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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두려움 (삼상11:1-11, 행 1:6-8, 요 14: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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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는 지금 일본의 독도 영토권 주장으로 온 국민이 격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살 수도 없는 작은 바위섬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과거 우리나라를 점령해서 억압과 약탈을 자행했던 전과가 있는 일본이기 때문에 그들의 후안무치함과 도무지 반성할 줄 모르는 침략근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토를 넘보는 그 자체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하는 책을 보면 그 마지막에 남북한이 함께 일본에 대항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의 정세가 그 소설이 현실화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일본 정부 관리가 폄하해서 말했듯이 노무현 대통령이 이 문제에 매우 강경하고 단호한 입장을 취한 것이 자기 인기 만회를 위한 3류 정치인의 제스쳐이든 어쨌든 간에 정부도 우리 땅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만은 단호해야 할 줄 압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 땅을 빼앗으려고 하는 일본의 음모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동해의 외로운 섬 독도는 이런 의미에서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 보면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향하여 진을 쳤습니다. 이것은 영토를 탐낸 도발행위였습니다. 그런데 매우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일을 당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지금 적군이 자기들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는데도 대응하는 자세가 너무 유약하고 비굴합니다.

1절 하반절에 “야베스 모든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희를 섬기리라”고 했습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굴욕적인 대응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를 살려주기만 하면 우리가 너희 종이 되어 너희를 섬기겠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뭐라고 했습니까?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타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항복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어떻게 했습니까? 무조건 항복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잃고 오늘 말씀처럼 마귀의 종이 되어 마귀를 섬기게 되어버리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모세가 바로에게 나아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로가 그 말을 들을 리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노발대발하면서 모세를 쫓아내고 이스라엘을 더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갈수록 하나님의 재앙의 강도가 치명적으로 전개되니까, 바로는 타협안을 냈습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말라”, “남자 장정들만 가라”, “짐승들은 두고 가라”는 등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일체 타협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대적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해방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는 길에도 우리 신앙의 영역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탄의 도전이 있습니다. 어떤 때 사탄은 굶주린 사자같이 달려듭니다. 그래도 겁내지 말고 물러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때 사탄은 광명한 천사의 모양으로 유혹해 옵니다. 그래도 타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디발의 아내 앞에서의 요셉처럼 믿음의 입장을 굳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약하게 나오니까 암몬의 나하스의 모욕적인 도전은 그 강도가 훨씬 높아졌습니다. 2절에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보다 더 모욕적인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현실 앞에서 야베스의 지도자들이 한 일이 있습니다. 3절 마지막 부분에 “우리를 구원할 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자기들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들은 밖에서 구원자를 찾게 됩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가 설교를 했을 때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서 부르짖기를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영혼 문제에 대하여 구원자를 찾는 외침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너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씻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날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3천명이었습니다. 이들이 최초의 교회를 이룬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어떤 문제든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할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후하게 (응답해) 주시고 꾸짖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밤중이 되어서 그들은 찬송하며 기도했습니다. 여기 “밤중”이라고 하는 말은 그때 시간도 그랬지만 그들의 상황도 밤중 같았음을 암시해 줍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낙심하거나 포기한 것이 아니라 찬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지진이 나고 감옥 터가 움직이고 죄수들의 포승이 다 풀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한 사태의 해결, 사태의 역전을 말합니다. 이것이 빌립보를 거점으로 한 유럽선교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오늘도 기도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꼭 같이 역사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야베스의 전령들이 사울이 사는 기브아에도 와서 이 소식을 전했습니다. 기브아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소리를 높여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동족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연민 때문이요, 그리고 만일 야베스가 당하면 다음 차례는 바로 자기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들에서 일하다가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어떻 처신했습니까?

6절에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사울은 이미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났을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크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자연인 사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사울이 되는 순간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다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새 사람으로서 살아야 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했으면 우리의 행위도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또 우리를 보내십니다. 즉 소명 받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여기까지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사울에게 다시 하나님의 영이 감동했습니다. 지난번의 감동이 소명의 감동이라면 이번의 감동은 사역을 위한 감동입니다. 그랬을 때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여기 “노가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입니다. 하나는 이방인이 하나님을 모욕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 사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표지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에 직면한 동족의 아픔에 대하여 동참하는 모습입니다. 이제까지는 자기만을 위해 살았으나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잘 믿는 사람은 작은 일이나 큰일에 있어서 결코 자기 이해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우”셨듯이 나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게 되고, 나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하나님 첫째, 다른 사람 둘째, 자기는 맨 꼴찌”, 이것이 우리 삶의 순서가 되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4. 그런데 여기 중요한 것은 이런 사울의 행동이 온 국민들에게 미친 영향입니다. 사울이 “누구든지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라”고 했을 때, 7절 마지막에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온 국민의 단합된 힘을 통하여 그 전쟁은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11절에 보면 “...암몬 사람들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교회의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일입니다. 임마누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힘으로 할 수 없고 능으로도 할 수 없으되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리 많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감히 그들이 당시 예루살렘도, 온 유다도, 사마리아는 물론 하물며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림하셨을 때 이 말씀은 현실이 되어졌습니다. 사도행전의 내용은 어떻게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나서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는가 그 과정을 보여줍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은 3세기를 넘기지 못해서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 12:3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께서 주님이시다’라고 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교회 되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일은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강림하시고 역사하시는 일입니다. 원래 교회는 성령 강림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고 또 확장 되었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해야할 제목은 “창조주 성령이여,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섬기면서도 거의 성령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문 밖으로 몰아내서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오늘 우리는 우리 신앙과 교회에서 성령님을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슬퍼하시고, 근심하십니다.

예수께서 고향에 가셨을 때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전능의 주님이시라도 능력을 행하실 수 없으셨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성령님을 믿지 않는다든지,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우리는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머리 깎인 삼손처럼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대한 이 불신앙과 무관심과 무례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성령님을 영접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있는 말씀처럼 성령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이 말은 성령님의 지시를 듣고, 성령님과 늘 보조를 같이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교회사를 통하여 항상 창조적인 능력으로 역사하셨던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능력으로 역사하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설교 :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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