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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연극과 은밀함 (마 6:1-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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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은 ‘의’를 행하는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1-18절은 종교적 행위를 중심으로 기술했습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있어서 잘못된 태도를 먼저 지적한 후에 바른 태도를 제시하는 세 쌍의 균형 잡힌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1절을 봅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아무리 경건한 행위도 ‘동기’가 바르지 못하면 외식이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어떤 행동을 하지 말도록 금하셨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전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6:15절에서는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모든 행실은 ‘하나님 앞에서’ 행할 때라야 의미가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에, 회당이나 거리에서 작은 은나팔을 불어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면 구제품을 나누어주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사람의 영광을 얻으려는’ 동기가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외식자’라는 단어는 고전 헬라어에서 ‘배우’를 의미했습니다. 은밀하지 않은 구제는 진정한 선행이 아니라 연극 연출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에 철저히 은밀성을 유지할 것을 과장법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3-4)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은 은밀한 선행입니다. 사람들은 몰라주고 역사는 기억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모두 기억하고 계셨다가 갚아주십니다.

은밀하게 행하지 않는 모든 경건생활은 ‘과시적’인 것이고, 나발을 부는 행위입니다. ‘남의 칭찬과 갈채’를 바라고 선행을 행하는 것은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 명예를 얻으려는 연극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이미 사람의 관심과 칭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 받을 것이 없습니다.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은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려 하기 때문에 자기의 선행에 대해 나발을 불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은밀히 구제할 때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모두 갚아 주십니다. 나발을 부는 것이 사람 앞에서는 화려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망하는 길입니다.

외식은 경건해야 할 기도 시간에도 틈탈 수 있습니다. 5절을 보면,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도시간에 맞추어 기도하기 위함이었고, 민중들을 교육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의 의도는 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이상의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 청중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나 자신이나 상황에 몰두하던 관심을 돌려 하나님께 집중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간마저 교묘한 외식으로 변질될 위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기도 잘한다는 칭찬을 위해서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신에 대한 흐뭇한 만족감 때문에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드라마틱한 기도를 통해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려거나, 운명 교향곡 같은 기도로 양심을 찔리게 하는 대표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개인 기도보다 공중 기도를 더 간절하고 길게 하고 있다면 그에게는 외식적인 성향이 다분히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도는 결국 사람께 보이려고 했다는 점에서 잘못되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전 존재는 하나님께만 몰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기타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는 대중 앞에서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비판하신 것은 기도 장소나 기도하는 외적인 자세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눈을 감는 이유는 시각적인 것으로 방해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조용한 장소를 찾는 것은 청각적으로 방해받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골방’은 오직 하나님께 몰두하기 위한 환경을 말합니다. 골방기도는 어디서나 ‘마음의 밀실’을 준비하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기도입니다. 대중기도도 청중들을 의식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바른 기도생활을 위해서는 기독교의 기도가 이교도의 기도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이교적 기도의 가장 큰 특징은 중언부언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라는 노력과 정성을 통해서 신을 감동시키고, 그 공로로 응답을 받고자 합니다. 기도의 효력이 기도의 분량이나 특이한 자세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말을 많이 반복하고 유창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기도는 기독교인의 기도가 아닙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점지해 주십시오’하며 매일 새벽 정결하게 목욕하고 정한수 떠놓고 빌었던 조상들이 있었습니다. 삼천 번을 절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신을 감동시키려는 기도는 이교도의 기도 방식입니다. 기독교인들 중에서 기도 대상을 신령이나 부처에게서 하나님께로 바꾸었지만, 기도방식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도는 기도의 분량이나 어떤 자세로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그 결과로 무엇을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사정을 잘 모르시는 하나님께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께 독촉장을 보내서 귀찮아서라도 응답하게끔 유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온 밤을 지새우며 먹지도 않고 몸을 괴롭게 하면 기도발이 훨씬 잘 먹힌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이교도적인 생각입니다. 정한 기도시간의 분량을 채워야만 응답될 것 같이 애쓰는 것도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기독교인의 기도는 하나님과 둘이서만 나누는 친밀한 ‘교제’입니다. 일방적인 간청이 아니라 하나님과 밀어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무엇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수단이며 교제 자체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기도는 마치 아이가 사랑하는 아빠와 교제의 시간을 가지는 것과 같습니다. 아빠를 사랑하는 아이는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을 원합니다. 사랑하는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고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교제하면서 필요한 것을 말하면 아빠는 듣습니다. 아이가 비록 유창하거나 조리 있게 표현하지 못해도 아빠는 아이의 필요와 마음을 충분히 압니다. 잊어버리고 구하지 않았어도 아빠는 아이의 필요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빠와 함께 하는 동안 아이는 점점 아빠의 생각과 모습과 행동이 닮아갑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교제하는 방식은 꼭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무릎을 꿇어야 하느냐, 눈을 감아야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향에 따라 이렇게도 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쓴 「고백록」은 전체가 기도이면서 어떤 논문보다 더 깊이가 있습니다. 그는 책상에 않아 글을 쓰면서도 자신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 시간을 얼마나 해야 하는가도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아이가 아빠와 함께 있고 싶어 하지 않고, 만나는 시간을 괴로워하고, 만나면 곧 지겨워져서 빨리 그 자리를 일어서고 싶어 한다면 그 아이와 아빠의 관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시간이 괴롭고 지겹고 힘들기만 하다면 연약한 의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바른 사람은 여건상 교제할 시간이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대로 즐겁게 교제의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기도를 잘했는지 아닌지는 기도시간과 유창한 정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 사람의 성품이 얼마나 하나님을 닮아 가느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기도 많이 한다며 자랑하고 으스대거나 기도시간이 짧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바르게 기도한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바르게 기도한 사람은 기도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갑니다.

금식에서도 외식할 수 있습니다. 원래 ‘금식’은 정당한 욕망까지도 절제해서 하나님께만 집중하려는 자기 부정의 행동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 된 욕망은 철저한 ‘자기 부정’을 위한 금식마저도 ‘자기 과시’의 도구로 변질시킬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면서 슬픈 기색을 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하셨습니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는 것은 일상적인 활동입니다. 즉, 금식을 하더라도 티를 내지 말고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참 된 금식은 될 수 있는 한 다른 사람이 몰라야 합니다. 40일 금식 몇 번했느냐가 경건생활의 경력으로 기록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됩니다.

우리의 행실이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한 연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하며 빵점짜리 신앙입니다. 그렇다고 외식이 두려워서 아무런 경건생활도 하지 않거나 세상에서 은둔하려는 태도도 정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 결과로서 사랑들로부터도 칭찬 받는 삶을 되어야 하지만, 칭찬받기 위해서 신앙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마음의 동기는 무시하고 행동에만 관심을 가지면 연극이 됩니다.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은밀히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행한 모든 일을 갚아주실 줄 믿습니다. ♥ (설교 :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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