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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29) "훼방자를 충성된 증인으로 (딤전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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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 중의 하나가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이름이 바뀌어지고 운명이 바뀌어지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기질이 바뀌어지고 사람됨이 바뀌어지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므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고 시몬이 베드로가 되었고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이름이 바뀌어졌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과 기질과 사람됨이 바뀌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사람이 타고난 기질이 완전히 바뀌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므로 우리의 운명과 기질과 사람됨이 바뀌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기 전 자기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자기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13).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웃고 비아냥 거리고 무시하고 방해하는 사람을 가리켜 훼방 놓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훼방 놓고 사람들을 훼방 놓던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훼방자에 그치지 않았고 핍박자와 포행자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했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포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존재와 삶이 바뀌어졌습니다. 사역이 바뀌어졌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2).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10).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그렇게 바뀌어졌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사울은 예수의 증인이 되었고 예수의 종이 되었고 예수의 사도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의 종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빌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고후1:1).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4:5). 오늘 아침 사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울에게 세 가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 사울은 분노와 증오의 사람으로부터 용서와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행9:1에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살기가 등등’했다고 했습니다. 살기가 등등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사울의 손에는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포행자의 핏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7:58). 사울은 분노의 사람이었고 증오의 사람이었고 살기가 등등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독기는 그의 유전적 기질로부터 왔을 수도 있고 그의 잘못된 종교로부터 왔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분노와 증오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분노와 증오는 가정 안에도 있고, 직장 안에도 있고, 정치권 안에도 있고, 교계 안에도 있습니다. 일본이나 북한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물론 심지어는 미국에 대한 분노와 증오도 존재합니다. 사실 인간은 본래 분노와 증오의 존재였습니다. 아벨에 대한 가인의 감정이 바로 분노와 증오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죄가 네 문에 엎드리니라 가인이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창6,8).

사울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나므로 그의 운명이 바뀌어졌고 그의 기질이 바뀌어졌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 라고 질문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사울은 그 자리에 쓸어지고 말았습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라고 부르짖으며 항복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의 운명과 기질이 바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벤허가 십자가의 주님 앞에 섰을 때 그가 가슴에 품고 다니던 증오의 칼이 부서지고 만 것처럼, 사울이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가 가슴에 지니고 있던 분노와 증오의 불길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고 고백했고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 움직이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3,14).

  사울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무시하고 멸시하던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부터는 이방인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인종과 문화와 종교를 초월했습니다. 이방인 중에서도 희랍의 온갖 잡신들을 섬기던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고린도의 성도들을 향해서 그의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고후12:15).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을 부를 때마다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불렀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고전10:14).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고전15:58). 그는 빌립보에 살던 이방인 성도들을 향해서도 그의 뜨거운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빌2:12).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4:1). “내가 너희를 위하여 나의 피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빌2:17). 그는 데살로니가에 살던 이방인 성도들을 향해서도 그의 뜨거운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에 사랑이 넘치게 하라”(살전3:12).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살전2:17).

  사도 바울은 그 당시 반 기독교 세력의 심장부였던 로마에 살던 이방인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1:7).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19,20). 결국 사도 바울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실천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었고 그리고 그렇게 살라고 이방인 성도들을 권면하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고에 빛나는 사랑의 노래와 사랑의 시를 써서 우리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4-13).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분노와 증오의 사람으로부터 용서와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둘째 사울은 자랑과 교만의 사람으로부터 겸손과 복종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빌3장에 보면 사울은 가문과 혈통과 종교와 율법의 의 등을 자랑하던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4-6).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그의 신비한 종교적 체험 때문에 그 신비한 체험을 자랑하는 교만한 사람이 될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자랑과 교만의 사람으로부터 겸손과 복종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자랑과 교만을 쳐서 무너뜨리기 위해서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12:5,7).

  사울은 본래부터 자랑하고 교만할 수 밖에 없었던 기질과 환경을 지니고 살던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은혜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자랑하고 교만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자랑과 교만의 사람으로부터 겸손과 복종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날 자랑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 즉 똥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8). 결국 사도 바울은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을 자랑하고 기뻐하게 되었고 자기를 만물의 찌끼로 표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4:13).

  결국 사도 바울은 지배의 사람으로부터 복종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19-22,27).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자랑과 교만의 사람으로부터 겸손과 복종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셋째 사울은 안일과 안주의 사람으로부터 고난과 수고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사울을 안일과 안주의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러나 사울은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그곳에서 잠간 동안 박해를 받은 일은 있었지만 10여년 이상 아라비아와 다소에 조용히 머물고 있었습니다. 다소는 사울의 고향이었는데 사울은 다소에 8년 동안 머물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에 머물면서 안정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들이 고향에 머무는 것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모두 고향을 떠나라고 분부했습니다. 증인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고난과 수고를 감수하면서 세계 곳곳으로 달려가라고 분부했습니다.

  다소에 머물고 있던 사울을 바나바가 찾아와서 그를 데리고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일년동안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성령께서 사울과 바나바에게 그곳을 떠나 다시 세계로 달려가라고 분부했습니다. 증인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안디옥을 떠나 고난과 수고를 감수하면서 세계 곳곳으로 달려가라고 분부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2,3). 그때부터 사울은 고난과 수고를 몸에 짊어지고 세계 곳곳으로 달려가는 증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울로부터 바울이 되었고 신자로부터 사도로 바뀌어졌습니다. 안일과 안주의 사람으로부터 고난과 수고의 사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는 마게도냐와 로마와 땅끝까지 달려가는 예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수고를 몸에 짊어졌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의 삶을 가장 잘 묘사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 단어는 고난과 수고일 것입니다. 예수의 증인에게 요구되는 필수적인 장비는 고난과 수고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아마 많은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불행한 사람으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의 평안이나 즐거움이나 향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수고와 고난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삶을 가장 축복 받은 삶으로 인정했고 가장 영광스러운 삶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찬양했습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7,8).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이름이 바뀌어지고 운명이 바뀌어지고 기질이 바뀌어지고 사람됨이 바뀌어지고 삶이 바뀌어지고 사역이 바뀌어지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사울에게 이와 같은 변화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주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의 뒤를 이은 수 많은 사람들도 이와 같은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기풍 목사님, 길선주 목사님, 최권능 목사님도 모두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고난과 수고를 몸에 짊어지고 한 평생을 달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은혜와 사랑을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도 변화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용서와 사랑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겸손과 복종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과 수고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면서 한 평생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 :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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