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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비 된 만남 (행 9: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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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새들백 교회 <럭 워렌> 목사는
성공은 원맨쇼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말하면서
성공은 한 팀의 노력을 통해 이뤄진다고 말합니다.
즉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성공의 주요 요인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사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가다가
바로 예수쟁이 들이 믿는 예수를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사울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그를 비추어 눈이 어두워지고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를 만나 눈을 뜨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아나니아와 사울!
어떻게 보면 전혀 연결될 수 없는 두 사람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연결되고 그들의 순종을 통해서
사울이 기독교 공동체로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들을 관찰하는 중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생겨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지나온 삶을 질그릇처럼 깨뜨리고
이제는 보배로운 그릇으로 거듭나는 사울이라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사울의 인생에
자신도 원하지 않았지만 끼어 들게된 사람 아나니아입니다.
아나니아는 어떤 사람이며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10절 [ 그 때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
그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만나
성령의 강한 빛 속에 주의 음성을 듣고
눈이 멀어져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던 그 때입니다.
그 때 주께서 환상 중에 아나니아를 불렀는데
여기서 아나니아를 제자라고 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란 말입니다.
그 당시 다메섹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많았기에
사울이 그들을 핍박하러 내려갔던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에 있는 많은 교인들의 지도자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울을 인도할 사람으로 선택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바울이 자신의 변화를 간증을 하면서 <2>
행22:12절 [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 ] 라고 합니다.
경건한 사람이란 주께 인정받는 자요,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도들에게 존경받는 신앙의 인물이란 말입니다.
우리들도 주의 제자로서 주님과 사람들로 인정을 받아야합니다.

특히 아나니아는 주의 계시를 받은 제자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에는 먼저 자연계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특별계시가 있는데 예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특별계시 중에는 객관적 특별계시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주관적 특별계시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혹 조명을 통해
그 말씀 속에서 또는 직접 조명을 통해 예수님을 만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나니아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깨닫습니다.
계시가 이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제자라면 항상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 속에서 주를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메섹 제자 아나니아에게 주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11절에 [ 직가라고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
직가는 곧은 거리로서 당시 다메섹의 중앙로라 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거기 유다의 집에 다소 사람 사울이 있는데 저가 기도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12절에
[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 고 합니다.
그러니 아나니아와 사울의 관계는
성령님의 개입으로 시작되며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예비된 만남입니다.
이런 예비된 만남은 사울이 바울이 되어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계속하여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예비된 만남을 주시하시기 바랍니다.

인생길에서 자기를 인도해 줄 좋은 멘토를 만나는 일은 복된 일입니다. <3>
삶의 방향을 바르게 가리켜주고, 해야 할 일을 제시해 주는
멘토를 통해 인생을 기름지게 가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 한번의 삶으로 영원이 좌우되는 인생을 낭비하지 아니하며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매우 훌륭한 멘토인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인격이 매우 고상했고 신앙과 삶이
멘토의 자질을 갖춘 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아나니아가 바울의 갈 길을 바르게 지도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갈 길을 자세하게 안내하고 그의 사명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바울이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소중한 삶을 살며 위대한 일을 하도록
사명을 일깨워준 사람은 다메섹에 제자 아나니아였습니다.
아나니아는 자기 자신이 위대한 사도는 될 수 없지마는
살인자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만드는데 멘토의 역활을 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바울의 앞길을 안내한 아나니아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멘토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 났던 기사입니다.
에콰도르 아마존 강 유역에
<세코아>라는 인디언 족속이 6백 명 가량 살고 있습니다.
그 추장의 아들이 <아먼 피아고 아지라>라는 서른여덟 살 난 사람인데,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평소 땅에다 나뭇가지로 그리기도 하고, 숯으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아마존 강 유역에
인류학자 <윌리엄 비코스>가 찾아 온 것입니다.
우연히 추장 아들의 그림을 본 윌리엄 비코스는 그에게 물감을 주었습니다. 이 청년은 처음에는 그게 뭔지 모르다가 물에 섞어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파란색으로 하늘을 그립니다. 바다를 그립니다.
38년을 사는 동안 난생 처음 물감이라는 것을 접하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얼마 전, 세계적으로 열리는 영국의 미술 경연대회에서
그의 그림이 최고의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찰스 황태자를 만나기 위해 옷은 입었지만
맨발로 영국에 갔다는 기사가 보도된 것입니다.
그는 인류학자 윌리엄 비코스를 만남으로 세계적인 미술가가 되었습니다.
<아지라>는 말합니다. <4>
[ 내 일생에 비코스를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
어떻습니까? 나는 누구를 만난 사실에 감사해본 적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만남은 우연이 없다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시해야할 말씀이 있는데
사울이 기도하는 중이었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성령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너무 강한 은혜를 받고 보니 눈이 캄캄해저 버렸습니다.
뭔가 자신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는데
뭐가 뭔지 눈이 어두워지니 분간을 할 수 없습니다.
사울은 다메섹의 체험 후에 삼일을 식음을 전폐하고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그럴 때 사울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체험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 조금 받은 것이 아니라
강한 성령의 역사에 부딪히고 나면 뭔가 분간도 안되고
마음이 이상해요. 갈등을 일으키며 가치관의 혼돈이 오는 것입니다.
일이 손에 안 잡힙니다. 밥을 먹은는지 안 먹은는지 몰라요.
그럴 때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면 분명한 성령의 조명이 나타납니다.
지금도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면 고민하게 됩니다.
전혀 생각지도 아니한 일들이 일어나니 고민하게 되지요
신학교 가라, 선교지로 가라, 너가 사명자다 하니 고민되지요.
그럴 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나타납니다.

사울이 예수님 만나 성령체험 후 기도하니
12절에 성령의 계시가 오는데
[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와서 안수하면 다시 보게 될 것이다 ] 라고 합니다.
우리도 은혜 받고 기도하다가 응답받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시에 대한 제자 아나니아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당시 사울은 포악한 기독교 핍박자였습니다.
아나니아도 그가 얼마나 지독한 유대주의자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13절에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미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입혔다고 소문난 사람입니다.
14절에 지금 사울이 대제사장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 결박할 권세를 가지고 다메섹으로 오고 있는 이유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나니아의 이러한 항변은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5>
사울에게 가라는 말씀은 어떻게 보면 잡혀서 죽으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나니아의 생각을 물으신 것이 아니라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15-16절에
[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요나는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스를 택했습니다.
하기 싫은 일입니다. 영양가 없는 일입니다.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해를 끼친 것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생각이 충돌하고 있을 때 우리의 본색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하나님은 나에게 그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때 순종하는 것이 진짜 순종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가라고 명령을 하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이유를 말씀합니다.

첫번째는 사울이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갈 택한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택한 그릇이란 표현은 도구 혹은 물건을 담는 용기를 말하는데
의역하자면 [ 주님의 이름을 운반하는 수레 ] 라는 말입니다.
사울은 주님의 이름을 수레에 싣고 온 세계로 나가는 자로
택함 받은 자임을 말합니다.
사울의 이전 사역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하고 죽이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주님의 이름을 운반하고 온 세상으로 나가는 수레가 된 것입니다.

두번째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사울이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앞으로 받게 될 고난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의하여 지정된 필연적인 사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의 사명은 복음증거와 고난 받음입니다.
그가 예수의 이름을 온 세상으로 운반하여 가는 복음전파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은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가 왜 이 두 가지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가 하면 <6>
주의 이름을 싣고 가는 수레는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일의 하나님의 가족 여러분 !
주의 일 하려고 하니 힘드십니까? 고생입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성경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성경의 가르침은
바로 선고난 후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나니아는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꾼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울을 만나자마자 [ 형제 사울아 ! ] 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약함이 없습니다.
사울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최초로 자신을 받아들여준 사람과 함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웬수 사울아!"가 아닙니다. 나의 가족이며 우리의 형제 사울입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하나님이 예비한 그릇이라고 하니
원수를 형제로 받아드린 것입니다.
그런 경우 있지요,
현재 하는 짓 꺼리 보면 술주정뱅이 개망나니인데
믿음 있는 아내가 남편 위해 기도하면
이 웬수 ! 가 아니고 김 장로야 ! 입니다. 아멘 !
사울을 두고 보면
사람은 이렇게 얼마든지 악해질 수도 있고 선해 질 수도 있습니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잔혹한 학살이 자행되는 가운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예이에 디므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961년 그는 나치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을 때
참모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했습니다.
재판관이 디므로에게 물었습니다.
[ 저 사람을 똑바로 보시오. 아이히만이 맞습니까? ]
한동안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디므로는 그만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에 깨어난 디므로에게 재판관이 물었습니다.
[ 왜 기절하셨습니까?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 견딜 수 없었습니까? ]
[ 아니오. ]
[ 그럼, 왜 쓰러졌습니까? ]
디므로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 제가 가만히 쳐다보니 저 사람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7>
수많은 동료들을 가스실로 보낸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나는 저 평범한 얼굴을 보면서
나 자신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 라고 합니다.
찬493장 3절에
[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
새 생명 얻은 자 영생을 맛보니 주님을 모신 맘 새 하늘이로다 ]
이런 은혜가 내게도 일어나고 나의 주변에도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는 사랑어린 손길로
사울에게 안수하고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그를 보니까
그가 사랑스러워 보이고 형제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눈먼 것을 고쳐 달라고,
그가 사역을 감당할 권능을 받도록 성령충만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한 것입니다.
그럴 때 사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 17절 하반절 [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
즉 아나니아의 안수로 말미암아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성령충만은 주의 이름을 나르는 수레가 되는데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사울이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나? 하면
그 다음 나타나는 현상으로 알 수 있습니다.
2) 18절에 사울이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았을 때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졌고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성령충만 받으면 눈이 밝아집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만이 눈에 비늘같은 것이 떨어져 나갑니다.
눈에 비늘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지 아니하니
예수 믿고도 보지 못하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합니다.
오늘 내일의 가족 여러분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3일 동안 볼 수만 있다면>이란 글에서 헬렌 켈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 만약 내가 삼일 동안 볼 수 있다면 ]
첫째 날에 나를 가르쳐 주신 설리반 선생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꽃, 나무, 풀,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에 새벽 일찍 일어나 먼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이 되면 영롱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에 이른 아침 큰길로 나가 <8>
부지런히 출근하는 활기찬 사람들의 발걸음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에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때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에 진열돼 있는
상품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삼일 동안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헬렌 켈러가 보고 싶어 한 것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들이었습니다.
두 눈을 뜨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너무 평범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도 이런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나의 눈에 비늘이 떨어져 나가게 하사
1) 우리가 너무 자주 습관처험 주여, 주여 라고 부르는
나의 주님을 보고 싶습니다.
2) 나를 부르신 주님께서 내게 주어진 비전을 보고 싶습니다.
3) 내가 달려가야 할 목표가 무엇인지 보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도 성령 받아
우리의 눈에 비늘이 떨어져 나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바라보고
목표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울에게 독특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니 사울에게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고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무엇을 받았습니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성령충만 먼저 받고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행10장에 나오는 고넬료는 성령을 받고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1) 성령을 받았더라도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성령 받았다 할지라도
교회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요사이 코메디 그 까이것 대충 대충 이란 말이 유행을 합니까?
코믹한 말이라고 아무 말이나 다 뜨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를 대변해 주는 페러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법도를 따라 세례를 받고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점검하며 매듭짓고 넘어가기 위해서입니다.

2) 물세례와 성령충만은 필수적이 되어야 합니다. <9>
어떤 교인은 물세례는 받았지마는 성령충만 받지 못한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나 봉사에 힘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도무지 변하지를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과거와 달라진 성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성령을 체험하고 불을 통과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또한 다 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음식을 먹고 강건해 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말씀과 기도 이외의 것들,
즉 먹는 것이나 입는 것이나 건강한 삶을 영위해 나가는 것 중요한 일입니다. 흔히 우리는 먹고 마시는 일은 영적인 것이 아니고
기도하고 말씀 듣는 일만 거룩하고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극찬되고 마르다는 늘 문제꺼리입니다.
육신이 연약해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건강도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요3서2절 [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 ]
하나님은 로뎀나무 아래 지쳐있는 엘리야에게
물과 떡을 가져다주시며 먹고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함부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의 구분선을 긋는 것만큼
우리를 율법적으로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사울이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성령충만하여
눈에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 다시 보게 되고
음식을 먹고 강건하게 되니 무엇을 합니까?

20절에 보니 [ 각 회당에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
즉 전도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받고 나면 제일 먼저 삶에서 달라지는 것이
예수 이야기 하게 되고 전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변화되는데 가장 놀라운 변화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를 대수롭잖게 여기던 사람이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1절 보세요
[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던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10>
바로 사울이 변화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내가 오늘 변화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내가 예수를 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예친 소식지 간증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결론 >
사울과 아나니아의 만남
바로 하나님의 예비된 만남입니다.
우리도 하나니의 예비된 만남을 귀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너를 만남이 일생에 복된 만남이 되고
너가 나를 만남이 일생에 복된 만남으로 가꾸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만약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말씀에 불순종했더라면
아나니아와 사울의 만남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울과 아나니아의 순종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약함이 없는 부분입니다.
아브라함이 믿고 순종했을 때 이삭을 주셨고
그를 통해서 믿음의 후손들을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나니아의 순종을 통해서
사울로 하여금 이방인을 위한 그 위대한 행보의 서곡을 장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름도 없었던 제자 아나니아! 그의 순종을 귀히 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비록 이 시대에
아무런 영향력을 줄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의 순종을 귀히 보십니다.
순종을 통해 예비된 만남이 이뤄지고
변화를 가져오는 삶이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5-22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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