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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아비들의 자녀교육 (엡 6:1-4) -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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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정에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몹시 거친 여자로서 세 번째 결혼을 했는데 두 번째 남편은 마누라에게 매 맞기가 싫어서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생활에 바빠서 아이를 잘 돌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을 전혀 못 받고 자랐습니다. 13살 때에 학교의 담임선생님은 ‘이 소년은 사랑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아이와 같다’는 말을 학생기록부에 적어 놓았습니다. 
소년시절 여학생들과는 사귀지도 못하고 남학생과는 늘 싸움질만 했습니다. 아이큐가 상당히 높았지마는 성적은 낙제점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해병대에 들어갔으나 거기서도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절망에 빠진 청년은 외국에 가서 살며 사생아인 어느 여자를 만나 미국으로 돌아와서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도 청년이 너무 난폭하고 험악했기 때문에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청년은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으나 청년의 고약한 성격을 너무나 잘 아는 여자는 끝내  함께 살 것을 거절했습니다. 오기에 찬 청년은 돈 벌 결심을 하고 이튿날부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 가지를 않았습니다.
1963년 11월 22일 숨겨두었던 총을 들고 평화스럽게 행진하던 케네디 대통령을 쏘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오스왈드의 비극적인 24년간의 생애였습니다. 한 가정의 가정교육이 잘 못되었을 때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나게 되었을 때에 이런 비극을 불러 왔습니다.

한 개인 뿐만 아니라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일들 이었습니다. 찌그러진 둥지의 알은 찌그러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둥지가 찌그러지면 그 둥지에 새가 알을 낳아도 알이 찌그러지게 만들어져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정이 온전하고 부모가 온전해야 자녀가 온전하게 자랄 수가 있는 것입니다. 

1.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 해도 될 일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회사에 안 나가면 그 회사가 망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안 살면 다른 사람들이 살기 힘들다고 그 지역에서 다 도망가겠습니까?
내가 하는 일들 내가 안 해도 회사는 잘 돌아가고 사회는 아무 지장 없이 잘 돌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없이는 안 되는 일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교육입니다. 내가 낳은 자녀는 내가 아니고는 그만큼 키울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농사 가운데 가장 힘든 농사가 자식농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농사를 짓기 위해서 농부는 부지런히 농작물이 자라는 장소로 갑니다. 그리고 돌봅니다. 관심가집니다. 거름 줍니다. 김을 매줍니다. 그런 보살핌과 관심을 통해서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우리 자녀들도 농사짓듯이 해도 잘 자라기가 힘든 것이 자녀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는 많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영혼들이 있지만 한 남자에게 여러 여자를, 한 여자에게 여러 남자를 붙여주어서 가정을 이루어 살게 하지 아니하고 한 남자에 한 여자를 통하여서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은 경건(敬虔)한 자녀를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한 가정에 어머니가 여러 명 있거나 아버지가 여러 명 있다고 해 보세요.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의 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신 이유는 경건한 자녀를 얻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녀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녀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경건한 자녀를 양육하라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우리 가정마다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에 자라고 있는 자녀들은 내가 낳았으니 내 자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물론 내 자녀입니다. 그러나 내 자녀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나를 거쳐서 태어났지만 나로부터 온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라헬이 대들지 않습니까?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하니까 야곱이 “무슨 말을 하느냐? 내가 하나님이관대 너로 하여금 자식 낳게 하겠느냐?”고 말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를 거쳐서 자식이 태어나지만 나로부터 온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나와 함께 자식이 생활하고 있지만 나에게 속한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기를 ‘손님대접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자녀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고 양육하고 돌보아 주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녀는 잠시 우리 집에 머물다가 자기네 길을 가야 할 손님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를 극진히 보살펴 줄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내 자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더 잘 키워야 합니다.
내 소유라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더 잘 키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에 대통령이 외국에 순방을 떠나면서 1년 동안 나에게 자녀를 맡기고 갔다고 한다면 대통령의 자녀를 키우면서 얼마나 신경을 쓰겠습니까? 얼마나 잘 키우려고 노력하겠습니까?
대통령보다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 가정에 자녀들을 맡겨주시고 잘 키워주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녀는 내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를 내가 키운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식을 내 소유라고 생각하면 자식에게 빠져듭니다. 자식이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결혼의 원리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가정을 이루어서 하나가 되는데 그 부모를 떠나서 하나가 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들이 자라면 가정을 이루어서 부모를 떠납니다.
분가(分家)를 한다는 말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떠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만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는데 자식이 내 자식이라고 내 소유라고 생각한다면 자식을 떠나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치마폭이 싸서 있어 보세요. 그 가정은 건강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정이 보낸 자녀는 내 자식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자식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자칫하면 독재형의 부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내 자식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 자녀에게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내 것이니까. 그래서 비정한 부모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를 우리 집에 위탁해서 키우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더 잘 키우려고, 부모의 역할을 잘 하려고 노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이 세상에는 많은 부모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보다도 더 나은 부모가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보다도 더 성품이 좋고, 나보다도 더 사랑하고, 나보다도 더 많이 배우고, 나보다도 더 많이 가지고, 나보다도 더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 부모들이 더 많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자녀가 내게서 태어나지 아니하고 그런 가정에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내가 사랑하고, 내가 교육시키고, 내가 보살피는 것보다도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내게 맡겨 주셨다, 그러니까 내가 정말 잘 키워야지, 하는 책임감이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것이면 내 마음대로 키워도 돼요.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를 내게 맡겨주셨는데 다른 사람의 자녀가 되었으면 더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을 부모로 만나서 내가 이것 밖에 사랑해줄 수 없고, 이것 밖에 교육시키지 못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정말 자녀 잘 키우려고 노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품 좋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높은 지위를 가진 부모라야만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 잘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녀를 키우고,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원리를 따라서 자녀를 사랑하면 아무리 못 배운 사람도 일등 자녀로 키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최고의 자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모든 조건이 다 좋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원리대로 키우지 못하면 불행한 자녀로 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환경, 배운 것, 가진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 다른 가정에 태어난 자녀보다도 더 행복하게, 더 멋지게 키워야 되겠다, 더 잘 키워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자녀로 키워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자녀를 보세요. 그럴 때 책임감있는 부모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잘 성장하여서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허락하여 주셔서 내가 이렇게 잘 교육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니 참 감사합니다.”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자녀들 양육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녀교육을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먼저 <아비들아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동양의 유교문화권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안 되지요? 우리나라 어버이들에게는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흔히 듣지 않습니까? 선생님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이나 웃어른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은 듣는데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그런 말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에는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 말라>고 번역하고 헬라어 원문에는 <너희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른을 화나게 하지 말라고 해야 말이 맞는데 성경은 어른이 아이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루지아나 의과대학의 코딩톤 박사는 다섯 살에서 열두 살의 아동을 조사하면서 아이들의 화와 우울증이 친구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부모와 가족과의 관계에서 훨씬 더 많이 생긴다는 사실을 밝혀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 자녀들이 화가 나는가, 부모가 자기의 말이나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주지 않을 때,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구타할 때, 또한 부모가 엉뚱한 과정이나 거짓말을 할 때, 부모가 자기를 힘이나 권위로 다스리려고 윽박지를 때, 특별히 아이들은 끊임없이 비난받고 책망 받을 때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내 가정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화나게 하지 않고 기분 좋게 키워나갈 수 있는가, 날마다 격려하고, 날마다 칭찬하고, 날마다 축복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자녀가 복되게 경건하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녀로 잘 성장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19세기 초 미국의 벤쟈민 웨스트라는 세계적인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하루는 부모님이 외출을 했습니다. 혼자 심심하니까 그림물감을 다 풀어서 자기의 누이동생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방 안이 물감이 튀어서 얼마나 지저분하게 되었겠습니까? 잠시 뒤에 부모님이 외출에서 돌아 왔습니다. 집에 들어 와 보니까 방이 엉망입니다. 벤쟈민은 부모님께서 나를 아주 호되게 야단치겠구나 생각했는데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벤쟈민을 칭찬했습니다.
“야, 우리 벤쟈민이 그림을 엄청나게 잘 그렸네. 보니까 딱 너의 누이동생이구나.”하면서 칭찬해 줍니다. 끌어안아 줍니다.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격려하고 입 맞춰 줍니다. 벤쟈민은 “내가 세계적인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때 부모님의 격려와 입맞춤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부족하고 못났다고 자꾸 구박하고 나무라지 말고 잘 하는 점을 칭찬하고 격려해 보십시다. 나무랄 것 있으면 지금 나무라지 말고 인내하면서 넘어가고 다음에 칭찬할 일이 있으면 그것을 집중적으로 칭찬하고 나무랄 것도 칭찬으로 바꾸어서 자녀를 격려하는 것으로 연구를 해 보십시다.
그러면 그대로 되어 집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이 비난에서 변하는 것이 아니고 격려에서 변해집니다. 부족해도 칭찬해 주고 격려하고 축복해 주면 그대로 되어 집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라고 합니다.
자녀들이 나를 화나게 해도 자녀들을 비난하고 책망해서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 말고 칭찬꺼리를 찾아서 격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책이 있지 않습니까? 칭찬에 자녀들의 잠재력이 개발(開發)되고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더 인격적으로 키워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어떤 경우에도 감정적으로 나무라지 않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축복하려고 연구해서 자녀들의 능력이 백분 발휘되고 삶의 습관이 바꾸어지고 자존감(自尊感)이 높아져서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녀를 양육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몇주 전에 숙제를 내 드렸는데 하고 있습니까? 하루에 한 번씩은 가족들과 허깅(hugging)하면서 격려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축복하고 기도해 주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지난 주간에는 부모님 찾아뵙고 인사하고 효도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해 보셨습니까?
오늘부터 또 하나의 숙제들 더 드리겠습니다. 매일 하루 한 번씩 자녀들을 유심히 보았다가 칭찬해 주고 격려하고 축복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주의 말씀으로 훈련시켜야 합니다.

다음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는데 교양은 다른 번역에는 <훈련> 혹은 <교훈>, <징계>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훈계는 말을 통한 훈련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양은 아는 것을 계속 훈련시켜서 몸에 배게 하는 것이 교양으로 양육하는 것이고, 훈계는 말을 통한 교육입니다.
주의 교양으로 양육하라는 말은 훈련으로 양육하라는 말입니다. 자녀를 가르칠 때 내 경험이나 내 방법이 아니고 주의 교양으로 훈련을 통해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학문만 가르치지 말고 주의 교양으로 신앙훈련을 시키라는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신앙의 가치를 몰라서 세상적인 교육에는 최선을 다 하지만 신앙교육은 부차적(副次的)으로 나이가 들어서 차차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큰 잘못입니다. 잘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정말 후회하게 될 것이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원망들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교육도 잘 시켜야 됩니다. 삶을 살아가는 도구가 교육이기 때문에, 삶을 살아가는 도구가 직장이기 때문에 그 자녀에게 맞는 교육과 직업을 잘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됩니다. 좋은 도구를 가지고 일하면 그만큼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누구나가 다 1등이고, 누구나가 다 판검사, 누구나가 다 의사, 대통령, 이런 식으로 부모들은 자녀의 재능이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전부 1등 하라는 것입니다. 전부 판검사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가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서 교육시키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자녀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달란트를 오래 보아 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부모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부모는 그것을 빨리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청춘표류’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오오이 정육점 도쿄 책임자 모리야스 쓰네요시는 ‘고기의 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를 잡아서 살을 부위 별로 나누는 솜씨가 보통 사람의 세 배에서 많게는 여덟 배 빠르게 일을 해 내는 사람입니다.
그는 중학교를 마쳤을 때 글도 몰랐습니다. 구구단을 외우는데도 5단까지를 겨우 외울 정도였습니다. 지진아(遲進兒)도 못되는 그는 당연히 진학을 못하고 정육점에 들어가 2년간 하루 열 시간 이상 냉동육과 씨름하며 기술을 익혔습니다.
손님을 상대하고 계산을 하느라고 구구단과 문자를 외우고 익힌 것도 이때였습니다. 하지만 떠돌이 기술자가 되어 도박과 싸움으로 나날을 지새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를 알아주는 상사를 만나 '한평생 정육점에서 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뒤로 그의 인생은 확 바뀌었습니다. 자기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 쇠고기를 연구합니다.  생산과 유통을 연구합니다. 요리까지 철저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연 10억 엔의 매출을 올리는 매장의 책임자가 되었고 '쇠고기'란 전문서적을 낸 저술가까지 되었습니다. 지진아, 양아치였던 과거의 그를 떠올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기의 일거리를 바로 알았기에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녀에게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 그만이 가지고 있는 달란트를 하나님께서 다 주어서 우리 가정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을 하게 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교육적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달란트를 다 주었는데 그것을 찾아서 교육시켜서 계발(啓發)하게 되면 자기 달란트니까 아주 쉽게 합니다. 아주 재미있게 합니다. 아주 능률적으로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행복하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좋은 것 하려하지 말고 모두가 1등 시키려고 하지 말고 자녀의 능력과 달란트를 잘 찾아서 그에 맞는 교육을 하게 되면 그게 자녀의 행복이요, 하나님의 뜻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신앙의 사람으로 훈련시켜야 합니다.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말씀교육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위싱톤이나 링컨 같은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된 비결이 뭡니까? 그것은 그 부모들이 물려주었던 성경책, 그리고 성경교육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학교에 가서도 오전에는 토라(Torah)를 공부합니다. 토라는 율법서인데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민수기 이 다섯 권의 책을 토라라고 하는데 오전에는 이것만 공부합니다. 
점심 먹고 난 다음 오후에는 국어, 영어, 수학 등 일반과목을 공부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니까 세계에서 가장 앞서 가는 민족이요, 그들이 세운 대학 가운데 히브리대학은 세계 10위 권 안에 들어가는 대학입니다.
우리는 밤낮으로 공부해도 세계 100위 권에도 못 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97%가 성경을 삶의 지침서(指針書)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우리 삶에 배어야 됩니다. 일어나면 말씀 읽고, 성경을 늘 손에서 놓지 않는 습관이 삶에 배어야 됩니다.
성경을 읽으라고 한다고 해서 읽어집니까? 훈련을 시켜야 됩니다. 몸에 배일 수 있도록 자꾸 격려하고 독려하고, 성경 읽었느냐, 읽으면 뭐 사 줄게, 그렇게 해서라도, 동기를 유발시켜서라도 말씀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자녀로 훈련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훈련은 모르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배운 것, 아는 것을 몸에 배이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기도훈련도 시켜야 되겠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은 적어도 하루 15분 이상, 대학생들은 30분, 청년 이상은 하루 한 시간 씩 기도훈련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훈련해야 되겠습니다.
그것도 기도하라고 해서 그렇게 됩니까? 부모가 같이 기도하고 세미나 같은 데도 자꾸 보내서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만 훈련이 되지 않겠습니까?
성령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시켜야 되겠습니다.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훈련해야 되겠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50, 60이 되어서 성령체험 하려고 해 보세요.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마음이 굳어서 변화가 잘 안 되어져요. 
어릴 때 민감할 때 교회학교, 세미나, 수련회에 보내서 어릴 때부터 은사 받고 성령체험하고 성령님과 일생동안 동행하는 삶을 살게 하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몰라요. 이런 훈련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되겠습니다. 훈련시켜야 됩니다. 경험케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바르게 가지 않을 때는 징계하라고 했습니다. <주의 교양>이 다른 번역에는 <징계>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손이나 발로 징계하면 안 됩니다. 손과 발로 때리면 그것은 자기의 감정입니다. 인격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손과 발이 아닌 매로 징계할 것을 성경은 아주 권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큰 교육의 흐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구라파적인 교육이 있습니다. 구라파적인 교육은 굉장히 엄격합니다. 영국이나 프랑스는 교육이 굉장히 엄격합니다. 미국은 굉장히 자유분방합니다. 그런데 정말 인성(人性)교육은 유럽 쪽의 교육이 훨씬 더 잘 되고 있다고 합니다. 영국 같은 데서는 지금도 매 맞아 죽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징계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잠언 13장 24절에 보면 <초달을 차마 못 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니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 하느니라>, 22장 15절에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훈련이 잘 안 되어지면 채찍으로 징계를 해서라도 그 자식을 바로가게 하라는 말입니다. 웨슬레의 어머니가 자녀를 몇 명 둔 줄 아십니까? 19명 낳았어요. 수백 년 전 그 당시에는 낳은 자식의 반만 키워도 잘 키운 것인데 19명 다 키워서 다 국가적인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자녀들을 잘 키웠느냐고 물었습니다. 웨슬레의 어머니는 “나는 우리 아이가 그들의 머리가 커지기 전에, 정확하게 말하면 다섯 살을 넘기기 전에 그들의 의지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도록 가르쳤다.”고 고백했습니다.     
머리가 커지면 교육이 잘 안 됩니다. 다섯 살 전에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하면 입이 좁은 큰 병과 같습니다. 입이 좁은 병 안에 사과를 집어넣으려고 하면 어릴 때 집어넣어서 키우면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지리산에서 한 번 그렇게 해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과를 작을 때는 병 안에 집어넣어서 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큰 사과를 입이 좁은 병에 넣으려고 하면 깨지고 터져야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적으로 잘 훈련시키면 자동적으로 믿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데 다 커서 어른이 된 다음에 신앙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하면 깨지고 찢어지고 얼마나 많은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는지 몰라요. 어릴 때부터 순종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의 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데 그 말에 속아 넘어가면 안 돼요. 자녀들의 기를 어릴 때부터 말씀 앞에 꺾어야만 아이가 바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잠언 20장 30절에 보면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말로써 훈계해서 안 되면 채찍을 가지고 징계해서라도 경건한 자녀를 만들어 나가라는 것입니다. 
라이언 화이트는 열세 살 때 혈우병을 앓아서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수술할 때 수혈이 잘 못 되어서 후천성 면역결핍증인 에이즈에 걸렸습니다. 병원 측의 실수로 에이즈에 걸려서 죽음만을 가다리고 있는데 이 아이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부모도 원망하지 않고, 형제도 원망하지 않고, 자기를 수술하기 위해서 잘 못된 혈액을 사용했던 의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항상 웃음을 보였습니다.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염려하는 부모를 위로하며 날마다 기쁘게 살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방송매체를 통해서 전국에 전해졌을 때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많은 사람이 이 아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유명인사들이 앞 다투어서 이 아이를 방문했습니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도 친히 이 소년을 찾아서 방문하고 위로했습니다. 유명한 팝 가수인 마이클 잭슨도 이 소년을 찾아와서 위로했습니다.
결국 5년을 더 살다가 18살에 죽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기독교 잡지에 실려서 더욱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버지는 죽어가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나는 네게 아무 것도 해 줄 것이 없구나. 아빠가 어떤 선물도 줄 수 없음을 용서해 다오.”
“아버지!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많은 선물을 받고 살아왔지만 아무도 아빠가 주신 선물보다 귀한 선물을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빠는 제게 천국열쇠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해 주셨고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믿게 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영생을 얻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다시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천국갈 수 있도록,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가장 큰 책임입니다.
우리 자녀들은 부모에게 라이언 화이트처럼 이렇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잘 믿는데 여러분의 자녀는 이 신앙을 갖지 못하고 멸망을 향해서 달려가는 자녀는 없습니까? 감사할 수 있도록 교육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주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다음은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훈계는 말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훈계는 매가 아니고도 매의 효과를 내는 것이 훈계입니다. 매로 하지 않고 말로 양육하는 것이 훈계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어린아이가 거짓말을 했다고 하십시다. 그러면 “거짓말하면 못쓴다, 거짓말 했으니까 매 한대 맞아라.”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 가져오너라. 몇 장 몇 절 읽어라.” 그래서 거짓말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습니다. “거짓말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거짓말하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하면 “그렇다. 성경말씀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지? 이제 그렇게 살아가야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기도해 주마.”하고 기도해 주고 가르치는 이것이 바로 주의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내 경험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내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쳐 놓으면 다 커서도 모든 문제를 성경에서 풀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의 말씀으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주의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 부모들이 내 마음 속에 하나님 말씀을 많이 채워놓아서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말씀을 줄 수 있는 부모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천상륙작전을 폈던 맥아더의 ‘자녀를 위한 기도’는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 기도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내게 이런 자녀를 주옵소서. 약할 때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대담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내게 주시옵소서.... ’
참 대단한 기도문입니다. 우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만들어 보십시다. 그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도 아빠와 엄마가 이렇게 널 위해서 기도한다고 보여주면 자녀가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웨슬레의 어머니는 19명의 자녀를 키웠는데 여덟 가지 자녀를 키우는 철학과 방법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녀를 키울 때 이런 원칙을 세웠으면 좋겠어요. 기도문과 자녀교육의 원칙을 세워서 서로 공유(公有)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이런 좋은 원칙을 가지고 있구나,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 그렇게 해서 자녀를 키운다고 하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녀를 키워나갈 줄 믿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말씀대로 교육받지 못한 분들이 참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지 못하고 살아 왔지만 우리 자녀들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교양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신앙훈련 잘 시키고 징계를 해서라도 경건한 자녀를 만들어야 됩니다. 훈계로 양육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내는 부모의 책임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교육의 십계명을 말씀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하고 자신에게 성실한 삶을 살게 지도한다.
2, 늘 긍정적인 말로 자녀를 격려하고 하루에 한 번 이상 칭찬하고 축복한다.       
3. 부모의 목표만을 강요하지 말고 자녀의 달란트를 따라 지도하라.
4. 그리스도를 닮는 신앙생활의 본을 보여라.
5. 일시적인 감정으로 매를 들지 말라.
6. 자녀를 내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고 양육하라.
7. 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만들어 기도하고 자녀도 알게 하라.
8. 부모도 실수가 있으니 잘못한 것은 자녀에게 사과하라.
9. 자녀를 무시하여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자존심을 상할만한 언행을 삼가라.
10.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가지고 그들의 문제와 고민을 들어주는 친구가 되라.

이런 원칙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교육하고 주의 말씀과 주의 뜻을 따라서 양육하고 교육하여서 자녀들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부모님 때문에 제가 잘 자랐습니다. 하나님 좋은 부모님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감사하는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윤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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