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언보다 절대적인 사랑 (고전 13:2)

  • 잡초 잡초
  • 400
  • 0

첨부 1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2)

1870년 2월 16일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j가신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이 할머니는 생전에 믿음생활을 잘 하였는데, 돌아가시기 3일 전에 기도를 하던 중 홀연히 천사가 나타나 3일 후에 자신 을 데려가겠다는 계시를 받았다합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집안 식구들에게 "내가 3일만 있으면 하나님께로 가니 그리 알아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식구들은 "멀쩡한 사람이 죽기는 왜 죽겠어요." 하며 곧이듣지를 않았습니다. 그 후에 할머니는 음식을 드려도 "난 이제 세상 음식은 안 먹는다. 하늘에 가서 좋은 것을 먹을 테다" 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심일 째가 된 날 아침에는 "이제 천사가 나를 데리러 왔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나가서 보니 그 집 지붕에 무지개가 뻗치고 하늘길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는 운명하였습니다. 3일장을 치르던 날은 추운 겨울이었지만 날씨가 매우 좋아서 장례식에 온 사람들 모두 진심으로 가는 길을 함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합니다. (인터넷 정보클럽- 자기 죽음을 예언)

예언이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쉽게 말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의 유익을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고전 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라고 합니다.

예언은 사람을 상대하여 전파하며 가르치므로 복음을 듣는 자에게 덕을 세우게 됩니다.

덕을 세운다는 말씀은 (OIKO-DOMEIN) 집을 세운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신자의 지혜와 경건과 거룩과 행복을 증진시켜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날 쥐 한 마리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그만 사나운 고양이를 만났습니다.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구석으로 몰려 더 이상 달아날 수가 없습니다. 상대는 점점 더 살기가 등등하여 입맛을 다지면서 한 걸음 씩 다가옵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습니다. 순간 아침에 집 주인 아저씨가 읽은 성경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그래서 간절히 기도 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이 환난과 시험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그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무엇인가 비장한 결심을 한듯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아니 제가 겁도 없이 도대체 웨 이러는 거야” 자신에게 겁을 내기는커녕 미소까지 지으면서 다가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그렇게 다가와 귀에다 대고 무엇인가 은밀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고양이는 갑자가 풀이 죽어 돌아갔습니다. 귀에 대고 한 말은 “저 고양이님 사실은 나 조금 전에 쥐약을 먹었어요.”(월간목회 05.06)       

  진정한 경건과 거룩한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자로 하여금 자신의 죄나 실수나 잘 못된 일들에 대해서 깨닫게 하여 죄를 회개하고 버리도록 권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역사가들은 청교도시대에 영국을 기록하되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 때만큼 도덕적인 변화가 컸던 때는 없었다. 영국 국민은 한 책의 국민이라 볼 수 있는데 그 책이 곧 성경이다. 저희들은 성경을 집에서 읽고 교회에서 읽었으며 이 말씀이 귀에 들어갔을 때 어디서든지 변화가 일어났다. 모든 국민의 성격이 변화하여졌다. 새로운 생활 철학과 인생관을 가지게 되었으며 새로운 도덕적 자극이 각계각층에서 일어났다. 과연 영국 사람이 문화민족이 되기까지는 성경이 이렇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합니다.

권면은 경계하여 양심과 의지로 옳은 데로 움직이게 함을 말합니다.

탈렌트 강석우씨는 가정적인 면이나 대인 관계에서 부드럽고 자상하기로 단연 챔피언감이라 합니다. 평소에는 절대로 화를 내거나 딱딱한 투로 말하는 적이 없지만 신앙적인 면에서는 부드러운 것과는 정반대라 합니다. 총각 시절 나연신 이라는 처녀와 사귀게 되었는데 나씨는 천주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합니다. 강씨가 나씨에게 개신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결혼 자체가 어려워진다며 애써 설득한 결과 마침내 나씨가 개종하게 되었다 합니다. 한 집안에 두 종교가 있을 수 없다는 게 강시의 믿음이었습니다. 결혼을 하긴 했지만 천주교에서 개종한 나씨가 부딪힌 첫 번째 난관은 남편 강씨가 너무 많은 헌금을 땐다는 것이었습니다. “봉투에 넣는게 뭐에요” “뭐긴 뭐야 헌금이지‘ ”무슨 헌금을 그렇게 많이 해요“ ”이 사람아 왜 헌금 갖고 말이 많아“ ”당신 정신 차리세요 당신이 지금이나 강석우지 나이 먹고 흰머리 성성해저도 강석우 인줄 아세요 돈 벌 때 모아 놓을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돈을 펑펑...“ ”당신 그런 소리하면 못써 이건 십일조야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라구“ ”난 도저히 십일조 같은 거 못 내겠어요 당신이 얼마나 고생해서 벌어온 돈인데 십분의 일씩이나 떼어서 갖다 바쳐요 난 못해요“ ”이건 명령이야 십일조 떼라면 떼" 그러면서 강석우 씨는 이렇게 덧붙였답니다. 여보 우리가 번 것 중에서 일부를 떼어서 바친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십분의 구를 얻었다고 생각 해봐 그럼 십일조가 아깝지 않을 거야“ 이렇게 해서 부인도 십일조 바치는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합니다. 또 강씨는 주일 날 예배에 빠지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합니다. 어느 날 감독이 전화를 걸었습니다. “강석우 씨 이번 일요일에 지방 촬영이 있는데 가야겠어” “안됩니다. 주일엔 교회 가야 합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시간 좀 내 교회는 다음 주일에 가도 되지 않아” “그런 소리 하실 거면 전화 끊습니다.” 딸각(월간목회 05.06호)

예언의 말씀의 권면을 따르며 바른 신앙생활 하는 모두가 됩시다.

  안위(paramudia)란 곁에서 하는 말이란 뜻입니다. 슬픔이나 걱정 그리고 절망적인 일을 만난 자를 위로해 주어 기쁨과 용기를 얻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경만큼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은 없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은 모든 사람으로 부터 죽어야만 된다는 절망감 밖에 다른 것은 안겨 주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살려 주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는 다시 범죄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나인성에 사는 한 과부에게 유일한 소망인 외아들 청년이 죽어 상여에 메여 공동묘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과부는 유일한 소망인 아들을 묻으려 가면서 얼마나 탄식하며 절망에 빠져 있었겠느냐 하는 것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만나 관에 손을 대시니 머물러 섰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실 때 죽은 청년이 일어나 앉아 말도 하므로 그 어머니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눅 7:11). 예수님께는 가장 절망적인 죽음까지도 소망의 주님이 되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로마로 가는 죄수들이 탄 배에 큰 태풍이 몰아쳤습니다. 그들은 살 소망이 다 끊어 졌습니다. 배에 있는 모든 기구와 상품들을 다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여러 날 동안 태풍이 계속되므로 살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들에게 외쳤습니다.  "여러분들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들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1-25) 그리하여 그들은 음식을 먹게 되었고 소망을 가지고 행선하는 중에 멜리데 라는 섬에 상륙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망과 절망 중에 있는 우리에게 유일한 위안과 소망을 주어 용기와 기쁨을 갖게 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언의 유익을 가르치는 말씀을 봅니다.

(고전 14:24-25)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예언의 유익에 대하여 몇 가지를 더 첨부하고 있습니다.

예언의 말씀이 죄를 깨닫고 책망을 받게 합니다.

하나님은 양심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도 하시지만 인간의 양심은 죄의 오염으로 무감각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언 즉 말씀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자신의 모든 죄가 모두 다 들어 나자 그는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깨닫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외치기를 "나의 행한 일을 내게 말한 이를 와 보라" 증거하며 예수님을 믿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서나 설교를 통하여 먼저 자신이 멸망 받을 죄인임을 발견하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구주 나의하나님으로 모시는 자가 소망이 있고 말씀을 바로 받는 자입니다. 이렇게 예언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언을 들을 때 판단을 받습니다.

한 노인이 죽었습니다. 그가 죽음의 신에게 끌려갔습니다. 노인은 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왜 나에게 죽는다는 이야기를 미리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죽음의 신은 노인에게 “자네 무슨 서운한 말을 하는가. 나는 자주 자네에게 소식을 전했네. 눈이 점차 어두워 돋보기를 끼지 않았나. 그게 첫 번째 소식이었네. 귀가 점차 잘 들리지 않았지 않았나. 이것이 두 번째 소식이었네. 이가 하나 둘 빠지지 않았나. 그게 세 번째 소식이었네.  게다가 사지가 하루하루 노쇠해졌으니 얼마나 소식을 전해야 알아들었겠는가? 라고 했답니다. 그때 어린 소년도 몹시 억을 하다는 듯이 죽음의 신에게 불평하였습니다. “저는 눈도 밝습니다. 귀도 잘 들립니다. 이도 튼튼합니다. 어째서 제게는 죽음의 소식 없이 저를 데리고 오셨습니까. 그러자 죽음의 신은 또한 “자네에게도 소식을 전했으나 자네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야. 내가 말해 주마. 네 옆집 아저씨가 서른다섯 살인데 얼마 전에 죽었지. 네 집 건너편에 스물 세 살 난 젊은이가 죽었고 더군다나 며칠 전에는 갓난  아이가 죽는 것도 봤잖아. 그것이 바로 자네에게 전한 소식이네”라고 대답 하였습니다.(월간목회.05.06)   

우리가 말씀을 듣기 전에는 우리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그 날 그 날의 충동과 쾌락을 위해 살며 삶의 목적이나 종말을 생각지 않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므로 나 자신의 소행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할 하나의 심판대가 있음을 깨닫게 되어 모든 일에 판단력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바른 판단을 하여야 합니다.

  마음에 숨은 일이 들어납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들어 나느니라."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죄를 깨닫게 합니다. 어떤 죄를 지었을 경우 어느 성경의 말씀을 들어도 혹은 어느 성경을 읽어도 자신의 죄를 기억나게 하시며 생각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예언인 말씀이 하는 중요한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깨닫고 구원 얻는 것은 오직 예언의 말씀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책만 보아도 죄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하나님께 경배케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고 그 분을 바로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분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한다.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문은 낮아서 무릎을 꿇지 않고는 들어 갈수가 없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나 자신을 바로 아는 자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이여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지 아니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이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며 책망을 받게 되며 판단을 받고 마음에 숨은 일이 들어나며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신자가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를 향하여 "나는 너희가 다 방언을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고전14:1절) 이 말씀의 뜻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베풀기 위하여 은사를 사모하되 특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권면입니다.

예언이란 미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복음을 말하여, 혹은 권하고 혹은 위로하여 덕을 높이는 것으로 전도하는 것이나 설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미전풍).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선언하는 것으로 전도이기도 합니다.(바클레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 중에 최고의 것은 전도하여 예수 믿어 구원 얻게 하는 일입니다.

지옥 간 부자가 탄식 했던 문제를 하는 길도 모세와 선지자를 듣는 길 곧 예언의 말씀을 듣고 신앙 생화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서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관한 내용이 예언의 핵심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에 관한 계시가 핵심을 이루었습니다.

  성령의 은사의 한 형태로서의 예언도 있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영적인 진리를 깨달아 가르치는 것과 숨겨진 죄악들을 지적하여 회개하도록 하는 은사입니다. 이러한 예언은 특별히 초대교회에서 교회의 설립과 확장, 그리고 성도들을 권면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있어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적 은사가 있어서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자신이 공허하게 되고 무가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는 귀하나 사랑이 없이 소유하고 행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무가치하고 자신에게 어떠한 유익도 되지 못하니 예언적 은사 보다 사랑이 절대적입니다. 더욱 사랑 안에서 주어진 은사들을 활용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두가 됩시다.    (강성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