 인적 요인에 기인합니다.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강림은 교회 설립의 중요한 요건입니다. 우리 교회도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성령님의 임재로 비로소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구약에서는 히브리말로 ‘루아흐’라 합니다. 신약에서는 헬라말로 ‘프뉴마’라 합니다. 이 두 단어가 다 바람이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바람, 비둘기, 기름, 불, 생수, 보증 등은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성격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 중에서 바람과 불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시편 104:4에는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고”라고 합니다. 바람과 불꽃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또한 성령은 정결하게 하시는 역사로 묘사합니다. 말라기 3:2에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은 창조 때부터 짝이 되어 일했습니다. 태초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이제 성령님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령님은 또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보혜사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보혜사’란 말은 웹스터 사전에 의하면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설명 가운데 공통점은 ‘보혜사’는 ‘인격체’라는 사실입니다. 보혜사란 상담자, 조언자, 위로자, 중재자, 조력자, 대변자, 지도자, 지지자 그리고 친구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에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격’을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습니다. 성령의 ‘내재’를 믿습니다. 진정한 교회, 진정한 예배, 진정한 교제, 모든 그리스도인 삶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초대 크리스천들의 입맞춤은 성령님을 전달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만찬이 끝난 다음 지체들이 서로 입맞춤으로 성령님의 전달을 느꼈습니다. 성령강림의 축복과 함께 진정한 교회, 진정한 예배, 진정한 교제가 가능하고 내재적 평안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령님의 강림은 온 집에 가득한 축복입니다.

  성령 강림의 첫 번째 현상은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라고 합니다. 성령 강림은 “하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의 근거를 말합니다. 성령님은 어디에서 오십니까? 하늘로부터 오십니다.

  구약성경에는 불이 내릴 때 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렸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를 마쳤을 때에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왔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신 선지자와 대결할 때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모든 제물들을 태웠습니다.
  성령님이 온 집에 임하신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람이었습니다. 바람 같은 성령님은 성령강림의 보편적 모습을 말합니다. 하늘로부터 내린 바람은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생기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은 사람을 만드신 재료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은 에스겔 골짜기 뼈들이 군대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힘입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바람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 거듭남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성령에 대한 답변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라고 하십니다. 바람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람의 풍화작용이나 퇴적작용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서서히 드러납니다. 요즘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는 바람을 타고 흙먼지를 실어 나릅니다. 황사가 멀리는 미국까지 간다고 합니다.

  루시 쇼는 그리스도인에게 영성이란 성령 즉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이란 히브리어 성서와 헬라어 성서에 의하면 바람이고 숨입니다. 바꿔 말해, 실체는 안 보이지만 그 작용과 영향력은 분명히 보이는 존재입니다.
  성령님이 온 집에 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다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모든 집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모두에게 성령님은 임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온 집에 가득하신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바람은 온 집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불은 온 집에 임하십니다. 온 집에 가득 찬 것은 온전하신 임재를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빈틈이 없게 하시려고 합니다. 성령님은 모두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의 강림과 성령의 충만은 다릅니다. 성령님은 강림하실 뿐만 아니라 충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은 다른 신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무디는 성령의 충만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컵에 공기를 제거할 수 있습니까? 어떤 분은 공기를 컵에서 다 빼내고 압축하여 진공으로 만들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무디는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컵이 깨집니다. 물을 집어넣으면 공기가 제거될 수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빈 곳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합니다. 빈틈이 있으면 안 됩니다. 마귀는 항상 틈새를 공략합니다. 귀신을 몰아내게 되면 더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오게 됩니다. 예수님으로 꽉 차야 합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1:21에는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라고 합니다. 사무엘의 아버지인 경건한 사람 엘가나는 그와 온 집이 하나님께 올라갔습니다. 온 집이 하나님 영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습니다. 바울이 루디아의 집에 들어갑니다. 루디아가 예수를 믿고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온 집이 함께 한 예수를 믿은 가정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감옥에 갇혔다가 간수를 회개하게 하였습니다. 간수의 집은 “그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라고 합니다. 온 집이 다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집이 하나님을 믿기를 바라십니다. 집에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15:12에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라고 합니다. 사무엘하 6:11에는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온 집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온 집이 복 받는 여러분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집과 우리 교회에 날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집과 교회에 성령님의 임재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모두에게 성령님을 주시는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십니다. 하나님은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은 온 집에 가득하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각 사람에게 임하신 축복입니다.

  성령 강림의 두 번째 현상은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합니다. 각 사람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모습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불같이 임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에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을 모세가 만났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예수님을 “그의 눈은 불꽃같고”라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은 불이십니다. 불꽃이십니다. 하나님은 타지 않는 불이십니다. 다른 모든 것을 태우시는 불이십니다.

  신명기 4:24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라고 합니다. 불이신 하나님은 불로 임재하신 성령님이십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전에 있을 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라고 합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불은 놓지 말라 내가 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불이십니다. 꺼지지 않는 불이십니다.

  하나님은 불로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꺼지지 않는 불이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십니다. 역대하 7장에는 솔로몬이 성전봉헌의 기도를 마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온 집에 가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각 사람에게 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강림은 개인적이란 의미입니다. 성령님은 온 집에 임재하시지만 개인적입니다. 이것을 성령강림의 보편성과 개별성이라고 합니다. 구원이 보편적이며 동시에 개별적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라고 한 말씀은 보편적이며 동시에 개별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입니다. 구원은 보편적이면서도 개인적입니다. 성령의 강림도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2:17에는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라고 합니다.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다는 말은 성령 강림에 예외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육체에, 모두에게 주십니다. 동시에 모든 육체가 개인적으로 성령을 받게 됩니다.

  모든 연동의 가정이, 우리 교회가 성령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개인이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장난입니다. 사람들은 불장난하면 안되지만 하나님은 불장난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뜨겁게 하십니다. 세상의 그 누구도 모든 사람에게 불을 주시고, 모든 사람이 다 골고루 뜨겁게 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불이 가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임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각 사람이 은사를 체험하고 새롭게 변화됩니다. 히포의 성 어거스틴은 성적으로 매우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회심한지 얼마 안 되서 뒷골목을걸어가는데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어거스틴, 보세요. 저예요” 어거스틴은 예전에 자신이 알고 지냈던 여인임을 한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여인에게 “당신은 당신이지만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강림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성령님 외에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브리스길라 와 아굴라는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부부입니다. 당대에 가장 지적이고 훌륭한 목회자였던 아볼로가 설교하는 것을 그들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습니다. 성령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더 자세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령님을 알아야 비로소 유식해집니다.

결론

  “우리는 영적 경험을 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한 영적 존재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생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드와이트 에드워즈가 쓴 ‘내면의 혁명’이란 책이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미국의 유명한 목회자요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5대손입니다. 그의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심리학자가 10명 지원자를 대상으로 외관상으로 혐오스러운 사람, 특히 얼굴에 흉터가 있는 사람에 대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실험하였습니다. 지원들은 서로 떨어져서 실험에 참가하였습니다. 분장사가 지원자의 얼굴에 추악한 흉터를 분장하여 손거울로 직접 보도록 한 다음,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기실에 가기직전에 파우더를 발라주는 척하면서 흉터를 다 지웠습니다. 그러나 실험에 참가한 대상들은 눈치를 못챘습니다. 지원자들은 대기실에서 경험했던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무례하고 자기들을 피하고 자기 흉터를 바라보더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자신에게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따라 자신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자신의 마음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평가합니다.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사람들은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엘리사는 스승에게 대답합니다.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원합니다.” 영감이 갑절이나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에게 이 영감이 갑절이 있어야 이 세상을 넉넉히 구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무디를 부흥회에 초청할 때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무디가 성령을 독점한 것입니까?” 그 때 다른 이가 말했습니다. “성령이 무디를 독점한 것 같애”. 우리 모두가 성령에게 독점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으로 세상의 혼란을 이기며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 /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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