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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 (요 4: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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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케골은 관객과 배우의 비유로 예배를 보는 자와 드리는 자로 구별하고 있습니다. 관객은 연극을 보는 자요, 배우는 연극을 드리는 자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우리가 드리는 자라면, 하나님은 보시며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관객이 아니라 배우입니다. 배우가 가져야 할 자세를 통하여 참으로 예배드리는 태도를 깨달아야 합니다. ① 배우는 늦지 않습니다. 늦으면 연극이 되지 않습니다. 예배에 늦으면 이미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보는 것입니다. ② 배우는 연극 중에 일찍 가는 법이 없습니다. 연극을 다 끝낸 후에 숙소로 돌아갑니다. 예배 중에 먼저 나가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③ 배우는 졸지 않습니다. 그러나 관객은 졸면서 봅니다. 예배시간에 조는 이는 예배를 드리는 이가 아니라 예배를 보는 이입니다. 세례 요한이 소속되어 있던 쿰란 공동체에서는 예배 시간에 조는 이에게 한 달 간 예배에 나오지 못하도록 규정을 두었답니다. ④ 배우는 관객을 만족케 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합니다. 배우의 존재 목적은 관객을 만족시키는 데 있습니다. 관객을 실망시키는 배우는 배우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는 데 최선을 다 하여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의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는 책에 보면 교인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여러 형태로 설명한 내용이 나옵니다.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는 딴생각파,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 보는 읽기파, 예배를 시작하면 졸기 시작하는 수면파,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시간절약파,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쪽지파, 예배 후에 있는 회의를 준비하는 회의파, 예배 시간에 성경 읽기로 시간을 때우는 독서파, 주위에 있는 아기에게 눈을 맞추고 아기에게 집중하는 유모파, 설교 꼬뚜리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시험채점파, 처음부터 끝까지 팔장을 낀채 예배를 구경하는 관람객파 등 천태만상의 형태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배태도는 모두가 예배를 드림이 아니라 예배를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아니면 예배가 끝나기까지 견디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종교적인 의무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를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세로 드리는 예배에 성령께서도 역사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러한 자세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1:12-13)"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예배하고 계십니까? 습관적입니까? 성경적입니까? 하나님은 예배를 보다가 돌아가는 예배 구경꾼을 찾으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배 장소인 교회를 찾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되려면,

첫째로. 하나님께 감동을 드려야 합니다

한 부부가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면서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여보! 김 집사 자동차가 3000cc로 바뀐 것 보았어요?" 라고 묻자, 남편은 "못 보았는데"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다시 아내가 "장로님 부인이 밍크 코트 입은 것 보았어요?" 라고 묻자, 남편은 "몰랐어" 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아내가 "그러면 오늘 설교할 때 목사님 넥타이가 조금 삐뚤어 진 것 보았어요?" 라고 질문하자, 남편은 "설교 듣느라고 정신 없었어" 라고 대답합니다. 아내가 열 받아 남편에게 "그러면 오늘 성가대 찬양하던 이 집사 입술이 진하게 칠하여 진 것 보았어요?" 라고 물어보자, 남편은 역시 "그것도 못 보았는데."라고 대답합니다. 열이 오를 대로 오른 아내는, "아니, 당신은 예배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을 하나도 못 보았어요? 예배 시간에 잠만 잤어요?" 라고 따져 묻자, 남편은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눈을 가리워서 눈물만 났지."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내는 예배를 보았으나 남편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는 보는 것입니까? 드리는 것입니까?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 시간에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보이고, 찬양을 인도하는 찬양 인도자가 보이고,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머리 스타일도 보이고, 목사의 넥타이가 비뚤어진 것도 보이고, 졸고 있는 앞사람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다 보면, 예배에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배에 성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은 '보이는 것' 보다 '드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최상의 존재인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하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감동을 드려야 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그에 관한 답이 히브리서 11장 4절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두 단어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와 '드림' 이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아벨이 제사를 보았다고 하지 않고,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벨과 가인의 차이점입니다. 가인과 달리, 아벨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동을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배를 보는 자가 되지 말고, 아벨처럼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환경이나 분위기나 옆 사람에게 관심을 갖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통해 감동을 드릴까' 에 관심을 가짐으로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랜트 시걸이 지은 '세계 최고의 부자 록펠러' 라는 책에 참된 예배가 어떤 것인지 실제적으로 적용한 부분이 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와 타임지의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한 저자가 "록펠러 회장님, 지금까지 회장님은 오랫동안 세계 최고의 부자로 살고 계시는데, 그렇게 성공하게 된 비결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 때에 록펠러는 "나는 부모님, 특히 어머니로부터 세 가지 신앙유산을 받은 것이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고 하면서 세 가지 신앙유산을 설명하였습니다. 첫 번째의 신앙유산은 십일조 생활이고, 두 번째로는 교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맨 앞자리에 앉아야 목사님의 설교말씀에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세 번째 신앙유산은 교회를 다닐 때 교회의 일에 순종하고,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록펠러의 신앙유산의 핵심은 참된 예배, 곧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하나님과 교제하며 생명수 샘물을 마실 수 있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란 자기 생각과 편리성에 따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진리의 말씀에 따라 예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도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찾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에 '신령' 은 '엔 퓨뉴마티' 로 '성령 안에서' 라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다음에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는 '엔 아렛데이야' 로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 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가 되려면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in spirit and in truth"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장소가 아니라 방식이 문제입니다. '어디서' 가 아니라 '어떻게' 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다. 성령이 예배가운데 역사하지 않으면 깨달음도 없고 치유도 없으며 진정한 참회와 사죄의 확신도 없습니다. 모습은 경건해도 결국은 형식을 추구하는 바리새인의 예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모습 속에서 성령이 우리가운데 임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미 죽은 예배에 익숙한 모습으로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만이 험악한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싸워 이기겠다는 결단을 가능케 하며 승리자의 모습으로 나서게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삶과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퀘이커교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에 참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예배라고 부를 만큼 순서도 내용도 제대로 되어 있지를 않더랍니다. 그 모임이 끝이 나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데 이상해서 물었답니다. "이것이 무슨 예배냐? 전통교회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데 늘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고 물었더니 "우리의 예배는 우리가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라고 하였답니다. 즉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교회의 문을 나서면서부터 실제적인 예배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예배를 교회 안에서만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의 모습과 세상에서의 삶의 태도가 완전히 다른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배와 삶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이원론적인 모습은 진정한 예배의 태도가 아닙니다.

참된 예배의 삶은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을 만나 지금까지 소중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변하게 합니다. 예배를 통해 주신 기쁨과 감격을 전하게 됩니다. 내게 주신 영생의 소망을 선포하게 됩니다. "와 보라, 내가 어떻게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는가를 보라" 고 전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서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의 '항상' 은 'continually’라는 단어로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줄곧 쉬지 않고' 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교회에서만 드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집에 있을 때나, 학교에 있을 때나, 직장에 있을 때나, 계속적으로 예배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이 예배이나 가장 미워하시는 것도 예배일 수 있습니다. 예배의 정신대로 살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경멸하십니다. 하나님의 초점은 예배드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장소도 상관없습니다. 숫자도 상관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참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예배, 성령과 말씀으로 인도되는 예배, 그리고 삶과 연결되어지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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