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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최후의 기도 (요 1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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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항상 우리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비장하게 만들기도 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최후>라는 단어인데요, 그렇습니다. <최후>, 곧 <마지막>이란 단어는 항상 안타까움과 비장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생태계가 계속 이렇게 파괴된다면 머지않아 인류 최후의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라는 최후통첩과 같은 경고성 기사를 읽을 때면, 우리 마음은 안타까움과 비장함을 넘어 두려움과 긴박감을 느끼곤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최후>라는 단어, 잠자고 있던 우리의 마음을 일순간 일깨워주는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이 내 생애 최후의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우린 <최고로 경건하고 진지하게>, 그리고 <최고로 아름답고 멋지게>, 그렇게 <후회 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오늘 하루를 보낼 것입니다.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을 종말론적 신앙이라고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종말론적 신앙은 항상 오늘 여기에서의 윤리적 삶으로 이어집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의 말씀을 조금은 더 특별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리스도 최후의 설교와 또한 그리스도 최후의 기도를 듣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은 <그리스도 최후의 기도>를 함께 듣고 배우며,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2
13:1 / (읽기) / 아하, 우리 예수님, 때가 이르렀다는 사실을 먼저 아셨군요. 이제 곧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곧 죽게 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제 곧 내 인생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하신 우리 주님, 오히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곧 죽을 것이니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여 끝까지 사랑하자!>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명령 하나를 받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다가올수록 세상에 있는 내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죽을 때까지, 끝까지 사랑하라는 명령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정녕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예감할수록, 내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내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뒤집으면, 이제 나 죽는다고 호들갑 떨 것 없다는 겁니다. 사람이면 한번 죽은 것이 정한 이치인 것을, 마치 자기 혼자만 죽는 것처럼,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아니, 죽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았으면, 어서 마지막 힘을 다하여 못다 한 사랑을 하라는 겁니다. 나에게 맡겨 주신 내 사람들을 사랑하되 내 힘이 소진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끝까지 사랑만 하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직전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신 사랑법입니다.

혹시 이제 곧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이제 때가 온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시되 이 세사에 있는 내 사람들을 먼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전에 해야 할 일, 내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일입니다.

# 3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 세상에 남겨 두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려니, 우리 주님의 마음이 편안하질 못하셨습니다. 아직 때도 분별할 줄 모르는 제자들,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이 길이 어떤 길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제자들, 저들을 세상에 놓고 가자니 불안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했습니다. 해서 우리 주님, 저들에게 애정을 담아 마지막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내용이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16장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줄거리만 추려보면 이렇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선 우리 주님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14장에선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하시면서 내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시행해 주시겠노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15장에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시면서 너희가 내 안에 붙어있기만 하면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해 주시겠다 축복해 주셨습니다. 16장에선 마침내 내가 세상을 이기었으니 너희도 담대 하라 격려해 주시며, 하늘의 기쁨과 평강을 마지막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렇게 귀한 마지막 설교 말씀을 주신 다음, 우리 주님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최후의 기도인데요, 그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지요, 이 기도는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지는데요, 첫째 부분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요(1-5절), 둘째 부분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며(6-19절), 마지막 셋째 부분은 장차 지상에 세워질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기도(20-26절)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기도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대목이기도 한데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최후의 기도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 4
17장 1절을 보니, <우리 예수님,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옵니다!>라고 고백하십니다. 거기 중간에 <아버지여!>라는 단어에 먼저 동그라미 표시하시고요, 그런데요, 아버지라는 단어가 거의 모든 구절에 나오는군요. 2절에 아버지, 4절에 아버지, 5절에 아버지, 6절에 아버지, 7절에 아버지, 8절에 아버지, 9절에 아버지, 10절에는 아버지가 두 번, 11절에는 아버지가 세 번이나 나오는군요. 그랬습니다. 그리스도 최후의 기도는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 역시 아버지께 드리는 아들과 딸의 기도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드리는 기도, 아버지께 드리는 자녀의 기도이어야 합니다. 해서 기도가 막혀 잘 나오지 않을 땐 <아버지!>만을 계속 불러 아뢰어도 좋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문제는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지요. 그렇습니다.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선 아들과 딸의 자리를 끝까지 잘 지켜야 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우리 주님, 아버지를 부르신 직후, 때가 이르렀음을 잘 알고 있다고 다시 고백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 최후의 기도는 때를 분별할 줄 아는 기도였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드리는 기도 역시 때를 분별할 줄 아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이 마지막 때인 것을 알고 드리는 기도여야 합니다. 시쳇말로 때가 어느 땐데 엉뚱한 말로 중언부언 할 수 없습니다. 때가 어느 땐데 기도는 하지 않고 딴청을 부릴 수도 더더욱 없는 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드리는 기도, 종말의 때를 분별하고 드리는 기도여야 합니다. <아버지, 때가 이르렀습니다! 아버지!>

# 5
그렇다면 아버지께 드린 그리스도 최후의 기도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우리 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직전 어떤 기도를 드렸던 것일까? 궁금해지는데요, 오늘은 한 가지 내용만을 집중적으로 풀어보겠습니다.

먼저 11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 17:11 / (읽기) / 거기 맨 마지막 문장에 기도 제목이 있군요.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더 줄이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인데요, 우리 주님, 마지막 기도에서 아버지께 간구했던 내용, 그것은 여기 세상에 두고 가는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런데 우리 주님, 똑같은 기도 제목을 세 번이나 더 반복하여 아버지께 아룁니다. 21절의 중간,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하사!>, 22절의 후반부,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23절의 중간,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소서!> 그랬습니다. 우리 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께 간구하여 아뢰는 말씀,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띠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저희도>라는 단어인데요, 왜 <우리가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시고,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일까? 이 기도 속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말은, 이미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해서 11절을 보면,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22절에서도,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최후의 기도는, 우리는 이미 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음을 전제하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 주 안에서 온전한 하나를 이룬 제자만이 들릴 수 있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자 공동체란 모름지기 하나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야 우리라고 치고, 저희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저희>가 누구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는데요, 그 답이 20절에 나옵니다. 눈으로 따라 오실까요? 우리 주님 하시는 말씀, 아버지, 제가 지금 드리는 기도, 여기 나와 함께 있는 이 사람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제가 드리는 기도는, 저들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여 앞으로 나를 믿는 사람들까지를 위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랬습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만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최후의 기도는 아직 믿지 않는 불신자들까지를 포함하는 통 큰 기도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할 터인데, 해서 앞으로 나 예수를 믿게 될 잠재적 그리스도인들까지를 포함하여 <저희>라 하셨던 것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우리 주님의 마지막 기도는 한 마디로 통 큰 기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드리는 기도는 통 큰 기도여야 합니다. 겨우 내 가족들만을 위한 기도에서 머물러서는 아니 됩니다. 겨우 내 교회 식구들만을 위한 기도에서 멈추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직 믿는 사람들을 위한 배타적인 기도여서는 더더욱 아니 됩니다. 상대가 누구이든지 간에 아직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그런 넉넉한 기도여야 합니다. 뒤집으면 하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에서부터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서부터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있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기도의 품을 넓혀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다 품어도 남을 수 있는 기도의 품, 동과 서, 남과 북, 노와 사, 여와 야, 여성과 남성, 기성세대와 신세대, 그 어떤 다름도 품어낼 수 있는 바다와 같은 기도의 주머니를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최후의 기도를 통해서 주시는 간절한 부탁, 우리와 저희가 주 안에서 온전한 하나를 이루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6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또 생깁니다. 하필이면 여기 세상에 남겨 두고 가는 제자들을 위해 빌어주신 기도 제목이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입니다. 여기 남는 제자들에게 하늘의 만복을 내려 주십사고 빌어주시지는 않고 왜 우리와 저희가 하나 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하셨던 것일까?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 곧 함께 사는 길이요, 주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 곧 함께 구원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복도 받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 무엇보다 먼저 우리와 저희도 하나 되게 해 달라고 아버지께 빌고 또 비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주님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여전히 하나를 지키지 못하고 서로 갈라져 산다는 데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갈라져 살기에 아직도 이 세상엔 온갖 슬픔과 불행과 저주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갈라진 둘을 하나 만드시려고 노력하셨건만, 여전히 우리는 온전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해서 불행히도 우리 주님, 마지막 순간까지 저희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하나 됨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원하셨던 하늘의 복은 무엇일까? 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제자들과 저희들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께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걸까? 모두 세 가지인데요, 하나씩 풀어가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선물로 받겠습니다.

# 7
먼저 오늘 주신 본문 가운데 세 가지의 서술문을 찾아 읽겠습니다. 17장 21절의 맨 뒤, <믿게 하옵소서!>, 23절의 맨 뒤, <알게 하옵소서!>, 24절의 맨 뒤, <보게 하옵소서!>에 표시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도 하나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곧 저희로 믿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보게 해 달라는 기도에 다름 아닙니다. 그랬습니다. 우리 주님, 우리와 저희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 믿게 되기를, 또한 알게 되기를, 그리고 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 된 우리가 믿어야 하고 알아야 하고 보아야 하는 대상입니다. 21절, 무엇을 믿게 하소서? 온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3절, 무엇을 알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던 것과 같이 아버지께서 저희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역시 누가? 세상으로! 다시 말해 온 세상이 알게 하옵소서!

24절, 무엇을 보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에게 주신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옵소서!

이 말씀을 번안하면 이렇게 되지요, 우리와 저희가 주 안에서 온전한 하나가 될 때 우린 주님을 믿게 되고,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거지요. 주님을 믿게 되니 구원에 이르게 되지요,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으니 하루를 살아도 천국이지요, 영광을 보았으니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하게 되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 주님, 우리 모두가 복 받기를 원하셨던 거군요. 그러셨습니다. 우리 주님, 우리와 저희가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저 영원한 나라에서까지 영생복락 누리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을 받기 위해선 하나가 되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있으니, 우리 주님, 찢어지는 가슴으로 최후의 기도를 통해 하나 되게 해 달라 간구하셨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우리와 저희가 주 안에서 하나 될 때, 우린 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정말입니다. 하나가 되어야 믿음의 복이 임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뒤집으면 하나가 되지 못하니 믿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문제는 여기서 그치질 않지요. 서로 믿지 못하니 사랑을 알 턱이 없고요, 사랑을 알지 못하니 사랑을 한다는 것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렇게 믿지도 못하고, 사랑도 모르니, 그 자리에 영광이 머물 리가 없지요. 그렇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함은 그 자체로 저주일 뿐만 아니라, 이미 약속된 축복마저 깨버린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하나가 되지 못한 가정, 해서 서로 믿지 못하는 가정, 그 자체로 지옥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 가정, 해서 서로 사랑할 줄 모르는 가정, 그 자체로 저주입니다. 그런 가정에 하늘의 영광이 머물 턱이 없습니다.

해서 우리 주님,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께 빌고 또 빌었던 기도의 제목, 우리와 저희가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온전한 하나가 될 때, 우린 제대로 믿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온전한 하나가 될 때, 우린 하늘의 사랑을 알고 서로를 끝까지 사랑하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과 사랑 안에서 우리가 둘이 아닌 더 큰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부디, 주 안에서 온전한 하나가 되어, 약속으로 주신 이 모든 다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8
그렇다면 이제 남는 과제는 하나, 어떻게 해야 우리와 저희가 하나 되어 이 모든 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구원에 이르러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우리 주님의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22절인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 17:22 / (읽기) / 중간에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에 표시하십니다.

무슨 뜻인가? 우리가 저희가 하나를 이루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저희 보다 먼저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러면서 우리 주님, 놀라운 말씀을 주십니다. / 17:21 / (읽기) /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무슨 뜻입니까? 우리 주님이 온전히 아버지 안에 안겨 살았듯이, 우리 주님이 오직 아버지를 내 안에 모시고 살았듯이, 이제 저희도 그렇게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 저희가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은 내가 당신 안에, 당신이 내 안에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라! 그렇습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 우리 안에 있다는 뜻이요, 우리 안에 있다는 것,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기 위해선 서로가 서로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 안에서 내가 당신 안에 들어가니, 당신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됩니다. 당신이 내 안에 들어오니 당신의 슬픔이 또한 나의 슬픔이 됩니다. 그렇게 하나가 된 우리, 당신의 모든 것이 나의 모든 것이요, 나의 모든 것은 당신의 모든 것이 됩니다. 그러니 틈새가 없지요. 그러니 온전히 믿게 되지요. 그러니 사랑할 수밖에 없지요. 요즘 세상에 이런 귀한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되니, 그 곳에 하늘의 영광이 머물게 되지요.

문제는 주 안에서 하나 됨 자체가 축복일진대, 세월이 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지위가 높아질수록, 많이 알게 될 수록, 내가 당신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어찌 내가 너 안에 있을 수 있을까? 하면서 자꾸 당신 밖으로 벗어나려고 합니다.

왜 가정이 화목하지 못합니까? 가족 끼리 서로에게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왜 교인들이 하나 되지 못합니까? 주님에게서 자꾸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오, 우리 주님,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 기도의 제목, 우리와 저희가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젠 우린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린 이제 언제 어디서나 막힌 담을 허는 <하나 천사>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가 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 마지막 선물로 드리며, 말씀 마당을 닫겠습니다. / 요한 14:14 / (읽고 아멘!)
(장 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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