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적침체를 극복하는 길 (왕상 19:1-8)

  • 잡초 잡초
  • 269
  • 0

첨부 1


전쟁을 치루는 군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무기는 공격용 무기일 것입니다. 적군이 쏘는 총이나 적군이 쏘는 대포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무서운 것은 적군이 감추어 놓은 지뢰와 같은 수비용 무기일 것입니다. 공격용 무기는 전쟁이 끝이 나면 두려운 것이 아니지만 수비용 무기는 전쟁이 끝이 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위협이 되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에도 그렇습니다. 핍박과 위험과 같은 외적 조건도 신앙인에게는 위협이지마는 내면적 두려움과 심리적으로 그 자신이 연약해지는 것이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건강하게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외적으로 건강에 해가 되는 환경도 위협이 되지마는 그것보다는 사람의 체질이 연약한 것이 더 큰 위협이 될 것입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마는 그 음식을 잘 소화시킬 수 있는 건강함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그렇습니다. 엘리야를 죽이려는 위협 앞에서도 엘리야는 담대하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갈멜산에서 이기고 기손 강에서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 왔을 때에 도망자가 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죽기를 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영적인 위기는 외적 위협이 아니라 내적 두려움임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함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고 했습니다.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호모이오파데스"로 이 말은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가지고 우리와 같이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두 가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나도 연약할 수 있다는 생각과 타인의 연약에 대해서 이해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은 강함에서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약함에서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결코 연약함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연약함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것은 연약함이 주는 피해를 극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은 이해할 수는 있어도 연약함에 붙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할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우리의 언어가 연약함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나님께 죽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엘리야는 무엇보다 언어가 연약함에 빠졌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고 했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그 언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습니다. 때문에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건강해 집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어두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 언어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습니다. 우리가 약하다고 말하면 그 말은 우리의 감정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가 밉다고 말하면 그 말이 우리의 감정이 됩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말이 우리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말은 감정을 만들고 감정은 우리의 행동을 만들게 됩니다. 성도들이 담대한 신앙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그 언어가 믿음 안에서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믿음의 힘을 좌우하게 됩니다. 언어가 무너지면 그 믿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는 큰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계집 아이 앞에서 그 언어가 무너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의 현 주소였습니다. (삼상 17: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했습니다.

(단 3:17-18)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했습니다. 성도에게는 언어를 지키는 것이 바로 믿음을 지키는 것이며 목숨을 지키지 못해도 언어는 지키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를 알려면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외로워도 너무 외롭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 말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렵더라도 너무 어렵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 어려움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광야에서 다 죽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바로 언어입니다. 축복하기를 좋아하면 축복이 따라옵니다. 저주하기를 좋아하면 저주가 따라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복을 빌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복을 비는 사람들에게 복이 온다는 원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입으로 말이 나오기 전에는 우리에게 책임이 없지만 입으로 나온 말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2.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고 했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연약해지는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데 있습니다. 마귀가 인생 앞에 쳐 놓은 그물이 바로 비교라는 그물입니다. 사람은 비교라는 그물에 걸리게 되면 문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험을 받고 있을 때를 보면 한 가지 분명한 상황이 그 사람의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누군가와 비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교해서 누가 잘못하고 누가 잘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비교하는 사람들은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다는 것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비교 자체가 더 큰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어떤 사람과도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영적 침체는 하나님을 보아야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사명이 다르다는 사실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비교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비교하므로 사람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위치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약점과 장점을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약점과 장점은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약점도 장점이 되고 하나님이 사용하지 않으시면 장점도 약점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나이가 많아서 하나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약점이 아니라 장점이었습니다. 압살롬은 머리털이 아름다운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장점이 아니라 그를 죽이는 약점이 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인생에게 쉼을 통해서 침체를 극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기에 엘리야가 나무아래 누워 잠이 들었다고 말씀하고 있고 그 때 천사가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주면서 일어나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어루만지며 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일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했습니다. 인생에게 쉼은 침체를 극복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쉼을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쉼은 인생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수고에 대한 보상이요 다른 하나는 앞으로 사명을 감당할 힘을 얻는 시간입니다. 엘리야는 쉼을 통해서 지금까지 사역을 통해서 지친 몸이 쉬는 시간이었고 앞으로 그가 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힘을 얻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에 걸친 하늘 양식을 공급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쉼과 미래에 대한 힘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경건한 쉼이 필요합니다. 하늘 양식으로 누리는 쉼이 필요합니다. 이 쉼이 없으면 인생은 자기를 지킬 수 없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쉼이라고 말할 때에 육신의 욕망을 따라 지내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한 삶은 쉼이 충전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방전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쉼은 하늘 양식을 공급받는 시간입니다. 성도에게 쉼은 새로운 사명을 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성도에게 쉼은 하나님이 어루만져 주시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쉼은 거룩한 시간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 쉼의 시간을 통해서 하늘 양식을 먹었습니다.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루만져 주시는 은혜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엘리야는 쉼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사명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러 새로운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영적 침체를 극복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세계를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