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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풍랑 속에서의 따름” (마 8: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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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8:1~9:35까지는 예수님의 선교적 활동이 10개의 표적을 행하신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마태가 10개의 표적으로 주님의 선교활동을 기록한 것은 아마 구약의 모세가 애굽에서 베푼 10개의 기적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하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를 대신하는 하나님의 종이심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10개의 표적 중에서 처음 3개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고질적인 병이었던, 문둥병과 중풍, 그리고 열병을 고쳐주신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병을 고쳐주신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이러한 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 즉 문둥병자와 로마 백부장의 종,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인 한 여인이라는 그 당시 소외 계층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예수님은 병 고침을 통해서 보여주셨다는데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이 처음 나타난 3개의 표적 기사의 커다란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부터 보고자 하는 4번째 표적은 그 다음의 5, 6번째의 표적과 더불어 새로운 주제에 따른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새로운 주제는 “제자도”(Discipleship)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초자연적인 능력과 모습으로 나타나는 예수님의 이러한 표적들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제자도란 이러한 능력과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제자도와 관련하여 오늘은 4번째 표적인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이적”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그저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을 행함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과시하고자 하는 의미로 행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다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18절의 말씀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는 것을 보시고 바다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셨습니다(18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추앙받는 분위기를 마다하시고, 이들을 피해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고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19절의 사건이 나타납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어떤 서기관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당신을 좇아가겠으니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을 보십시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배에 오름으로 예수님을 좇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대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추앙받을 수 있는 분위기를 뒤로 하고 예수님의 명령을 좇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두 구절(19, 23절)에서 “좇았다” 즉, “따르는 모습”에 대한 모습이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늘 본문의 풍랑을 잠잠케 하신 사건은 이 앞에서 언급되는 예수님을 좇는 일과 같은 맥락으로 묶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을 따른다는, 좇는다는 모습으로 이 두 사건을 같이 묶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19~22절의 말씀부터 생각해 보십시다. 두 사람이 예수님을 좇겠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서기관입니다.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병 고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여 예수님에게 깊은 매력을 느꼈나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고 따름을 자청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말 자체가 오히려 그에게는 걸림돌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의미심장한 대답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헌신한 사람들은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배척당할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하는 것은 그저 따르겠다는 순진한 마음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것은 이 경우에서 볼 때 부르시는 분이 없이 그저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자기만족을 위한 모습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부르지도 않았는데 따르겠다고 나선 경우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잘못되었을까요? 이런 경우,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따르는 일을 중지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왜요? 따른다고 하는 사실의 주체가 부르신 분에게 있지 아니하고,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 때 사도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떠났던 마가의 경우를 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제 1차 전도여행에 참여한 마가가 아무런 이유 없이 중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물론 어떤 이유가 있긴 했겠으나 사도행전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마가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 때문인 듯싶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서 결국은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 2차 전도여행을 준비하면서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마가 때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였고, 바울은 지난 1차 전도여행의 일을 거울삼아  마가를 데리고 가면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가의 중도 포기로 인하여, 제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바울과 바나바가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나서 결국은 헤어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행 15:36~41). 이 사건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에 있어서 소명 즉, 부르심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러면 이 소명 즉 부르심은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합인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에 우리가 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의주장이나 예수님의 방법에 우리가 동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깊었을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합이 없는 가운데 “좇겠나이다”라고 스스로 말해버림으로써 성급한 자세를 보여 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는 자신의 의지나 결단보다 먼저 예수님과의 인격적 결합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서기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는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한 일을 포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비결이 있음을 암시 받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두 번째 사람은 제자 중 하나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누군지는 모릅니다만 이미 예수를 따르고 있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 10장에 가서야 최종적으로 확정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제자는 결국 예수님의 제자의 한 사람의 자리에 들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익명의 제자는 예수를 따르는 가운데 부친이 사망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부모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유대인 사회에서 최고의 의무 중 하나입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모세를 통해 내려오는 율법이 명한 수많은 의무보다도 선행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 제자는 예수님께 부모의 장례를 치를 때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유보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 장례 기간 또한 그렇게 길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 제자가 요청한 부친의 장례를 거절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너무 매정하게 보이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함으로 이에 대한 이유를 짐작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두 번째 사람이 예수님을 부른 모습에서 발견합니다. 이 제자는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앞의 서기관이 예수님을 “선생님이여”라고 부른 것과는 대조가 됩니다.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과의 깊은 인격적 결합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님”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러한 인격적 결합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여”라는 호칭에는 “나는 당신에게 속한 자”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제자에게 예수님은 더욱 엄격한 제자도를 원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꼭 이와 같은 현실에서의 말씀은 아니겠습니다만, 히브리서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 6:4~6절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르고자 한 이 두 번째 사람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신 이 말씀 역시 앞의 사람에게 하신 말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의 말씀과 더불어 모두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서 고생하는 것과 추방당하기도 하며, 따돌림까지도 받을 수 있음을 각오하라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도 부친의 장사를 지내러 갔는지, 아니면 예수를 좇았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아마 부친의 장사를 지내러 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대답 자체에 이 사람이 흔들리고 있음을 우리는 암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한편으로는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실제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는 주저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과정에 닥친 현실적인 당황함으로 인해 그 따름을 지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대한 해답이 바로 풍랑을 잔잔케 하신 주님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즉, 이다음에 나오는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이 바로 이와 같은 경우에 있어서의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을 보십시다.

이 풍랑을 잔잔케 하신 사건은 이렇게 주님을 따르다가 부친상을 당하는 경우와 같은 모습이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23절에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다”고 기록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며 받드는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명하신대로 배에 올라타는 제자들의 모습을 말씀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겠노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노라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풍랑이 치기 시작하면서 배에 물이 들어오고, 그래서 배가 가라앉을 위기가 닥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이 마음먹고 신앙생활을 잘 해 보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어려움이 닥치는 우리들의 현실과 아주 비슷합니다. 특히 이러한 어려움은 배 안에 갇힌 제자들이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어려움과도 같은 그러한 어려움인 경우에는 더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서도 주님은 주무십니다. 이는 태평스럽게 주무시는 주님의 여유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님의 침묵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러한 삶의 어려운 현실에서, 그리고 나 혼자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와 마찬가지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의 죽어 가는 소리에 깨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는,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지셨을 때, 바람과 바다가 잔잔케 되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이상히 여기면서 “이는 어떤 사람이길래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면서 놀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있어서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순종입니다. 우리가 따르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람과 파도까지도 잔잔케 하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 그리고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는데 왜 우리는 순종하지 못하는가를 염두에 두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코자 하는 자세 - 이 두 가지 모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 필수적이며 기본적인 자세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따르고자 했던 서기관과 또 예수를 따르다가 부친의 장사지내는 문제로 따름을 주저하며 포기했던 한 제자의 모습에는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믿음과 순종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마태는 조심스레 우리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믿고 따르고자 하는 예수께서 이렇게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분이심을 믿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렇다면 여러분의 현실의 삶에 주어지는 일과 예수를 따라가는 일과의 갈등이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다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고대 교회의 교부들은 바로 이러한 풍랑가운데 있는 제자들이 탄 작은 배는 곧 교회의 현실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제자들은 박해와 배척과 가난의 풍랑으로 그 신앙적인 면에서 시달리고 싸우고 있는 교회를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밀어닥치는 파도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오직 주님께 호소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25절).

이러한 제자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데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은 마태복음에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만 사용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은 신앙이 있기는 하나 약하고 불충분한 경우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믿음과 의심이 뒤섞이면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가로막게 되는 것을 염려하셔서 하시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제자들이 놀라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여기에 대한 대답은 물론 “메시야”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부여받았고, 따라서 이적들을 행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필요한 고백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을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더욱 필요한 듯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우리들의 모습, 그리고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바로 이렇게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가 풍랑을 만난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시작하는 제자직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결국 예수님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정해야만 하며, 예수님을 통해서 개인적인 차원과 교회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혼돈을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풍랑 속에서도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지니고 그 분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믿음과 순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물 붓듯이 부어주신 날이 바로 오늘 성령강림주일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임하여 주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데 있어서 믿음과 순종으로 조금도 부족함 없이 인도하여 주실 줄 압니다. 그리하여 더욱 강한 믿음과 온전한 순종으로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다양한 현실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과 관심으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의 삶의 풍랑 속에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그 크신 은혜와 놀라운 능력으로 저희들을 인도하여 주셔서, 현실의 풍랑 속에서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들로 하여금 당신을 따르도록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시여!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는데,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주님을 따르는 현실 속에서 외롭고 힘들 때마다 이 말씀을 생각함으로 꿋꿋하게 이겨나갈 수 있도록 당신을 늘 생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의 하나님이시여!
저희들의 따름의 흔적을 늘 살펴 주셔서,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당신을 따르는 저희들에게 늘 말씀으로 붙잡아 주셔서 주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도록 힘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따라가는 현실 속에서 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심으로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도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노강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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