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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디모데 훈련(12):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딤전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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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거짓 교사, 그리고 돈>
본문 말씀은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① 노예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1-2).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1세기에 노예 제도는 보편적인 사회 현상이었습니다. 노예는 하나의 소유물처럼 간주되던 시대였습니다. 바울이 노예제도에 대하여 반대했다는 증거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확실히 그 당시 일반적인 사회 제도를 당연한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교회 안에 들어와 신자가 된 노예에 대해서는 각별한 애정을 기울였습니다.

빌레몬서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주인인 빌레몬으로부터 도망쳐 떠돌다가 바울을 만나 기독교인이 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원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더 이상 노예로서가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서 대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빌 1: 16). 또한 갈 3: 28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종이나 자유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된다고도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노예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 안에도 노예를 소유한 주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주인들 덕분이었든지 노예들 역시 교회에 함께 출석했던 것 같습니다. 문제는 노예들 중에 일부가 자기 주인들이 같은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존경도 아니하고 가볍게 여기는 일이 왕왕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노예들의 잘못된 태도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이들이 주인이 같은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주인을 존경도 하지 않고 홀대(忽待)할 때 하나님의 이름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욕이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2절에 신자인 노예는 같은 신자인 주인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겨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노예가 주인을 잘 섬길 때 주인이 바로 이 섬김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2절 후반부 말씀이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당시 노예제도로 볼 때 주인이 노예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혜자(施惠者)는 언제나 주인이고, 수혜자(受惠者)는 언제나 노예라는 인식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주인이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시혜자이기 때문에 수혜자인 노예로부터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당시의 통념(通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그 당시의 사회적인 통념을 역전(逆轉)시키고 있습니다. 주인이 시혜자이기 때문에 노예가 주인을 존경하고 더 잘 섬겨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다같은 신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노예가 주인을 더 잘 섬기게 될 때 이 '섬김이 가져다 주는 유익'(EUERGESIA)을 얻게 될 사람이 바로 다름 아닌 주인이 될 수 있으므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노예는 주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은혜를 받는 수혜자가 아니라 주인에게 은혜와 유익을 주는 시혜자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주인이 노예의 동료 신도요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노예들이 같은 교회에 나가는 주인들을 존경하고 더욱 더 잘 섬기게 될 때 하나님의 이름과 사도들의 이름이 영광을 받을 수 있고, 양자 사이에는 더욱 끈끈한 유대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당시 유행하던 노예제도를 철폐하라고 외친 사회 개혁가나 이상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회질서를 존중한 현실주의자였습니다. 할 수 있으면 기존 질서에 잘 순응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노예나 자유자나 차별 없이 한 형제가 된다는 원칙만큼은 분명히 했습니다! 여기에 그 당시 일반적인 관습을 뛰어넘는 사도 바울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② 거짓된 교훈이 가져다 주는 폐해(弊害)에 대해서 말씀합니다(3-5).
그 다음에 바울은 3-5절에서 그 당시 에베소 교회를 혼란으로 몰아넣던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 안에는 초대 교회에 유행하던 가지가지의 거짓 교설(敎說)들이 유행병처럼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 두 가지 있습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가르친 내용과는 다른 내용을 가르칩니다. 기독교 진리가 아닌 다른 교리, 예컨대 "혼인하지 말라"라든지 "어떤 음식은 부정하니 먹지 말라"는 것과 같은 허망한 교리를 가르칩니다. 그 다음에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건전한 말씀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경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가르침을 일삼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거짓 교사들은 결국 어떻게 되고 맙니까? 본문 4-5절 말씀을 표준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교만해져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논쟁과 말다툼을 일삼는 병이 든 사람입니다. 그런 데서 시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의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말이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붙들린 것이 아니라 어떤 세속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니까 끝없는 알력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거짓 교사들의 문제는 돈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③ 돈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만가지 해악(害惡)에 대해서 말씀합니다(6-10).
본문 6-10절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주장입니다. 희랍어로 돈을 사랑한다는 말은 'PHILARGYRIA'입니다. 사랑이라는 'PHILIA'와 돈이라는 'ARGYRIA'가 결합된 단어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말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돈 그 자체를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하지 않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돈 그 자체는 인간 생활에 꼭 필요합니다. 여러 가지 유익을 많이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돈 그 자체를 사랑하고 돈에서 모든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악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렇다면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행로(行路)를 따릅니까? 9-10절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첫째로,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원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돈은 바닷물과 같습니다. 바닷물이 소금기 때문에 마실수록 갈증이 나듯이 돈은 벌면 벌수록 더 많이 벌고 싶어지는 법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끝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부자가 될수록 돈에 대하여 더 욕심이 생기는 법입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두 번째로,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사탄이 쳐 놓은 덫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거의 다 나쁜 것이기는 하지만 지혜롭고 유익한 욕심도 분명히 있습니다. 예컨대, 학생이 시험을 잘 쳐서 좋은 성적을 얻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면 이러한 욕심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돈을 사랑하는 것은 분별력이 있고 지혜로운 욕심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에 유익한 욕심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돈을 사랑하는 것은 세 번째로,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게 됩니다. 본문 9절에 침륜(沈淪)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희랍어 원어, 'BYTHOI'에 가장 가까운 번역입니다. 'BYTHOI'라는 말은 깊은 곳으로 빠져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을 사랑하다 보니까 훔치기도 하고 사기도 치고 싸우기도 하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결국 돈을 목적 그 자체로 삼아 사랑하게 되면, 그 마침은 전적인 멸망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돈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세 가지의 일반적 해악에 대해서 말씀한 뒤 10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표준 새번역 성경을 읽습니다. "돈을 쫓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돈을 사랑하다보니까 믿음에서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방황하게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돈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많은 고통과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고 고문을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야말로 돈을 사랑함이 기독교 신앙에까지 큰 해악을 끼친다는 말씀입니다!

자, 그렇다면, 돈 없이 살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인데 어떻게 하면 돈을 목적 그 자체로서 사랑하지 않고 수단으로서 이용하며 살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아주 중요한 말이 '자족'(自足, self-sufficiency)이라는 말입니다. '자족'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AUTARKEIA'라는 말인데 어떤 소유욕으로부터도 초연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제가 볼 때 이 '자족'이라는 말, 즉 'AUTARKEIA'라는 말이야말로 '돈을 사랑함,' 즉 'PHILARGYRIA'라는 말과 매우 중요한 대립을 이루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면,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은 일만 선의 뿌리가 됩니다!

본문 7-8절을 보면 바울은 자족하는 생활을 창조론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으로 읽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 것도 가지고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이제 보니 성경에서부터 온 말입니다! 인생은 빈손 들고 왔으니 빈손 들고 떠나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인간이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태어나듯이 아무리 많은 소유가 있다고 할지라도 빈손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는 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누리는 일체의 소유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생을 많이 해서 아무리 많은 소유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 소유의 진정한 주인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진짜 주인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일체의 소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허락하신 선물일 뿐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우친 사람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압니다. 의식주(衣食住)라는 인간의 기본 생활이 충족되면 그것으로 자족할 줄 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제 본문 6절 말씀을 보세요.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이 됩니다." 옳습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믿음(PISTIS)과 경건(EUSEBEIA)이 큰 이익이 됩니다. 창조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따라 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믿음과 경건을 빙자하여 돈을 사랑하는 탐욕에 빠진 사람은 결국 믿음의 길을 떠나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으로부터의 자유'와 '∼∼을 위한 자유'>
자, 이제 본문 말씀이 주는 영적 교훈을 찾을 차례입니다. 설교가 성서 시대와 우리 시대의 다리를 놓아주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본문 말씀을 지금 여기의 우리 상황에 잘 적용하는 것이 설교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의 주제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노예 문제와 거짓 교사들의 망령된 가르침, 그리고 돈에 대한 탐욕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주제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유의 문제입니다. 자유에는 두 가지 종류의 자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입니다.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경제적 수탈로부터의 자유, 간섭으로부터의 자유, 등등 대부분의 자유는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보면 됩니다. 둘째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을 위한 자유'(freedom for)이지요. 평화와 안전을 위한 자유, 화목을 위한 자유, 통일성을 위한 자유, 등등 여러 가지 형태의 자유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으로부터의 자유'는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는 소홀히 하기 때문에 무책임한 자유가 되기 쉽습니다. 방종(放縱)으로 빠져들기 아주 쉽습니다. 반면에 '∼∼을 위한 자유'는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소중하게 여깁니다. 자유를 누리는 사람의 책임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방종에 빠지지 않습니다. 일찍이 페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99)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고 외쳤듯이 자유는 참 소중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유가 '∼∼으로부터의 자유'만 강조하는 권리형 자유, 혹은 방종으로 흐르기 쉬운 무책임한 자유만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을 위한 자유,' 즉 자유를 누리는 사람의 의무와 책임도 강조하는 그런 능동적이고 성숙한 자유를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먼저 노예와 주인의 관계를 생각해보세요. 노예가 자기와 마찬가지로 주인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함부로 오만불손(傲慢不遜)하게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제 나도 주인과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자유를 얻었으니 저나 나나 다 똑같으니 아무렇게나 대해도 괜찮다." 바울이 볼 때 이것은 아주 위험한 자유입니다. 주인의 권위와 압제로부터의 자유만 생각했지 주인의 안녕과 집안의 질서와 평화를 위한 자유는 무시한 자유가 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방종(放縱)에 불과합니다. 노예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진정한 자유는 주인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더 존경하고 더 잘 섬기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존경과 섬김에 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갈 5:13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옳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역설은 여기에 있습니다. "종이 되고 섬김으로서 오히려 참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 복종하고 섬김으로서 우리는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웃을 존경하고 섬김으로서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야말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자유, 이웃의 행복을 위한 자유, 우리 자신의 경건을 위한 자유, 즉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유가 될 것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거짓 교설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세요. 에베소 교회 안에서 난립(亂立)했던 수많은 거짓 교설들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맹위(猛威)를 떨치고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종교들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조차도 수많은 교파들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종교들, 수많은 교파들이 자기들의 가르침이 최고라며 사람들을 유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상당수의 종교들이 신앙과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가 많습니다. 미국에서 이른바 TV 전도사들, Televangelist들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말씀과 경건으로부터 떠난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물리칠 수 있는 분별력과 용기기가 있어야 합니다. 단지 신앙의 자유만 외칠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깊이 반성하며 진리의 터전 위에 굳게 서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는 누구나 다 경제 활동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돈 벌 자유가 있습니다. 돈은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것이며 유익한 것입니다. 때로 돈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바르게 사용하는 돈은 사람을 살릴 때도 많습니다. 문제는 돈은 어디까지나 수단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목적이 되어서 사람들이 돈 그 자체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돈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돈을 바르게 사용할 때 돈은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돈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돈 그 자체만 사랑하게 될 때 이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서 우리를 파멸하도록 만드는 흉기(凶器)로 둔갑(遁甲)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십일조 생활을 했더니 사업이 엄청나게 번창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피터 마샬(Peter Marshall) 목사님께 찾아가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처음 십일조 생활을 했을 때 일년 수입이 2만 달러 정도 되어서 2천불을 십일조로 바치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지금 저의 연수입이 50만 달러나 되어서 5만 달러를 십일조로 바치자니 도저히 안 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습니까?"

마샬 목사님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형제님, 정말 큰 문제로군요. 저를 참 잘 찾아오셨습니다. 우리 함께 기도해서 풀어야 할 영적 문제 같군요." 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형제의 수입을 예전과 마찬가지로 2만 달러가 되게 하셔서 옛날처럼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도록 도와주세요." 이 교인이 기겁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오늘 우리는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부터 자유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돈을 마음껏 벌 수 있는 자유는 좋은 것이지만 그 자유가 무엇을 위한 자유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그런 자유,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그런 자유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여러분들이 누리는 자유가 하나님과 이웃과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아름다운 자유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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