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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서 쓰시겠다면! (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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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5.22 설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순간의 감동과 감격은 우리가 이미 종려주일에 깊이 살펴보아서 모두가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 감동의 순간을 보면 어찌해서 이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예수님이 타셨던 나귀 새끼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적어도 이 세상의 왕으로 오신 분의 행차라면 이보다 더 화려해야 할 텐데 뜻밖에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모습은 참으로 초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설 때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하필 나귀 새끼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의 맞은 편에 있는 우리가 흔히 감람산이라고 부르는 올리브 산을 지나가시다가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제자 두 사람을 보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혹시 누가 너희에게 왜 푸느냐고 묻거든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여기 예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신 것은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였습니다.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을 정도로 아직 어린 나귀입니다. 당연히 누구도 타려고 하지 않습니다. 타고 가려면 어미 나귀를 탄다면 모를까 아직 어린 새끼 나귀를 탄다고 하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내심을 받은 제자 두 사람 중 누구도 이에 대해서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건너 편 마을로 갑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새끼 나귀를 풉니다. 당연히 주인들이 나섭니다. “그 새끼 나귀는 왜 푸는 거요?” 그들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대답을 합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나귀의 주인들이 허락을 합니다. 그래 그들이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옷을 안장 대신 나귀등에 걸쳐 얹으니 예수께서 올라타십니다.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예수님을 맞이하였던 그 놀라운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행렬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던 두 종류의 사람들을 먼저 보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두 제자이며 또 하나는 새끼 나귀의 주인들입니다. 먼저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가서 새끼 나귀를 끌고 옵니다. 주인들이 왜 새끼 나귀를 푸느냐 물을 때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만 말을 합니다. 거기에 아무런 말도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않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새끼 나귀를 탄다는 생각 자체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아니 지금까지도 걸어왔는데 새삼 무엇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그렇지만 이왕 타고 들어간다면 어째서 새끼 나귀냔 말입니다. 물론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서 왕으로 오신 분은 겸손하여서 어린것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철저하게 말씀을 지키셨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새끼 나귀에 담겨져 있는 비밀입니다. 비밀이라고 하니까 뭐 신비로운 새로운 무엇을 찾아냈는가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 이 비밀은 바로 예수님 자신도 주신 말씀처럼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 주님은 아주 귀하게 사용하시더라 는 것입니다. 새끼 나귀만큼 초라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무슨 볼품이라도 있습니까? 새끼 나귀를 타면 더 멋있어 보이기라도 합니까? 어미 나귀를 타도 별로 좋아 보이지를 않는데 하물며 새끼 나귀를 탄다면 얼마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이런 점에서 부족하고 저런 점에서 부족하다고요. 그래서 주의 일을 하는데도 주저주저 합니다. 무슨 일을 하도록 부탁이라도 하면 아주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는 손사래를 칩니다. “저 못해요 저 못해요.” 그나마 겨우 일을 맡겨도 조금 하다가 자기 생각에 잘 안 된다 싶으면 금방 이야기합니다. “그거 보세요 저는 안 된다고 그랬잖아요. 저 못한다고 그랬잖아요.” 거기다가 누구라도 나서서 그것도 일이라고 했냐고 하는 비난의 소리라도 들려보세요. 금방 울상이 되어서 “저 이 일 더는 못해요” 하고 도망쳐 버립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적어도 주님의 일을 하려면 은혜도 있고 능력도 있어야 하고 무슨 자신감도 있어야 하고 지혜도 뛰어나고 흔히 말하는 달란트라도 있어야 하고 뭐 구구절절이 주워 삼킵니다. 하지만 주님이 무엇을 타셨는가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안장조차 없습니다. 고삐조차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새끼 나귀에 누가 올라타고 계신지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만 왕의 왕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온 세계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이 올라타시니 비록 새끼 나귀를 타고 있음에도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맞이하더란 말입니다. 그 환호가 누구를 향해서입니까? 새끼 나귀를 향해서인가요?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을 향해서입니다. 환호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더 이상 새끼 나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더 예수님이 드러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신 비밀입니다. 보잘 것 없는 것을 통해서 더 큰 영광을 드러내시는 주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내가 가장 약할 때 주님의 능력은 더욱 강하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나의 연약한 모습을 보지 마십시오. 오직 나를 기뻐 받으시는 주님만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주님을 태우는 새끼 나귀가 되십시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기뻐 쓰시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나 같은 것을 어떻게 주님께서 귀하게 쓰시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자신을 볼 땐 영 자신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모세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 나는 아무런 능력도 없고 말도 잘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주님의 부르심에 따르지 못하겠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능력의 지팡이를 들려주시고 또 곁에 아론을 붙여주면서까지 기어코 주님의 일을 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지 않습니까?

디모데 후서 2장 20절로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큰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그는 주인이 온갖 좋은 일에 요긴하게 쓰는 성별된 귀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나는 금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나는 은그릇이 아니라서 안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물론 내 자신이 주님의 쓰시기에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새끼 나귀를 쓰시는 주님을 보십시오. 그때 제자들이 보냄을 받으면서 무어라고 그랬습니까? “안 됩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왜 시키십니까? 저희는 못합니다.” 그렇게 말했습니까? 아니요. 그들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새끼 나귀의 주인들은 또 어땠습니까? “이 새끼 나귀를 어떻게 쓰겠다고 하십니까? 새끼 나귀를 죽일 일 있습니까? 거기다가 안장도 없고 고삐도 없는데 안 됩니다.”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들 역시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는데도 그렇습니다. 나를 주님이 필요로 하신다면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아멘하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조건은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그랬습니다. 디모데 후서 14절로 19절까지를 보게 되면 첫째는 말다툼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를 힘쓰라고 했으며 셋째로 속된 잡담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다툼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자가 되며 속된 잡담을 피하면 하나님이 온갖 좋은 일에 요긴하게 쓰는 성별된 귀한 그릇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마치 새끼 나귀처럼 초라해 보여도 준비된 안장도 없고 고삐도 없는 것처럼 내게 준비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주님이 그 새끼 나귀를 타셨던 것처럼 나 역시 순종하여 따를 때 주님이 요긴하게 쓰시더란 말입니다. 거기에 “내가 어떻게 주의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은 다 떨쳐 버리시기 바랍니다. 도무지 사람이 탈 수 없을 새끼 나귀도 주님이 요긴하게 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한없이 부족하여 보여도 여전히 실수 투성이고 여전히 천방지축처럼 보여도 그런 나를 주님이 필요로 하십니다. 그것도 주님을 태우는 요긴한 탈 것으로 말입니다.

고린도 후서 2장 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만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질그릇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보물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능력은 내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내 능력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스가랴서 4장 6절에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보기에도 너무 보잘 것 없어 보이는데 남들은 또 어떻게 볼까 걱정합니까? 내가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주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말하겠습니까? 하지만 새끼 나귀에게는 준비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누구를 시험삼아 태워보기를 했습니까? 아니면 안장이나 고삐를 준비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주님이 필요로 하실 때 그냥 등만 내밀었을 뿐입니다. 주인들 역시 그대로 예수님께 드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새끼 나귀를 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그 가운데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보여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질그릇이라고 해도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면 그 주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드러날 것이요 내가 질그릇이기에 내 안에 담긴 보배로서의 주님의 모습이 더욱 값지게 빛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바로 순종하는 자세입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 받으십시오” 하는 고백입니다. 주님이 필요로 하시면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시면 내 목숨까지도 내어놓겠습니다 하는 고백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조금도 좌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도 실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부족한 모습 그대로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는데 나는 이런 모습인데 나를 어떻게 쓰시겠다고 하십니까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주님이 몰라서 나를 쓰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도 다 아십니다. 그런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 나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감사합니다 아멘” 밖에 더 있겠습니까?

아울러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다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거 보세요 나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 하고 다시 주저앉겠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안에 여전히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세워 가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내가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순종함으로 따르면 주님께서 부족한 나를 다듬어 가십니다. 필요한 것들로 채우십니다.

가나 혼인 잔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인들이 연회장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문 앞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씻도록 내 주는 물을 담는 항아리에 담겨 있던 물입니다. 그 물이 포도주로 변하고 난 다음 가져다 주었습니까? 아니면 하인들이 처음부터 항아리에 포도주를 가져다가 채웠던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물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들이 연회장에 가져다 주기 위해서 물을 뜰 때 그것은 단지 평범한 물이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손발을 씻기 위한 물일뿐입니다. 마실 물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믿음으로 순종하였더니 가장 좋은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그때 하인들이 무어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말도 안 된다고 했습니까? 우리는 도무지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습니까? 비록 우리들이 하인이지만 도무지 그 말에는 따를 수 없다고 했습니까? 아니요. 그들은 단지 순종했을 뿐입니다. 기적이 언제 나타납니까? 주님의 영광이 언제 드높이 드러납니까?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입니다. 나의 모습이 비록 내가 보기에도 영 아닌 것 같아도 그래도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따르고자 하면 주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나는 영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베드로전서 2장 9절로 10절에서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를 입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자비를 입은 사람입니다.”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보잘 것 없다고 하는데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 즉 하나님의 보물이라고 말씀하시더란 말입니다. 우리보고 하나님께서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보고 하나님께서 보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무 추해 보인다고요?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는 보물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보물로 보십니다. 왜요? 내 안에 보물 중의 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보물을 담고 있는 보물상자로 보십니다. 내가 약하고 부족하기에 나를 들어 쓰시는 주님의 빛이 더 아름답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순종하십시오. 감사하십시오. “나 같은 것도 필요로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대로 따르렵니다.” 그렇게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경우라고 해도 조금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마음 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그 안에 계신 주님만 보십시오. 그를 들어 쓰시는 주님만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더욱 그를 불쌍히 여기며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필요로 하시고 귀하게 쓰신 새끼 나귀처럼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비록 우리가 연약하고 비록 우리가 수없이 많은 죄와 허물로 범벅이 되어 있다고 해도 그런 나를 여전히 쓰시고자 하는 주님 앞에 그러기에 더욱 감사함으로 순종하여 따르며 주의 일에 힘쓰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어느덧 올리브 산의 내리막길에 이르셨을 때에,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을 두고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말합니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그런데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께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환호해도 그 가운데 꼭 시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무리 가운데 섞여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개의치 마십시오. 누가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더라도 결코 주저앉지 마십시오. 왜요? 내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찬양하면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 됩니다.

“주님 나 같은 것도 쓰시니 감사합니다. 나 같은 것도 필요로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비난도 듣게 하십니까? 감사합니다.”

그러면 조금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나는 단지 주님을 태우고 있을 뿐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주님만 태우지 않았다면 이런 욕도 안 먹었을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요 욕을 먹는 만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상급이 더욱 풍성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욕을 먹을수록 감사하십시오. 비난의 소리를 들을수록 더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일에 변함 없이 충성하십시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잘 했다 칭찬 받고 상급 받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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