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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는 교회 (행 9: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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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슬럼가에서 태어나 1973년 24세에 헤비급 세계 참피언을 획득하고
40연승의 기록을 세운 조지 포먼이라는 흑인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뒤 무하마드 알리에게 챔피언 벨트를 내어 주고는
은퇴 10년 만에 권투계 다시 복귀를 선언합니다,
그래서 다시 45세에 최고령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권투계의 신화로 불리는 조지 포먼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먼이 왜 다시 권투를 시작했는지 그 이유를 잘 모릅니다.
포먼은 흑인 빈민가에 태어나 청소년 시절,
대단히 난폭하고 성미가 고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예수님이 그의 인생에 들어온 이후
그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포먼은 건방지고 불량한 사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포먼은 목사가 되어 복음전도자로 특히 청소년 가정사역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돈으로 교회 건물을 지었고
그 다음에는 거리에서 마약과 범죄로 떠도는
청소년들을 복음으로 선도하고자 청소년 회관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일을 시작한 포먼에게는
그 복음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재정적 지원이 더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포먼은 자기에게 있는 실력과 기술을 다시 사용하여
권투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던,
포먼이 권투에 재도전한 이유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 진정한 승리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일이다 ] 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먹 챔피언이 예수 챔피언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울이란 인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박해에 챔피언이었던 청년이
이제 예수 챔피언이 되기 위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행9장에 들어오면서 사울의 변화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어떻게 이런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사울의 생애에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개입된 역사는 새로운 역사입니다.
사울의 생애에 새로운 삶을 이끌고 나가시는 예수님의 손길에 우리도 붙들려지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울의 생애에 개입한 예수님은 <2>
사울을 어떻게 훈련시키시는가? 를 살펴보면

23절에 [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하더니 ]
사울은 이제 핍박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도 죽이려고 하는 세력이 나타나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를 합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되려 핍박을 받게 됩니다.
예수 믿는 자를 죽이려고 하던 자가 되려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사울이 변해도 확실하게 변하고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의 행적에 생략된 부분을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1:16-17절에 보면
[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
예수님 만나 변화의 체험을 한 사울은 먼저 아라비아로 갑니다.
사울에게는 아라비아로 가 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먼저 사도된 자들과도 의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사울의 신상에 변화가 일어났는데
제일 먼저 의논해야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혈육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혈육은 혹 사역에 방해 받을까? 의논하지 아니했다고 합시다.
영적인 일이라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의논하고
멘토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역시 사도들과도 만나지를 아니했습니다.
물론 사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사울이 아라비아에서 약 3년 동안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하여 훈련받은 기간으로 봅니다.
이것은 주님의 공생애 시작에 40일 동안 마귀와 싸우기 위하여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다림의 시간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되어지기 위해서
아라비아의 3년이란 연단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체험하고 은혜 받으면
바로 주의 일한다고 나섭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이 되고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말씀을 준비하다고 보니 <3>
하나님의 계획은 내게도 동일하였구나 확신이 되는것 있지요.
은혜 받고 신학교 가고 시골교회 개척을 하였는데
그때는 겁나는 것이 없어요, 안되는 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몸에 병이 들어 1년 6개월 가량 투병생활을 하는데
그때는 지긋지긋 했지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사울의 아라비아 3년 과정이었습니다.
저도 1년 6개월이 아니라 3년 과정을 거쳤으면
지금보다 더 성숙한 사역을 하지 않아겠나 싶어요.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여러분 ~!
예수 믿고 은혜 받았다고 다 된 것은 아닙니다.
길게 또는 짧게 연단의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에 주님과 더 깊은 교제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기간 더 깊은 영성을 갖추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길이 자꾸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꼭 가야하는데, 그것도 빨리 가야하는데
다 된 것 같았다가도 마지막 도장 하나가 안 찍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인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더 훈련 받아야 하고 더 준비되어야 한다고 보내는
하나님의 사인으로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시련의 기간이 끝났다고 해서
금방 눈앞에 고속도로가 펼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왔는데
23절에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하고
24절에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킵니다.
어떻게 보면 사울의 아라비아 3년의 훈련은
다가오는 고난을 이기기 위한 하나님의 노하우를 깨닫기 위한
하나님의 최고경영자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면서 무엇 때문에 갈등을 느낍니까?
분명히 성령체험도 했고 예수 잘 믿어 보려고 하는데
왜? 삶은 더 꼬이는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 신앙은
고난을 통해 성장해 나가고 뻗어나가는구나
그러니 눈앞에 어려움이 다가왔다고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훈련기간이요 공사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4>
사방이 깜깜해지면 하나님이 구원의 창문을 여신다는 것입니다.

25절 보세요
[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내리니라 ]
이 사실을 고후11:32절 이하에
[ 다메섹에서 아레다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
그러니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세력이
단순히 개인적으로 사울에게 감정이 있어 핍박하고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다메섹 왕의 명령을 받고 방백이 군사를 풀어 사울을 잡으려고
조직적으로 성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끝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인생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사람에게는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합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니 아니합니다.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
사방이 깜깜해지면 하늘에 별 빛이 보이듯이
하늘 문 열려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구원의 들창문을 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나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던
유명한 유대인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글에 보면
감옥 안에서 너무 혹독한 고통으로 죄수들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프랭클이 보니 사람들이 고통으로 죽는 것보다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절망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 형제 여러분 저 조그마한 창이 보이지 않습니까? ]
한 죄수가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 창 너머 봐야 희색 담벼락 밖에 더 없지 않소 ]
[ 아니 그 희색 담벼락 넘어 푸른 하늘을 보십시오
밤에도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십시오 ]
우리는 현실의 차거운 벽만 바라보지 말고
현실을 넘어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구원의 들창문을 통해 하늘을 보고 희망을 보시기 바랍니다.

고난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한 번 더 간증하겠습니다.
병이 회복된 후 전도사 사역지를 구하는데 사역할 자리가 없어요.
얼마나 길이 안 열렸으면 장사하러 가려고 했겠습니까?
그러니 하도 답답해서 당시 대구에서는 제일 신령하다고 소문난 <5>
서부교회 김 덕신 목사님을 찾아 갔어요.
그런데 김 목사님이 어떻게 나를 잘 보셨는지
지금 부목사가 미국 유학 가려고 하는데 나가면 너 데릴테니
기도원에 기도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연락할게, 그래요.
저는 그때 찬231절4절 가사, 세상 고생 모두 잊어버리리
전에 찬송가는 세상 고생 꿈에 본들 잊어리
그러면 그렇지 내가 지금 얼마나 기도하고 기다려왔는데...
그래서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기다리는데 두 달쯤 있으니
김 덕신 목사님 서부교회에서 동부교회로 갔다는 거예요.
세상이 캄캄해지는 것 있지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그때부터 하늘문 열리는데 온갖 신령한 은혜를 보여줍니다.
저는 우리교회 이 장동 교회부지가
1976년 2월 어느 날 환상 중에 하나님이 보여준 약속의 땅입니다.
그리고 교회 이름도 개복교회라고 해요. 복을 여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어느 날 택시를 타고 교회 오는데 가까이 와서 교회 앞에 세워 달라고 하니
택시기사 왈 [ 세상에 머리 어지간히 안 돌아가는 사람도 있지
여기는 절 세울 때지 우예 교회 세울때인가? ] 그래요.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준 약속의 땅인데 어떻합니까?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여러분
내게도 사방이 캄캄해지면 구원의 들창문이 열려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다메섹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길로 예루살렘에 올라와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교인들의 표정이 영 아닙니다.
26절 [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
그도 그럴 것이 기독교를 핍박하는데 챔피언이었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 만나 꺼꾸러졌다는 소문은 들었지마는
어디가 있다가 불쑥 나타나 손을 내미니
예루살렘 교인들이 쉽게 손을 내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두려워하며 사울의 변화를 믿어 주지 아니했습니다.
이때 굉장히 고마운 사람이 나타납니다.
27절에 그 이름은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에 대해 다메섹에서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전한 사람이라고 하며 바울을 변호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바나바는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었겠습니까?
아마 사울에게는 눈물날 정도로 고마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차라리 외부에서 당하는 <6>
핍박이나 멸시 또는 불신은 그래도 이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교인들 나아가 직분자 그리고 교역자로부터
혹 멸시나 불신 당하면 이건 참 견디기 힘든 시험인 것 있지요
그러나 교회 가운데는 항상 바나바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불신하고 시험주는 교인 보고 신앙생활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예비한 나의 바나바를 보고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바나바가 어떤 사람입니까?
행4:36절에 본래는 요셉이었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이 은혜 받아 유무상통할 때
밭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이름하여 바나바라는 별명을 부쳐 준 것입니다.
본래 요셉이란 뛰어난 사람, 개성있는 사람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 이름인데
사도들이 요셉을 바나바라고 한 것은
특히 남을 배려하는 영적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에
바나바, 즉 돕는자, 위로하는 자, 별명을 부쳐준 것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 얼마나 개성있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은 바로 바나바같이
돕는 자, 위로할 줄 아는 자인 것입니다.
영국 성경학자 <바클레이>는 바나바를 가리켜
[ 최선의 사람, 바나바 ] 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울을 아직 못 미더운 사람이었지만
바나바는 사울을 믿을만한 사람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바나바의 중보로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교제하며
그곳에서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전하며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작심을 하니
형제들이 사울을 가이사랴로 해서 고향 다소로 보냅니다.

사울이 바나바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니
또 핍박이 생기게 됩니다.
복음을 위해 살려고 하면 핍박이나 환난이 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되는 곳에 나타나는 공식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동기가 무엇인가 하면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 변론은 행6:9절에 스데반이 어떤 자들과 변론했다고 할 때 같은 말입니다.
참 아이러니칼 하지요. <7>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이 목도했던 스데반의 죽음의 자리에
마땅히 여겼던 사울이 이제는 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오묘합니다.
사울이 그 자리에 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내가 그 자리에 서고 내 자식이 그 자리에 설 줄 누가 알겠습니까?

저도 이런 경험이 있어요.
신학교 들어가기 전 은혜를 받고
그 때 제 마음에 한 가지 자기원칙이 있었습니다.
우리 목사님 보다 내가 기도 더 많이 해야지.
지금 생각해 보면 목사님 저 때문에 신경 많이 썼겠다 싶어요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도 우리 목사님 목회 원칙이
새벽기도 때 제일 오래 기도하는 것 아니었나 싶어요.
그런데 김 선생이 따라 붙어가 일어나야지요.
한 번은 목사님이 먼저 일어나요.
그래서 할렐루야 오늘은 내가 이겼다 싶은데
예배당 문을 나서니 변두리 개척교회라서 그렇지요.
목사님이 재래식 정낭, 똥장군에 퍼 담아 나르고 있어요.
예이~! 목사님이 정낭을 치우고 있어,
시간 있으면 기도할력이지 투덜투덜하며 왔어요.
그런데요 제가 시골교회 전도사로 개척교회를 하면서
하루는 교회 정낭이 넘치는 것 있지요. 어떻합니까? 제가 퍼 날랐지요,
그때 제 마음에 [ 꼴좋다, 니도 별 수 없네 ] 그래서 회개했어요.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여러분 !
혹 교회 생활 신앙생활 하다가 비난하고 비판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나를 그 자리에 세우신다는 것 잊지 마세요.

스데반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그리고 다소로 오게 됩니다.
다소는 사울의 고향입니다. 원위치로 돌아온 것입니다.
다소에 출생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레니즘을 경험했고 로망틱을 경험했고 히브리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얻은 것이라곤 예수님 만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최고의 것을 얻은 것입니다.
어떤 경험 어떤 지식 어떤 만남 보다
예수님 만남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새로운 세계가 열려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은 스데반을 순교의 자리에 있게 하시고 <8>
사울이라는 청년을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다메섹으로 예루살렘으로
끌고 다니며 시련을 당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기 위함인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교인들이 서울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광주로
또는 외국으로 이민을 갑니다.
왜 옮겨가면 삶니까?
우리 민족은 6촌 8촌까지 옹기종기 모여 아재요 아지매요 하면서
모여 살아야 살맛을 느끼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왜 이리 저리 이사를 가서 살고 심지어 이민을 가서 삽니까?
여기에는 선교적 깊은 비밀이 있습니다.
이걸 모르는 교인은 직장 따라 직업따라 형편 따라 옮겨온 것 같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교의 계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어디에 가더라도
마치 유대인들이 세계 어디에 흩어지더라도 회당을 세우듯이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섬기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사울의 발걸음을 다메섹 아라비아 예루살렘 다소로 옮기는데는
하나님의 선교적 계획이 있습니다. 31절이 바로 그 계획을 말해 줍니다.

[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
여기에 그리하여 라는 접속사는
앞에 스데반의 순교와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
나아가 사울의 변화와 핍박의 사건, 이러한 사건들로 인하여 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어떤 고난과 위기와 핍박의 발자취 가운데도 하나님의 섭리는
약속대로 성취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세워 나가는 교회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세우시는 이상적 교회상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바로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입니다.
31절 [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
이 평안은 내적인 평안입니다.
초대교회 만큼 외적인 환난과 핍박이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초대교회는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였습니다.
평안 - 내적인 건강이지요
든든히 서가는 교회는 외적인 건강한 교회입니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건강한 교회 <9>
건강하면 외부의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도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 -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있으면 됩니다.
주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주를 경외할 때 성령의 위로는 항상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만 있다면 교회는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위로,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는 교회와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작가 < 앤도 슈샤꾸 >의 침묵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도꾸까와 막부 시대에 예수 믿는 사람 배교시키는 방법으로
<후미애> 라는 것을 고안했습니다.
<후미애>란 동판으로 만든 예수님 상을 나무에 붙인 것으로
그것을 밟고 가면 살려주는 것입니다.
이런 도꾸까와 시대의 핍박을 살피려 예수회 <로드리고>신부가 파견되었는데
그도 체포되어 후미애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동판에 새겨진 예수는 본국에서 보던 승리자 예수가 아니라
배교자에 의해 밟혀서 찌그러진 고통 받는 예수였습니다.
그럴 때 로드리그 신부가 외칩니다.
[ 주여 나는 당신이 언제까지 이렇게 침묵하는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 내가 침묵한 것이 아니라 너와 함께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
그렇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침묵하시는 곳이 아니라
함께 괴로워하며 위로하시는 곳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주여 라고 외치며 간구하지만
때로는 침묵 속에 주의 위로를 받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항상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나갑니다.
주의 위로를 바라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성령의 위로란 성령의 후원이란 말입니다.
성령의 후원받아 나아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이 백 그라운드가 되는 내일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2005-05-29  (/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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