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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잔치에 꼭 오십시오 (마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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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가 자기 친구의 결혼식에 부득불 참석하지 못하게 되어서 친구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축하 전보는 “성경 요1 4:18”이라고만 썼습니다. 그런데 우체국 직원의 실수로 “1”자를 빼먹었습니다. 그래서 “요 4:18”이라고 전보가 전달되었습니다. 전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례 목사님은 친구의 축하메시지라고 하면서 하객들에게 그 성경구절을 읽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읽자마자 모두가 뒤로 나자빠져 버렸습니다. (요 4: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천국의 모습을 혼인잔치에 비유해서 말씀합니다. 그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왕이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먼저 초청할 사람에게 미리 혼인잔치의 소식을 알렸습니다. 미리 초청장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잔칫날에 되자 종들을 보내서 그 초청한 사람들에게 잔치에 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오지 않습니다. 주인은 그런 사람들의 태도가 맘이 들지 않았지만 다시 종들을 보내서 오라고 합니다. “내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으니 당신은 잔치에 참석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을 위해서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종들을 잡아서 죽입니다. 그러자 왕은 분노하여 군대를 보내서 살인한자들을 진멸하고, 다시 거리로 종들을 보내서 아무 사람이나 잔치에 데리고 오게 합니다. 악한 자와 선한 자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불러 옵니다. 잔치가 시작될 무렵 왕이 순찰을 나왔는데 그 손님 중에 결혼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은 곧 밖 어둠 속으로 쫓겨났습니다.

  이 비유에는 여러 사람이 등장합니다. 임금(하나님)이 나옵니다. 왕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이 나옵니다.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는 (천국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종들은 (구약으로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먼저 초청을 받았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요,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나중에 거리에서 만나서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이방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비유의 중심은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왜 그들은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는가” 그것을 보는 것이 이 비유의 중심을 보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천국의 비유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알고 모두 천국에 들어가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왕은 잔치를 다 준비해놓고 종들을 보내서 그들을 초청합니다. 모두 세 번에 걸쳐서 초청을 합니다. 그 초청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으니 너는 잔치에 참여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천국, 구원, 영생 이 모든 것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영향을 미칠만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천국을 위해서, 구원을 위해서 한 일이 있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준비를 하셨습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나의 선행과 공로는 거기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그 분이 다 마련하신 구원을 선물로 받았을 뿐입니다.
  모든 것을 준비해놓았다고 그들을 부르지만 그들은 거절합니다. 종들을 통해서 초청의 메시지를 받았지만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의 일에 몰두합니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누가복음의 말씀을 보면)또 다른 사람은 소를 사서 시험하러, 또 다른 사람은 장가들어서 못가겠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나름대로 왕의 초청에 응할 수 없는 이유와 핑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나름대로 핑계거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책을 보았습니다. “전도시 반대 질문 100가지”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가지가지 이유를 다 댑니다. “술 담배를 못하게 해서 교회 안나간다. 교회에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안 간다. 성경이 안 믿어진다. 시어머니가 불교신자라 안 간다. 목사가 너무 화려하다. 목사가 너무 촌스럽다.... ” 그 책에서는 100가지만 소개했지만 어디 100가지뿐이겠습니까? 수천 가지, 수만 가지 예수 믿지 않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그럴듯하게 얘기하지만 하나님 앞에 서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 때는 절대로 그렇게 변명하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초청장이 보내졌습니다. 그들은 그 초청을 묵살했습니다. 나에게 보낸 마지막 초청이 끝나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마음까지 꿰뚫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변명할 수 없다는 것을... 지금은 이 세상에서 이런 저런 핑계를 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왕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무엇이라고 변명했나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기회를 주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결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때가 온다는 것을 꼭 명심하십시오. 오늘 내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에 대해서 바로 보고 바로 믿고 바로 응답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핑계를 대는 이유들을 보면 그것 자체로는 매우 소중하고 귀한 일들입니다. 밭에 가서 농사짓는 것, 자기 사업을 하는 것. 얼마나 큰일입니까? 그들은 무슨 댄스파티나 마약파티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상적인 일을 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윌리암 바클레이 교수는 다음과 같이 이점에 대해서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시간에 속한 이 세상의 일에 너무 분주하여 영원의 일을 잊기가 쉽다. 보이는 일에 너무 분주하여 보이지 않는 일을 잊기가 쉽고, 이 세상의 요청들을 계속 듣다가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초청의 음성을 들을 수 없게 되기가 쉽다. 차선의 것들이 최선의 것들을 막아버리고, 그 자체로서는 좋은 것들이 최고의 좋은 것들을 막아버린다는 것이 인생의 비극이다. 사는데 너무 바빠서 삶과 생명을 놓치게 되고, 생명에 딸린 것들에 너무 집착하여 생명 자체를 망각하게 된다.”

  나의 부동산을 늘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나의 사업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나의 아내를 기쁘게 하고 나의 가족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습니다. 또 그것은 매우 평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평범하고 이 세상에 속한 것 때문에 영원하고 가치 있는 것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초청받은 자들이 계속 거절한 것은 왕궁의 일보다 자기 일이 우선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의 왕국보다(하나님 나라보다) 자기의 왕국 건립이 우선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시간을 결국 없어져 버릴 것들에 바치기만 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와 천국과 구원의 기회는 결국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왕은 또 다시 종들을 보내서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옵니다. 그들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가리지 않고 다 잔치에 초대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직업과 내가 가진 물질의 양과 상관없이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사람들에게 어떤 평판을 받는 지에 상관없이, 나의 도덕성에 상관없이, 나의 선함과 악함에 상관없이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잔치가 시작될 무렵 왕의 순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초청된 사람 가운데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발견되었습니다. 왕은 그 사람에게 왜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에 들어왔느냐고 물어봅니다. 아무 말도 못하자 왕은 그 사람을 결박해서 밖 어두운 곳으로 쫓아 보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사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불러올 때는 언제고 예복을 안 입었다고 잔치 자리에서 쫓아내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껴지실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러나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맞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밭에서 일하다가 땀과 먼지에 범벅이 된 그 옷을 입고 결혼식에 갑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지금 결혼식은 왕의 결혼식입니다. 그는 왕에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당시의 잔치 풍속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잔치가 있을 때 사람들이 예복을 나누어 주었고, 그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옷을 그 예복으로 갈아입을 기회와 의무가 있었지만 그것을 묵살했습니다.

  이 비유가 천국에 관한 것이라면 예복을 입은 사람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 예복은 무엇일까요? 이 예복은 계시록에서도 말씀해 주듯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의로 변화된 세마포 옷”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묻어있는 세마포 옷. 이것이 천국에서 유일하게 유행하는 패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입고 있었던 옷을 다 벗게 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 세상에서 많은 명예와 지식, 재물의 옷으로 치장하고 살았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있는 세마포 옷에 비하면 그것은 누더기가 될 것입니다. 그 누더기 옷을 입고는 천국의 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묻어있고, 그 보혈로 염색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한 올 한 올 짜여진, 예수님께서 입혀주시는 의의 옷을 입고 있습니까? 이 옷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벌거벗은 죄인인지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를 덮어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을 때 입혀집니다.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이 오늘밤에 죽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너는 무슨 권리로 내 천국에 들어오려 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고 특별히 나쁜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의 경력에 대한 호소입니다. 그러나 반하우스는 지적합니다. 우리의 경력은 죄에 대한 경력이라고요. 내 삶의 경력을 많이 말하면 말할수록 내 죄가 더 많음을 말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처럼 “할 말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 사람은 결박당하여 바깥 어두운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너는 무슨 권리로 내 천국에 들어오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그것뿐입니다. “하나님, 저 자신에 관한 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그의 의로 나를 덮으셨습니다. 나는 오직 예수님을 힘입어 당신 앞에 섰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초청에 응해서 왔고 나는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해진 예복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 사람을 내쫓지 않을 것입니다. 
 
  며칠 전에 복음성가 테잎을 하나 샀는데 그 찬양 중에 제 가슴을 찌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마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제목은 “세 번 부인할지라도”입니다.

“나는 주를 모른다 세 번 부인할지라도
주는 나를 모른다 부인하지 마소서.
교만하고 어리석어 나 주를 믿노라 했으나
내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 줄 이제 압니다.
자비하신 주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심판도 용서도 잘 알지 목하지만
어느 땐가 죄인을 부르실 때 내 이름도 불러주소서.
자비하신 주여, 나는 주를 모른다 세 번 부인할 지라도
주는 나를 모른다 부인하지 마소서.“  (다윗과 요난단 앨범 "주님의 눈물" 중에서)
 
  내가 비록 베드로와 같이 나는 주님을 모른다 세 번 부인할 지라도 주님은 나를 모른다 부인하지 않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비록 부끄러운 모습으로 선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은 나에게서 그 분의 십자가의 의로 입혀진 예복만을 볼 것입니다. 내가 이 예복을 입고 있다면 내가 비록 베드로와 같이 세 번 부인할 지라도 주님은 나를 향해서 “내가 너를 안다”고 나를 품어주실 것입니다.
오늘 성전을 떠나기 전에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나의 의의 세마포 옷을 입었느냐? 내가 너를 만났을 때는 그것밖에 보지 않을 것이다.” 
(설교 / 이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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