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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수사랑 (마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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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배웠던 복수와 희생에 대한 말씀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다보면 원치 않게 폭력이나 금력이나 권력으로 인해 해를 입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 개인적으로 복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한 가지 목표 즉, 그 나라와 의를 위해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따라서 원수에 대한 태도도 독특합니다.

레위기 19:18절에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시편에는 원수를 저주하는 듯 보이는 시가 있지만, 이는 개인적인 원수 갚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에 의탁하는 시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율법을 가르친 후에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특이한 말을 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는 말입니다. 줄곧 율법만을 말하던 그의 입에서 갑자기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율법의 결국이 사랑이라는 것을 잘 말해줍니다. 사랑이 없이는 율법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모세는 잘 알았습니다. 마가복음 9:29-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나중에 모든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43)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유대인은 이웃으로 여겼고, 이방인은 원수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이방인들을 ‘개나 죄인’처럼 여기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잘 순종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당시 경건한 생활을 추구했던 쿰란 공동체 사람들조차 공동체 내의 사람은 사랑하고 외부사람은 미워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4) ‘원수’는 내게 지독하게 해를 끼쳐서 가장 밉고 싫은 대상을 의미합니다. 내가 가는 길마다 장애물을 놓고, 내가 하는 일마다 훼방하며 감정적으로든 행동으로든 적극적으로 대적해서 곤란하고 괴롭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눈에 가시처럼 늘 고통을 주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분노하거나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간음도 이혼도 없을 것이고, 사랑한다면 거짓 맹세도 복수도 없을 것입니다. 율법이 본래 의도했던 것, 그리고 그것이 목적했던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의 원래 정신을 성취하시며 율법이 목표로 최고의 수준까지 확장시키셨습니다.

이 말씀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먼저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야고보서 4:7절을 보면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가장 큰 원수는 사단이며 이보다 더 큰 원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또 요한일서 2:15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속을 말합니다. 세속적인 것도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지, ‘원수 짓’을 사랑하라고 하지는 않으셨음을 분명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원수라는 그 존재는 사랑하되 원수 되게 하는 죄까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표현 중 하나는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의 외식에 대해서는 무섭게 책망하시고 화를 선언하셨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비록 원수 짓을 해도 그의 생명 자체는 여전히 고귀하며, 그 존재 자체는 여전히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냉정하게 ‘원수’와 ‘원수 짓’을 분별해서 대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는 짓이 미우면 그 사람도 미워지기 때문입니다. 가끔 아내가 남편이나 자식을 보고 ‘아이고! 이 웬수’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수’가 사랑이 전혀 없는 마음이라면, ‘웬수’는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습니다. 사전적으로 따지자면 사투리에 불과하지만 웬수라는 말 속에는 그들이 하는 짓은 미워도 그 존재에 대해서는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 있습니다. ‘애증(愛憎)’이라고 해서 사랑의 감정과 미움의 감정이 동시에 담겨 있는 표현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는 이 애증의 관계보다 더 나아갑니다. 예수님은 조건 없는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웬수’에는 원래 사랑하던 존재에 대한 사랑의 축소가 있지만, ‘원수사랑’에는 원래부터 사랑할 수 없는 존재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의 확장이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언제나 감정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한 태도로 나타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오래참고 온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 중 누구도 구원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며 살았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멸시와 미움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고,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시고, 그 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은혜를 입은 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하게 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고 온유하십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5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나님의 일반은총은 신분에 따라 차별이 없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백성에게도 해를 비춰주시고 자기를 거역하는 자에게도 비를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행동에 따라 더 주시거나 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노력이나 행동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은 사랑을 베풀 때에 다른 사람의 행동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이라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고 했습니다. 원수를 축복하며 기도하는 것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요한이가 앉아 있는 모습이나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를 쏙 빼닮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식은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면 더욱 닮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서로 닮아갑니다. 제자는 존경하는 스승을 닮아 가고, 성도는 존경하는 목회자를 닮아갑니다. 사랑하고 존경할수록 모든 부분에서 닮아간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또한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모든 면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복수를 거부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삶에 점차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 그의 감정이나 태도를 결정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나를 화나게 하면 화내고, 나를 멸시하면 함께 멸시하고, 나에게 잘해주면 좋아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이나 악인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목회자가 잘 해주면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하면서, 목회자가 별로 관심을 가져주지 않거나 못마땅하면 신앙생활 대충하는 자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사는 사람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 옛 사람의 삶은 대체로 손해를 보면 복수하고, 유익을 얻으면 되갚는 소박한 정의에 기초한 삶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에 따라 반응하는 형태가 결정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행위를 지배한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이 그를 좌우해야합니다. 그래서 그는 악인이나 불신자들보다 ‘더 나은’ 측면을 가져야 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6-47)

4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려고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내게 대하든지, 다른 사람이 아무리 못마땅하든 내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묵묵히 사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온전하게 이런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아적인 태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변명하거나,  다른 성도보다 조금 더 낫다고 해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닮고자하는 마음 자세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원수는 정해져 있지 않고 수시로 변합니다. 정답던 이웃이나 동료가 하루아침에 원수같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판에서는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동료로 변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지탄 받을 만한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려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셔서 이러한 사랑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  (설교 :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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