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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조연배우 (6) : 영예로운 2인자, 모르드개 (에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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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2인자

우리나라 정치사를 보면 참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이른바 ‘3김시대’라는 시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3김시대’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1970년대 초반부터 30여 년에 걸쳐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세 사람의 김씨가 중심이 되어 이 나라의 정치를 이끌어온 기간을 뜻합니다. 이 ‘3김시대’는 김영삼 씨와 김대중 씨가 대통령을 지내며 계속되다가 ‘3김시대’의 마지막 주자인 김종필 씨가 지난 17대 대선 후 자민련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에서 은퇴함으로 비로소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의 김 씨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사람이 바로 김종필 씨입니다. JP라는 이니셜로 더 유명한 이 분은 박정희 대통령과 5.16을 일으켜 권력의 핵심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공화당 국회의원과 국무총리,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자민련 총재 등을 지내면서 그야말로 한국 정치의 가장 중심부에 서 있던 분이며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장로였던 정동감리교회 집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용어가 바로 ‘영원한 2인자’입니다. 그는 조금 전 말씀드린 대로 3김의 한 사람으로 한국정치를 이끌어온 사람이지만 3김씨 중 유일하게 대통령이 되지 못하고 정계에서 은퇴한 분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오른팔이었지만 그의 그늘에 가려 언제나 만년 2인자였습니다. 그 이후에도 민정당에서 김영삼 씨가 대통령이 될 때도, 또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언제나 2인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분을 부를 때 늘 ‘만년 2인자,’ ‘영원한 2인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정치인의 실명을 거론해 가면서까지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뭘까요? 세상 사람들 중에 스스로 2인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텐데 어떻게 해서 영원한 2인자가 되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분은 스스로 좋아서 2인자가 되었다기보다 그야말로 생존의 방법으로 이 길을 택한 것입니다. 워낙 거물인 1인자가 있었기에 내가 1인자가 되려 했다가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정치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그는 스스로 2인자를 자처하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처신 방법 때문에 이 분은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서도 권력의 중심에 가장 오래 살아남은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마지막이 너무도 쓸쓸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17대 대선이 끝난 후 이 분이 자민련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에서 은퇴할 때 TV에 나온 그 뒷모습이 정말 얼마나 쓸쓸하고 초라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결국 2인자에서 시작해서 2인자로 끝났고 한번도 주연이 되어 보지 못하고, 단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보지 못한 채 그의 정치여정은 끝이 난 것입니다.

스스로 2인자가 되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런 2인자와는 전혀 다른 또 한 사람의 2인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도 영원한 2인자였습니다.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어보지 못했고 주연으로서 박수갈채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2인자로 시작해서 2인자로 끝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것은 이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2인자가 된 것도 아니고 무슨 정치적인 목적으로 2인자가 된 것도 아닌 오직 신앙적인 이유에 의해 스스로 2인자가 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모르드개입니다. 에스더 2장 5~7절을 읽겠습니다.

5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저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소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6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7 저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고 용모가 곱고 아리따운 처녀라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 같이 양육하더라

모르드개는 삼촌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 딸인 에스더를 데려다가 자기 딸 같이 키워줍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분명히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성경책의 제목이 ‘에스더’서인데 정작 본문은 에스더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그 사촌오빠인 모르드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입니다. 그게 뭐가 이상하냐고 묻는 분도 있겠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본서의 제목이 ‘에스더’가 된 것은 당연히 에스더라는 인물이 주인공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고 그래서 에스더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에스더가 남긴 유명한 말 “죽으면 죽으리이다”(4:16)가 아닙니까?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마땅히 주인공인 에스더의 이야기부터 시작되어야 할 에스더서가 실제는 모르드개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한 것은 계속 에스더서를 읽어보고 결국 마지막 장인 10장까지 읽어보아도 실제로 에스더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이 모르드개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더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전면에 드러나는 주연배우는 분명히 왕후 에스더입니다. 그래서 이 책 제목도 에스더서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에스더서를 읽어보면 실제로 가장 중요한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은 바로 모르드개입니다. 모르드개는 사촌 동생 에스더를 딸처럼 잘 키워서 결국 대제국 바사의 왕후 자리에 오르게까지 합니다. 모르드개가 없었으면 에스더는 천애고아로 비참한 삶을 살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더가 왕후가 된 이후 모르드개는 대궐 문에 계속 앉아 있습니다. 그 까닭은 왕후 에스더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르드개가 코치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2장 19~20을 읽습니다.

19 처녀들을 다시 모을 때에는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더라 20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명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고하지 아니하니 저가 모르드개의 명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좇음이더라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이렇게 코치합니다. “왕에게 네가 유대인임을 절대 밝히지 말아라!” 그 까닭은 아마 에스더가 유대인임을 왕이 알게 되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해서일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모르드개의 신중한 자세는 나중에 엄청난 결과로 나타납니다. 하만이 재상이 되어 모르드개와 전 유대민족을 멸망시키려는 음모를 꾸밀 때 이 음모를 이겨낸 사람이 에스더입니다. 이 때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모르드개와 온 유대민족은 꼼짝없이 하만의 음모에 결려들어 다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만도, 아하수에로 왕도 에스더가 유대인인 줄 몰랐기에 방심했고 결국 그 틈을 타 에스더는 모르드개와 자기 민족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모든 일이 사촌동생이며 장차 유대민족을 구하게 될 수도 있는 왕후 에스더를 보호하려는 모르드개의 신중하고도 사려 깊은 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르드개의 명을 에스더가 전적으로 따랐다는 점입니다. 20절은 에스더가 마치 어렸을 때 모르드개의 손에 자랄 때처럼 왕후가 된 후에도 그 명에 순종했다고 증거합니다. 그래서 왕후 에스더가 주인공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뒤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정하고 코치한 사람이 바로 모르드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안 나타나지만 실제는 모든 것을 조정하고 이끌어간 사람이 모르드개인 것입니다. 위대한 코치 모르드개입니다.

2인자의 비애?

그런데 2장 21절부터 보면 이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임금의 암살 음모를 엿듣게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궐 문을 지키던 내시 빅단과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원한을 품고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데 모르드개가 이것을 알고 왕에게 알려 왕의 목숨을 구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도 모르드개는 절대 직접 나서지 않습니다. 22절에 보며 에스더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림으로 에스더가 왕에게 음모를 알리고 역모를 꾸민 두 사람은 나무에 달리게 됩니다. 성경은 23절에서 이 사건의 전모가 왕의 궁중일기에 기록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이 궁중일기는 나중에 하만의 음모를 이겨내는 결정적인 단서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분명히 모르드개가 암살음모를 알려 그 사건의 전모가 왕의 궁중일기에 기록되었다고 했는데 나중에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고 전 유대민족을 멸하기 위해 음모를 꾸밀 때 아하수에로 왕은 이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6장 1절부터 보면 왕은 하만의 음모가 진행되는 과정 중에 우연히 잠이 오지 않아 역대일기를 읽다가 이 암살실패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왕은 이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 중요한 사건을 잊고 있었을까요? 기억하다가 하도 업무가 바빠서 잊어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기억조차 안 한 것일까요? 아무튼 왕은 분명히 모르드개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사건 당시 모르드개가 직접 나서 왕을 만나고 사건을 고했다면 왕은 모르드개의 공로를 높이 사서 최소한 무슨 상을 주거나 관직이라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왕후 에스더를 통해 고하게 했고 결과적으로는 상도 못 받고 아예 왕의 뇌리에서 지워져 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억울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아무리 왕이라지만 내 목숨을 살려준 은인을 이렇게 까맣게 잊어버립니까? 저 같으면 억울해서 화병이라도 날 것 같습니다. 그런데 2인자라는 것이 늘 모양입니다. 2인자의 비애입니다. 일은 내가 다 하는데, 정작 어려운 일 힘든 일은 내가 도맡아 하는데 내 얼굴이나 이름은 나오지도 않습니다. 1인자는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수고는 내가 하고 생색은 1인자가 냅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누가 번다고요? 되놈(중국인을 가리키는 속어)입니다. 그러니 억울하지요. 저도 이런 경험을 가끔 합니다. 제가 이런저런 교회 단체 서기를 몇 개 맡고 있는데 실제로 궂은일은 서기가 다 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서기 이름은 하나도 안 나오고 늘 회장님 이름만 나옵디다. 2인자가 늘 이런 법입니다. 그래서 억울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 암살실패사건 당시 모르드개가 자신을 나타내려고 왕 앞에 직접 나서서 무슨 상을 받거나 했다면 그 때는 좋았겠지요. 하지만 일단 보상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 일은 완전히 일단락 났을 것입니다. 왕은 모르드개에게 빚진 것 다 갚은 셈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왕이 역대일기를 읽다가 이 사건이 기억났을 때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왕은 자기 생명을 구해준 모르드개를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너무도 미안해 황급히 모르드개를 불러 왕복을 입히고 왕이 타는 말을 타게 하고 왕의 관을 머리에 씌워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합니다. 미안해서 말입니다. 결국 이 일이 시초가 되어 모르드개는 생명을 건지고 유대인도 구원을 받습니다. 하만은 오히려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한 나무에 자신이 달려 죽는 일을 당합니다. 만약 그 사건 당시 무슨 보상이라도 내렸다면 결단코 이런 일은 없습니다. 이미 보상을 다 했으니 미안한 마음도 안 들었겠지요. 결국 잠시의 보상은 좋았겠지만 나중에 자신의 목숨과 동족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상 못 받고 인정 못 받고 기억에서 잊혀진 것이 억울합니까? 아니지요. 전화위복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늘 이렇습니다. 당시에는 아무도 안 알아주는 것 같아 참 억울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중에 더 놀라운 일들을 이루고자 계획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 순간에는 내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만, 그래서 2인자가 되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나는 사라지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몰라줘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다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하나님이 알아서 갚아주시고 보상해 주십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 받을 상보다 더 큰 상으로, 더 놀라운 은혜로 갚아주십니다. 그래도 억울합니까? 모르드개는 자신이 안 나서고 에스더를 내세움으로 오히려 행복한 2인자가 됩니다. 가장 영예로운 2인자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원리를 분명히 깨닫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기꺼이 2인자가 되고 조연배우가 되면 사람들이 알아주고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알아주고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이러한 모르드개의 자세와 신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너무나 유명한 장면, 하만의 음모를 알게 되었을 때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나눈 대화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암살실패 사건 후 아각 사람 하만이라는 자가 재상이 됩니다. 그런데 이 하만은 본디부터 허영기가 있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만은 다른 신하들이 모두 자기에게 꿇어 절하는데 오직 모르드개만 자신에게 부복하기를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모르드개만 죽일 뿐 아니라 그 민족인 유대인들 모두를 멸망시키고자 음모를 꾸밉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모르드개는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여 왕에게 이 음모를 알려 모르드개와 유대인의 생명을 구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에스더가 즉각 순종하지 않고 매우 주저합니다. 기억나십니까? 재작년 8월 3일 주일설교 때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적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 때도 지적을 했지만 에스더가 머뭇거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왕의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그 누구든지 왕의 부름을 받지 않고 궁전 안뜰에 들어가 왕에게 나아가면 죽음을 당하도록 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무리 왕후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게다가 당시 에스더는 왕의 부름을 벌써 삼십일이나 못 받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왕의 사랑을 잃은 지 오래인데 지금 왕 앞에 나아갔다가는 틀림없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므로 에스더는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지만 모르드개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향해 불같은 한 마디를 던지지 않습니까? 4장 14절입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이것은 이런 뜻입니다. 에스더가 만약 죽음이 두려워 왕에게 나아가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에스더가 안 한다고 하나님이 못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또 다른 방법, 다른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에스더와 그 가문은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모르드개가 한 위대한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너를 왕후에 오르게 한 것은 바로 이 때를 위함이다.”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 주저하던 에스더는 이 모르드개의 불같은 말을 듣고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왕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장면에서 정말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에스더의 말이 더 유명하지만 사실은 이 말이 나오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모르드개라는 사실입니다. 모르드개 없이는 이 말이 나올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나타난 것은 에스더와 그 신앙이지만 실제로는 그 뒤에서 이 일을 이룬 사람이 모르드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르드개의 역할과 신앙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모르드개는 분명히 전면에 나서지 않은 사람이며 에스더의 뒤에 가려져 있는 영원한 2인자지만 실제는 그가 모든 역사를 이루어낸 주역이었습니다. 그는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에스더에게 코치를 하기 위해 대궐 문 앞에 앉아있도록 하신 것도 이 때를 위함이고, 내가 분명 암살을 모면하도록 공을 세웠지만 아하수아로 왕이 이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도 이 때를 위함이며, 에스더를 왕후로 세우신 것도 이 때를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화려하지 않지만, 지금은 누구도 안 알아주지만, 지금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나지만, 지금은 어떤 결과도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야말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신앙입니다.

영예로운 2인자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조연배우 가운데 모르드개는 분명한 특징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 나서지 않고, 스스로 높은 자가 되지 않고 뒤로 물러간 사람입니다. 에스더를 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갑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중요한 일이 이루어질 때마다 에스더를 뒤에서 움직인 사람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나 할까요? 보이지 않는 실세입니다. 그러므로 제목은 ‘에스더서’지만 에스더서의 실제 주인공은 에스더가 아닌 모르드개라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책이 또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룻기입니다. 룻기의 주인공은 당연히 룻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그 시어머니 나오미입니다. 시어머니의 신앙과 배려로 룻은 새 가정을 이루고 메시야의 조상이 됩니다. 신약에서는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겉보기에 베드로와 바울 같은 사도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지만 실제로는 그들 뒤에서 보이지 않게 역사한 성령님이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사도행전’이라기보다 ‘성령행전’이라고 불러야 옳습니다.

이렇게 성경 곳곳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는데 우리도 오늘 이런 손을 느끼며 삽니다. 물론 일은 우리가 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 뒤에 보이지 않는 손이 늘 함께 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늘 보이지 않는 그 손길이 우리를 움직이고 실제로 내가 일할 힘을 주고 있음을 체험합니다. 그 손길은 바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또한 그 손길은 오늘도 나를 위해 기도하며 영적으로 밀어주는 사람들의 기도의 손길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늘 이 두 가지의 손길을 체험하며 그 손길에 힘입어 목회를 합니다. 여러분도 저 같은 체험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모르드개는 아름다운 2인자, 영예로운 2인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10장 2절에 보면 아하수에로 왕이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케 했다고 합니다. 3절에는 모르드개가 왕에게 높임을 받아 왕의 ‘다음’(2인자)이 되었는데 왕이 그를 높여주어 모든 유대인에게 존대를 받고, 동족들에게 ‘굄’(사랑과 아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모르드개가 낮아지니 왕이 그를 높였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르드개가 낮아지니 하나님이 그를 높이셨습니다. 낮아져 기꺼이 2인자가 된 모르드개를 하나님이 존귀케 하십니다. 낮아지니 높아진다는 원리, 내가 낮아지니 하나님이 높이신다는 이 원리는 빌립보 2장을 생각나게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11절을 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를 비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 더 낮아져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낮아지고 겸손해 지십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누가 나섭니까? 하나님이 나서서 직접 예수님을 높여 주십니다. 이것이 핵심적인 원리입니다. 이것이 모르드개가 우리에게 가르친 놀라운 진리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도 모르드개처럼 아름다운 2인자가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스스로 낮아지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그렇게 하십니다. 지금보다는 에스더서처럼 맨 마지막의 결과가 중요합니다. 이 믿음 가지고 오늘도 주의 영광을 위해 충성하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 설교 /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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