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최선의 자리 (눅 10:38-42)

  • 잡초 잡초
  • 180
  • 0

첨부 1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느낌을 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배경이나 그 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그들이 나누는 대화마저도 우리와 닮은 점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 이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먼저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친근한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가족 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마치 우리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작은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마을의 이름은 베다니였습니다. 이 마을에 한 집이 있었고 주님은 이 집을 찾아가셨습니다. 이 집에는 삼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그 이름은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였습니다. 여기 세 사람은 다같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러 차례 이 가정을 방문했고 이 가정에서도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나사로의 부활 사건입니다.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다른 사람이 내 집에 들어오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자기 집에 손님을 청하였다가 복을 받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 집에도 예수님을 초청하였다가 물이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수냄 여인은 엘리사를 자기 집에 모셨다가 아들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했다가 하나님의 천사들을 대접했습니다. 부자 나사로,

마르다가 분주하게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음식을 만들고 있는 동안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아래 조용히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마르다가 보고는 불평을 내 놓습니다. 아마도 마르다는 동생에 대해서 화가 났을 것입니다. 지금 나는 예수님 대접을 하려고 정신 없이 바쁜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을 독차지하고 말씀을 듣고 있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예수님께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말씀에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지금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마리아를 붙잡고 있으니 오히려 예수님을 향해서 원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주님의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나 혼자 충성하고 있다는 정서입니다. 마르다가 말하기를 자기 혼자 수고하고 있는데 두 사람은 지금 무얼하고 있느냐는 원망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서는 일반적으로 잘 나타나는 품성입니다. 사람은 내가 하는 일보다 남이 하는 일에 관심이 더 많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남의 손에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정서 가운데는 타인에 대한 의식이 지배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잘 충성을 하다가도 남을 보고는 시험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가지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헌신하는 삶을 살다가도 타인을 보면 내가 손해본다는 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충성한다는 생각 때문에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충성하는 사람이 사명에 충실하면 내가 손해 본다는 생각을 이길 수 있지만 타인을 보면 그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 충성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면 가까운 형제도 이웃에게도 적대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유대 민족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우리 민족이나 유대 민족이나 피해의식이 강한 민족이 세계적으로 없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에 57개 부족 가운데 숫자적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민족이 조선족이라고 합니다. 문화대혁명 때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라니까 그처럼 악착같이 서로 고발해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민족이 조선민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민족은 그래서 책을 쓰더라도 남을 비판하고 남을 내려 부수면 그것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 것입니다. 방송도 비판하고 욕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드라마나 토크쇼 같은 것을 보면 서로 싸우도록 만들고 나오는 게스트는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교회도 교파가 많고 교단이 많은 것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나와 같지 않으면 무조건 판단하고 배척하는 것이 우리의 기질 속에 숨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지막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으로부터 자기가 감당해야 할 사명에 듣고 주님 곁에 있었던 요한을 보고 저 요한은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어 본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요한에 대해 관심 가지지 말고 너에게 준 사명에 대해서 충실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 내가 하는 일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아무도 도와 주지 않아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그 일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과 상관없이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충성을 내 기준에 맞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자기가 서있는 곳이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교회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그것이 시험이 되고 원망이 됩니다. 마르다처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는가 하면 소극적이고 조용하며 사색적이면서도 훌륭한 신앙인이 있습니다.

마르다는 분명히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마리아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왜 원망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갇히면 남이 안보입니다. 자신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만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충성할 때에 조심해야될 것은 마음의 분주함입니다. 마르다는 주님 오시는 일에 너무 마음을 분주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분주했지만 그 분주함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 가까이 가지 못한 것입니다. 충성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마음이 들떠 있으면 충성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항상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보면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에는 너무도 치밀하게 순종했습니다. 너무도 구체적인 모습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을 함락 한 이후에는 그들의 마음이 들떠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성급하게 아이성을 공격했습니다. 여기에서 실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에 보면 말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조급하므로 서로 대적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라고 이름을 두 번에 걸쳐 불렀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름을 두 번씩 부를 때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시몬아, 시몬아" "사울아 사울아" 이렇게 이름을 두 번씩 부를 때를 보면 주님의 안타까움이 그기에 있습니다. 그냥 꾸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선택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마리아는 좋은 것을 택하였으니 했습니다. 충성에 있어서 열심보다 중요한 것은 선택입니다. 마르다는 대접하는 것을 선택했고 마리아는 말씀듣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 보다도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 충성에 있어서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은 주님이 그것을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벧에돔의 집과 아비나답의 집은 다같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그러나 아비나답의 집은 언약궤가 자기 집을 떠나는 순간 그 맏아들 웃사가 죽었고 오벧에돔의 집은 하나님이 그 가정에 놀라운 복을 주신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지 기준으로 충성하면 그것이 자신에 복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충성은 항상 순종의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선택을 통해서 그 믿음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롯,  (조병우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