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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눈물 (눅 19: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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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정말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큰 능력자인데 왜 저렇게 사실까? 왜 저렇게 밖에 못 하실까?"
어떻게 보면 너무 약해 보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은지 사흘만에 살리십니다. 그동안 많은 이적을 베푸셨던 주님이십니다. 누구도 고칠 수 없다던 병들을 심지어 당시로는 하늘에서 벌로 내린 병이라고 일컬어지던 그런 병들까지도 다 고치셨던 주님이시오 누구도 손 못 대던 귀신들을 다 내어쫓으신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겨우 새끼 나귀를 타고 가십니다. 당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을 찾아온 그 많은 사람들이 옷가지를 길에 내어다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기뻐 맞이하며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쁨의 함성을 들으며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러나 왕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볼품 없는 새끼 나귀에 올라타고 있는 어쩌면 시골의 한 청년과 같은 초라한 모습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 성을 보시면서 우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환호하는데 예수님은 울고 계십니다. 아니 그 많은 사람들이 마치 왕을 모시는 것처럼 옷가지도 길에 깔아드리고 종려나무 가지도 흔들어 드리는데 우리 같으면 두 손을 들고 그 환호에 답이라도 할 것 같은데 거꾸로 울고 계십니다. 감격해서 우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지금 눈물을 흘리고 계신 걸까요?

회개할 줄 모르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게 되면 배우들이 얼마나 쉽게 눈물을 흘리는지요?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예전에는 그저 우는 흉내만 냈는데 요즘은 남자 배우 여자 배우 할 것 없이 참으로 쉽게 감정을 담아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장면을 보면서도 같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감정이 매말러 가고 있습니다. 또한 주위에 쉽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면 너무 헤프다느니 사람이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디에 쓰겠느냐 하면서 우습게 여기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물만큼 우리 정신 건강에 좋은 것이 없다고 합니다. 울고 싶을 때 원 없이 울 수 있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이 더 밝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기뻐서도 울고 슬퍼서도 웁니다. 너무도 분하고 억울한 나머지 울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울고 있는 자신을 보기도 합니다. 딱히 울 이유도 없는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어떤 감격에 잠겨서 울기도 합니다. 너무 고마워서 울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이든 우는 것이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는 내가 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우리들 앞에 몇 번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먼저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자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기 위해 무덤으로 가셨지만 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 너무도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불과 며칠만에 다시 울고 계십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다 말입니다. 여기 우신다는 말은 그저 눈물을 흘린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정도였지만 지금 여기서는 아주 통곡하며 울고 계십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도 이상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환호하는데 그 사람들에 둘러 쌓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다 말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 통곡하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울고 계신 것일까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위로를 받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지금 통곡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오히려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말 자체가 평화, 평화의 성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평화롭게 살아야 할 예루살렘 성이 오히려 평화를 잃어버리고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언제까지나 가장 평화롭게 살 수 있는데 오히려 멸망의 어두운 그림자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을 볼 때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우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다. 우리는 평화에 이르는 일을 알고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평안을 누리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되면 잠시는 힘든 것 같아도 그래서 지쳐 쓰러질 것 같아도 이윽고 하나님이 힘이 되어 주시고 우리를 더 큰 은혜와 감동의 삶으로 바꾸어 주실 터인데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너무도 조급합니다. 그저 "빨리 빨리"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게 우리를 넘어지게 만들고 더 큰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길로 달려갑니다. 물론 답답합니다. 왜 서둘러서 하지 못하고 저렇게 꼼지락거리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빨리 달려야 할 때가 있고 오히려 더 늦추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까지,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차분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저 답답해서 미치려고 합니다. 좀 더 서두르라고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그만 주저앉고 맙니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밥이 뜸이 들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 길에도 서둘러야 할 때가 있는 반면 때론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뜨거운 밥을 식히지도 않고 삼켜 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요 우리는 차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시기만 하면 우리의 길이 놀랍도록 열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열어 주셔야지 우리가 열려고 하면 그건 고생바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엉뚱한 길로만 달려가며 길을 열어 보겠다고 하고 무언가 이루어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아니 그게 멸망의 길인지도 모르고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속이 타시겠습니까? 어찌 그런 나를 보며 하나님이 울지 않겠느냔 말입니다. 

잠언 16장 2절에 보면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말씀하시며 7절에서는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말씀하셨고 25절에서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내가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 생각만 고집하고 달려간다면 그런 나를 보시면서 어찌 하나님이 안타깝지 않으시겠습니까? 어찌 그 마음이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탄식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을 통해 우리를 위해 탄식하면서까지 기도하여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엉뚱한 길로 다니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보다 주님이 아니라고 고개를 젓고 계신데도 엉뚱한 길로만 다니려고 한다면 그런 우리를 보며 어찌 하나님이 우시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는데 그래서 복을 주시려고 불러주셨는데 복된 길이 아닌 멸망의 길로만 가고 있다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정말 말씀의 사람인가? 내가 말씀대로 살고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시고 나의 믿음 없는 모든 모습들, 말씀을 떠난 나의 삶의 모습들을 철저히 회개하여야 합니다. 여기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단지 내가 잘못했습니다 깨달아 고백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길에서 바른 길로 돌아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다면 더 이상 도적질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내가 가로채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칭찬 받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날을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야 될 시간을 내 멋대로 써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일을 지키지 못하고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채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거기다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될 십일조와 헌물 조차 떼어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회개하십시오. 돌이키십시오. 그래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며 공 예배 시간을 철저히 지킬 것이요 마땅히 하나님 앞에 십일조와 예물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사랑으로 연결되는데 나는 참 사랑의 사람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시고 자신을 바로 세워 사랑의 사람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때를 분별할 줄 모르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보시며 우셨습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불이 붙어서 타고 있다면 그리로 들어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지금 내가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데 저만큼 앞에 폭포가 있다고 하면 얼른 물가로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그냥 물길을 따라 내려간다면 그것을 지켜본 물가의 사람이 그냥 내려가면 죽는다고 빨리 이리로 나오라고 소리소리 치는데도 여전히 그냥 내려가기를 고집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여러 말씀을 통해 우리 앞에 닥쳐 올 멸망과 심판에 대해 경고하고 계신데도 여전히 그 사망의 길로만 줄달음치는 사람을 볼 때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이 곧 피의 도시로 바뀌게 된다고 하는 것을 예루살렘 사람들은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성 예루살렘 성이, 그 평화로운 성 예루살렘 성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철저히 무너져 내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다 파괴되어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있지 못하게 될 것을 알고 계신 주님이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쩌다가 평화의 도시기 이렇게 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까?

그 이유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6장 2절에 보면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은혜 받을만한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자리에서 떠나있다면 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주님은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구원을 허락하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런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통곡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어떤 깨달음이 있어서 "내가 이제부터는 이렇게 하리라 저렇게 하리라" 작정을 합니다. 그런데도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차버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결과는 복 주시려고 부르셨던 주님이 안타깝게도 울며 우리를 벌하실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더란 말입니다. 마치 예루살렘 성이 철저히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다 무너져 버린다면 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래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때로는 주의 종이나 다른 성도나 이웃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이렇듯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주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는데 그래서 내 마음에 계시며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신데 그 주님을 향해서 마음 문을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음 문을 연다는 것은 곧 순종입니다.

주님이 지금 내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문을 여십시오. 마음을 여십시오. 들려주시는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깨달은 대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그런 나를 향해서 기뻐 웃으실 것입니다. 나를 지켜보시다가 이윽고 이젠 되었다 하시며 복의 물줄기를 확 터 주실 것입니다. 하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것도 하늘 보물 창고의 문을 활짝 여시게 되면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와 복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를 통해서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직접 나서서 저들을 만나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순종이 다 뭡니까? 오히려 선지자들을 잡아 죽였을 뿐 아니라 이제 예수님까지도 잡아죽이려고 눈이 벌개져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 앞에 닥칠 멸망의 바라보는 주님이 어찌 통곡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찾아와 만나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십시오. 그래서 더 이상 주님이 우리를 보시며 통곡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되었다 이제는 되었어" 말씀하시고, "너희는 부디 오늘 지나온 날들을 마음 속으로 곰곰이 돌이켜 보아라. 곳간에 씨앗이 아직 남아 있느냐? 이제까지는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나 석류나무나 올리브 나무에 열매가 맺지 않았으나, 오늘까지는 너희가 쌓아도 내가 다 불어 버렸지만,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내리겠다" 하시며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리실 수 있도록 그렇게 순종함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적을 바랍니다. 그러나 기적 중의 기적은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내가 과연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이렇듯 나를 사랑하여 주십니까? 왜 그리도 하나님이 나를 염려해 주십니까? 그런데도 이를 알지 못하고 원망하기에 바빴던 내가 아닙니까? 내가 생각하는 대로만 살아왔던 나 아닙니까? 그저 당장에 편하고 좋은 것만 찾아다녔던 내가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이 나를 보시며 통곡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그런 나를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에 나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나를 권고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순종하십시오. 당장은 힘든 것 같아도 그 길만이 살길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모든 은혜와 구원을 그리고 만복을 받아 누리는 비결입니다. 이 은혜의 자리에 이 구원의 자리에 이 만복을 누리는 자리에 순종함으로 나아가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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