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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까지 (고전 1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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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까지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으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 1-13절>

성경적 차원에서, 신자가 걸어온 길을 논할 때 과거를 돌아보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기억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출애굽 사건을 바울 선생이 기록하면서 출애굽 사건에서 하나하나의 난관을 극복할 때마다 처음의 난관을 극복한 사람이 두번째 난관에서 걸리고, 두번째 난관을 극복한 사람이 세번째 시험에서는 걸리고 하는 식으로, 처음 관문을 통과했다는 것이 두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프리패스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므로써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어떤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즉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기억해야 되는 말씀은, 12절 말씀과 같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집약해 놓은 말씀을 찾아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3장 5-16절까지입니다.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언제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여기서도 분명히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직 내가 잡았다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말씀을 합니다.

신앙적인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앙적인 자세와 우리 개인이 갖는 신앙적인 자세 사이에서 충돌되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근본적으로 누구인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성경이 제시하는 것과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의 차이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괜찮은 일을 하나 하면, 나는 원래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것이 증거된 것으로써 그 사건을 기억합니다. 내가 어떤 선한 일을 했다든가, 내가 괜찮은 의로운 일을 했다든가, 하나님 앞에 칭찬받을 만한 신앙적인 어떤 승리를 하나 하면 내가 본래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이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집착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과거에 내가 잘한 일들을 기억하므로써, 내가 원래부터 괜찮은 사람이라는 '안심'을 하기 위해서 과거에 집착한다고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는 그런 착한 자들이 아니고 원래는 '마이너스'입니다. 죄인으로부터 출발하며, 죄악밖에 저지를 줄 모르던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함을 얻고 의와 생명에 대해서 빛을 보기 시작하여, 거기에 부름을 받아 이제 조금씩 걸음마를 떼면서, 즉 '언문을 깨우치고, 제2외국어를 배우고 산수, 수학을 배우고, 그래서 조금씩 커가고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국민학교를 졸업했느냐, 그것이 끝이 아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아직도 중학교, 고등학교를 간다는 이야기이지, 네가 똑똑했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중학교를 마쳤느냐, 그러면 이제 고등학교를 가야 된다. 국민학교 때 1등으로 졸업 했는데, 중학교 때에 1등을 못할 수 있고, 중학교 때에 1등을 했는데, 고등학교 때에 1등 못할 수 있고, 고등학교 졸업시험에서 1등 했는데, 대학시험에서 떨어질 수 있듯이, 오늘 내가 자라나고 도달한 지점이 다음을 향한 디딤돌이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어져서 다음 단계로의 도약이요, 이어짐이요, 자라남이요, 도달함에 관한 문제이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증거로써 과거가 기억되기 시작하는 것만큼 신앙에 있어서 무서운 유혹은 없습니다.

어느 교회나 그 교회 나름대로의 자랑이 있을 것입니다. 각 교회마다, 이런 자랑이 있고, 저런 자랑이 있고, 이것을 다른 교회보다 잘 하고, 이런 면에서 우리 교회가 최고이고, 우리 교회에는 이런 사람이 있고, 저런 사람이 있고, 이런 업적이 있다고 하는 자랑들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는 합격점이 되면 천국에 가게 되어 있지, 여기 남아 있게 되어있지 않은 자들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뒤를 돌아 볼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뒤를 돌아 본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근본적으로 틀린 입장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작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빌립보서 3장에서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 끝에 나오느냐면, 이런 말씀 끝에 나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복음 안에 있어 보니까 그것이 모두 필요없는 것이더라. 내가 얼마나 공부를 잘한 사람이냐, 내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이냐, 내가 얼마나 명문출신이냐 하는 것이 증명되는 일이 아니더라. 내가 이제 주님 앞에 붙잡힌 바 된 이 신앙의 길에 있어서는, 나는 내 스스로 가진 것으로 쌓아 나가는 싸움이 아니더라. 내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것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듯이 졸업한 것이고 남아 있는 일들이 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학교 떨어지고 나서 국민학교 우등상장을 집안에 쭈욱 붙여 놓았다고, 그것이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대학교를 일등으로 졸업하고 나서, 지금 놀고 있다면 그것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내가 어느 대학을 나왔고, 학교 다닐 때에 총학생 회장을 하고, 모모 유력한 집안에서 나를 사위 삼으려고 애를 썼었고, 하는 이야기들이 지금 잘 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전혀 쓸모 없는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이, 다른 교회와 우리 교회를 비교한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발상이 아니고, '지난 1세기 동안 우리가 얼마나 괜찮게 해 왔는가' 이런 생각이라도 든다면 그것은 참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지난 어려운 1세기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를 지켜주셨고, 우리로 이 안에서 신앙적으로 유익을 보게 하셨다'라는 것을 돌아보아 앞으로도 하나님께 더 많이 신뢰하며 매어 달리며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며, 소망 속에 있게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일이지만, '그때 이런 일이 있을 때에도 나는 실수하지 않았다', '그때 이런 이런 일이 있었을 때에 나 아니었으면 우리 교회 큰일날 뻔했다.' 그런 것은 별로 바람직한 생각도 아니고 성경이 요구하는 생각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고린도후서 11장을 보면, 신자들이 생각해야 하는 신앙상의 자세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며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나열한 것은 사도 바울에게는 이것이 자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애를 썼으며, 그 많은 고생과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를 놓치지 않았는가'를 지금 나열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이요, 자세인 것입니다.

몇년 전에 죠스라는 영화가 들어와서 인기리에 상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죠스1편'을 보면, 상어잡이 하는 사람들끼리, 큰 상어를 잡기 위해서 마을의 해양경비대의 보안관과 해양학자와 직업 상어잡이꾼 등, 세 명이 배를 타고 나갔습니다. 지루한 시간 동안에 술을 먹고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얼마나 자기가 바다와, 특별히 상어 문제에 있어서 경력이 많은 베테랑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서로 상처(傷處), '상어에게 물린 이 자국을 보라!'라고 상처를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봐라! 그때 물린 것이다!' 옆구리 상처, 허벅다리 상처를 보이는데, 보안관만은 뭍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상처가 없습니다. 아무리 뒤져봐도 상처가 없어서 쩔쩔매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바로 그렇게 우리를 꾸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더 주를 위하여 매를 맞았느냐, 누가 더 고난을 당했느냐, 누가 더 많은 추억거리를 갖고 있느냐가 자랑이 아니다. 신자의 자랑은 어디에 있느냐?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은 것이 자랑이 아니라 신자가 마땅히 와 있어야 할 자리, 해가 가면 갈수록 달이 가면 달이 갈수록 신자가 커가야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주를 위하여 고생을 했으며, 이런 업적을 남겼느냐가 아니다.' 28절 말씀을 보면,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이 자리에 와야합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교회가 결국 커온다는 것은 3, 5, 10 주년, 신앙생활한 지 10, 20년이 흐르면, '아! 저 사람의, 지금 신앙이 때가 묻지 않고 잘 자라야 될텐테.' 이런 마음을 갖는 것, 그것이 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멋지게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에그, 무얼 그것 가지고 그래, 당신은 지금 왼쪽 하나만 물렸지? 나는 그때 양쪽으로 물렸지! 스테레오로 물렸는데, 그때 내가 운 것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려. 내가 그때 아무한테도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이겼어! 그 정도 가지고 징징거리고, 창피하게 굴어!' 이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않으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않더냐'에로 가야지, '흥' 하고 나오는 것은 교회가 망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사람일수록 찾아가서 이야기 하기 싫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면,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래!', '글쎄, 당신은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나는 지금 당하고 있는 아픔이 있어서 내 편이 되어 달라고 와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했더니, '흥' 하고 반응을 보인다면, 누구에게 이야기 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제일 잘못 가르친 것 중의 하나가 이것 아닐까요? "엄마, 아빠는 국민학교에 다닐 때에 100점만 맞았어! 너는 왜 99점이니?" 아이가 드디어 3학년 때부터 속지 않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날마다 100점만 맞았으면 옆집 아빠는 몇점 맞았길래 우리 아빠보다 더 높아졌느냐, 그때 시험문제는 각자 자기 이름 쓰기였냐? 어떻게 우리 엄마 아빠는 날마다 100점만 맞냐?' 이렇게 됩니다.

어떻게 우리의 신앙이 '나는 그때....'라는 이야기 밖에 없습니까? '나는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에게 그따위 일은 일도 아니다.' 왜 그렇게 '나는 족속이 다르다' 이렇게 되는가 말입니다. 흘러 온 신앙 경력이 쌓이면 쌓일수록 왜, '나는 다르다'가 되는 것입니까? '나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고 여러번 죽을 뻔 하고 물에도 빠지고, 불에도 빠졌다'라고 이렇게 비교를 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 신앙이란 그렇게 해온 것들이 지금 나로 하여금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로 와 있지 않다면 그 교회는 30년 50년 되었다고 자랑할 것이 없으며 그 신앙은 100년, 200년 되었다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첫 본문인 고전 10장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그곳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홍해도 건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를 섬길 때에도 나는 버텼다. 나는 간음할 때에도 다 거부하고 거기서도 살아 남았다', 그래서 누가 무슨 잘못을 하면, '너는 왜 그러느냐, 나는 안 그랬는데', 이렇게 나오는 이것이 교회에서 쌓아야 할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서로 주고 받아야 할 신앙상의 가장 큰 격려와 나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눔은 나는 어떻게 그때 그런 문제들을 해결했으며, 승리했으며, 실족하지 않았는가의 자랑이 아니라, 그런 모든 것을 거쳐서 그것에 넘어졌든지 일어났든지 간에, 지금 누가 약하면 나도 약하고, 누가 실족하면 내가 애타하는 것으로 와 있어야 됩니다.

한국 교회는 지난 1세기 동안 교회적으로 여러 가지 풍상을 겪었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로 상처받는 일들도 있었고, 우리가 같이 운 일도 있었고, 안타까와한 일도 있었고, 서로 뜻을 달리해서 나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돌아와 '그때 나는 이랬다.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했다, 그래서 나는 잘났다, 당신은 못났다', 이런 것으로 우리의 추억이 되짚어진다면 그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모든 일을 겪으므로써 우리가 느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주를 위하여 이만큼 고생했다. 나는 한번도 내 중심이 흔들린 적이 없다'가 아니라 지금 내가 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나를 의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연약한 자가 갖는 연약한 믿음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갖고 있고 그 앞에 심판자로 서지 않고 내가 그를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잘난척하는 교만한 자로서 그의 앞길을 막지는 않고 있는가, 그것을 돌이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앞에 있었던 이야기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고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고....' 이런 모든 것들을 자랑하기 위해서 쓰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는 이것을 자랑합니다. 30절 말씀부터 보면,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사도 바울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주를 위하여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 내가 얼마나 큰 능력을 행했느냐가 아니라 그의 약한 것을 자랑합니다. 다메섹 왕이 그를 잡으려 할 때 그가 광주리를 타고 벗어나서 도망을 갔습니다. 우리로서는 어떤 감이 오지 않습니다.

중국의 사기를 쓴 사마천이 그런 일을 당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가 나라에 큰 중죄인으로 몰려서 사형을 언도 받게 되었는데, 중국의 옛날 당시의 법에는 사형받게 된 사람이 한가지 일을 서약하면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놓는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자가 거세를 수락하면 그를 살려 놓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들이 거세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그냥 사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남자로서 가장 치명적이고 수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살아 있어도 남들에게 모욕을 받고 그 가문 전체에 누를 끼치기 때문에 죽는 것만 못했습니다. 그래서 죽는 쪽을 택했지, 거세를 당하고 목숨을 구차하게 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목숨을 살리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이웃 사람보다도 같은 문중, 가문의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핍박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수모를 감당한 것은 그는 역사를 써야겠다고 작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史記」를 쓰게 되었는데, 오고 오는 후손들에게 우리 선조들이 저지른 실수를 반복시키지 않아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그 모든 수모를 감수했고, 사기를 쓰기 위한 목숨연장을 위하여 거세를 수락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한 것도 비슷한 입장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히려 자신의 치사하고, 연약하고,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기에 꼭 좋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놓는 것은 우리가 걷는 길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그가 분명히 알려주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각자의 자존심을 세우고, 각자의 우월감을 증명하는 것이 신앙을 소유하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리고 얼마나 쉽게 우리가 거기에 말려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인가를 알기 때문에 그는 이 문제를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 신자들이 얼마나 이익을 얻으며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는가에 대해서는 성도 여러분이 그 교회의 분위기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물론 목사가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따라서 그 분위기가 좌우되기도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들 자신입니다.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주께서 요구한대로 갖기 위하여 참으로 큰 싸움을 하셔야 됩니다.

이런 설교를 듣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이것을 신자들이 신자들 자신의 생애에 신앙생활과 실천과 자세로 가지는, 여기에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하는 이 커다란 신앙적인 결단과 애씀이 없이는 그저 얻어지지 않는 신앙의 중요한 싸움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증명하기 위하여 같이 신앙생활하는 다른 사람을 방해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영광까지도 가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늘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깨우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졌던 모든 신앙적인 경험들과 걸어온 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열매맺기 위하여 한 순간도 한 눈을 팔아서는 안되는 존재인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한국 교회 1세기를 맞으면서 어떤 의미에서 이제부터야말로 한국 교회는 훨씬 더 중요한 제2의 싸움에 들어가지 않는가 싶습니다. 그 동안은 하나의 조직과 전통이 뿌리를 내리는 기간으로써 어려웠다면 이제부터는 우리의 매너리즘에 빠진 위험에서부터, 남들이 하는 식으로 쉽게 습관적인 교회로 가고 싶은 타성에서부터, 성경이 요구하는 생명과 진리와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과 특권들을 놓치지 않고 제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유지할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이제는 우리 각자가 선택해야 하고 놓치지 말아야 되고, 실천해야 되는 일로 더욱 분명하게 우리 앞에 놓여진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어느 교회나 주일 아침에 보면 성가대가 앉아 있고, 꽃도 있고, 난방도 되어 있고, 그냥 와서 앉았다 가면 되는 교회의 틀은 잡혀졌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어렵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각자의 싸움이고 한 순간도 한눈을 팔아서는 안되는 싸움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지나가는 시간들이, 지나온 과거들이, 앞으로도 만들어질 경험들이, 여러분을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는 이 말씀으로 결론 내려지게 모아져야겠고, '내가 이렇게 하고, 저렇게 했다'가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저 앞의 목표를 향하여 뛰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로 하고, 그 목표라는 것은, 더욱 더 남보다 내가 잘났느냐를 구별하는 싸움이 아니고, 경쟁의 싸움이 아니고, 남의 약한 것을 보면, 나도 약해지고 남이 실족한 것으로 인하여 내가 애타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자리로 가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한 순간도 빼앗기지 말기로 합시다.

우리는 참으로 시험에 약한 자들입니다. 아차 하면 자존심의 도발을 받을 때 물러서지 못하고, 지지못하고, 양보하지 못합니다. 감춰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신앙에서 제일 큰 시험거리입니다.

우리는 쇠해야겠고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합니다. 나는 묻혀서 하나의 씨앗이 되어야 비로소 열매를 맺힌다는 이 법칙을 놓치지 않는, 그것이 우리의 중요한 풍토가 되는 교회를 만들어 가기로 다시 한번 결심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박영선 목사 (남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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