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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목적 (요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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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있지 않으면 고 3학생들이 수능을 치루게 됩니다. 아마도 이번 여름이 그들에게 가장 힘든 시기일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체력적으로 힘이 들기도 하고, 정신적으로도 힘든 시기가 지금 이때입니다. 고3 자녀를 둔 가정의 부모님들은 더 많이 격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언제 남들보다 더 잘 하라고 했나? 남들 만큼만 하라는데 그게 그렇게도 안되냐?" 이런 식으로 덜 덜 볶지 마시고 한마디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마시기 바랍니다.

월드컵스타인 박지성선수가 자신이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히딩크 감독의 칭찬 한마디 때문이었음을 최근에 밝힌 바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대표선수 최종선발전을 앞둔 시점에서 박지성선수가 발목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박지성선수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 보일 기회를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자신은 탈락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벤치앉아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다른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었습니다. 그때 히딩크감독이 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성! 자네라면 능히 할 수 있을 것일세"

그 칭찬 한마디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고3학생들은 여러모로 지쳐 있을 시기입니다. 이럴 때 "공부해서 남주냐? 다 너 잘되는 길인데 왜 그러느냐?" 그렇게 안달하지 마시고 칭찬하는 말 한마디, 격려하는 말 한마디를 아끼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대학에 진학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할 때 우리들은 대학을 가느냐 가지 못하느냐?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대학을 가야 하느냐?'에 대한 분명한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님들도 그렇고,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고, 대학에 진학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왜 대학을 가야 하느냐?에 대한 분명한 이유는 없습니다. 남들이 다 가니까? 가는 경우가 태반이고 가지 않으면 사람대접 못 받을 것 같은 어떤 위기감 때문에 가기도 하고, 또 취직을 하려면 대학을 나오지 않고 마땅히 취직할 자리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대학을 진학하는 것이 그 이유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등학교 3년동안 어렵게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했는데 '왜 내가 대학에 진학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없기 때문에 어렵게 진학을 하고도 대학에서는 공부도 하지 않고 술마시고 방황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과 비슷한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왜 당신은 결혼을 하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결혼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가 결혼이 아닙니까? 그러나 막상 결혼당사자들은 결혼에 대해 아주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좀 극단적인 표현이 될는지 몰라도 남들이 다 하니까 결혼하는 경우입니다. 나이가 차고 결혼할 때가 되었으니 결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해야겠다거나 결혼을 통해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이루어보겠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결혼얘기하면서 행복이 어떻고, 아름다운 결혼생활이 어떻고, 그런 말을 하면 먼저 결혼한 사람들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옵니까? '꿈 깨라 꿈 깨' '그건 다 환상이야' 라고 말합니다.

언제나 그런식이 되어버리니까 서로 어렵게 결혼하고 나서도 싸우거나 다투고 갈등속에 고민하는 부부들이 많지 않습니까? 물론 인생을 살면서 이런 일들을 얼마든지 겪을 수 있습니다. 대학진학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지만 왜 진학해야 하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결혼의 중요성을 알고 있지만 왜 결혼해야 하는지에 대해 모를 수 있습니다. 그것 모른다고 해서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치명적인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지는 않습니다.

대학생활에 실패해도 사회에서 성공적인 삶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결혼생활에 실패해도 재혼을 통해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사는동안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대해서입니다. 이런 질문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다. "왜 교회에 다니십니까?" 라든지 "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물론 이런 질문은 주로 이단들이 잘합니다.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대답도 불분명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대답이 우리들에게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신앙생활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대답이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기껏 우리의 입을 통해 할 수 있는 대답은 '구원받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요. 어떤 면에서 보면 가장 정확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구원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하면 그때부터 '골치 아픈 얘기 그만해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래도 교회에서는 이런 얘기들이 오갑니다. 하지만 직장에 가면 무슨 말을 합니까? '직장에서까지 교회얘기하고 신앙 얘기해야 되느냐?'고 말하지 않습니까? 특히 남자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본문의 말씀도 지난주에 이어 참 짧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본문의 말씀속에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계십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했습니다. 방금 읽은 4절 말씀에 의하면 이 세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 세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 그 만드신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딸만 셋인 가정의 경우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솔직히 셋째는 아들을 기대하며 낳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셋째도 딸입니다. 분명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별로 원치 않던 자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녀에게도 분명한 삶의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미혼모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성에 대해 개방적인 사상이 밀려오면서 남자든 여자든 순결에 대한 관념이 점점 희박해져가고 있고 그로 인해 미혼모 출산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분명 미혼모에 의한 출산은 미혼모도 그렇고 그렇게 태어나는 아이에게도 상당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년전에 한 겨울에 검은 비닐봉지에 쌓여 버려진 한 아이를 새벽기도 가시던 목사님이 발견하여 키우게 된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훗날 그 아이가 자라서 자신의 일을 듣게 된다면 어떤 마음을 갖게 될까요? 아마 자신의 인생에 대해 비관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하며 자신의 삶을 체념할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혼모를 통해 태어난 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장애아이의 경우는 어떨까요? 장애아이를 둔 부모에게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말하면 왜 하필이면 그게 우리 가정이여야 하느냐? 라고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장애우들의 출생에도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을 통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적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 인간들에게 잘 관리하라고 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뜻이 자녀된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진 죄가 하나님의 뜻을 잊어버리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니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세상의 것을 의지하게 되고, 세상의 것을 탐내면서, 세상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잘 모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귀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가치가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사는 동안 자꾸만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남들과 비교해서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아야 하는 줄 압니다. 우리 자녀들을 볼 때 남들보다 월등하게 잘하지는 못해도 남들만큼 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속상해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로 인해 세상의 생각에 지배를 받고 있지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변함이 없고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온전하신 뜻이 우리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무리 이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할지라도 하나님께 의존적이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성공적인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어느 것 하나 자기 마음과 생각대로 행동하신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에는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져 있고 예수님의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은 감추시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만 사용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자신의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를 원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주시고 깨닫게 하시는대로 복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은 우리도 아버지의 말씀에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예수 믿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그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자신의 욕심과 고집대로 살아왔던 나의 과거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전서를 보면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을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4:2)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모르고 자기 고집과 욕심대로 산 것은 지나간 세월로도 충분합니다. 또 다시 반복해서 과거와 같은 삶을 살면 안됩니다.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이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을 때를 살아야 합니다. 분명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사는 것은 이 세상의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능력으로 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과거엔 우리의 지식에 의존해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지혜를 공급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과거엔 재물에 의존해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먹을 것이 생깁니다. 옛말에 '어른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 생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먹을 것 저절로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셨으니까요? 이 말을 믿으십니까? 왜 아멘을 못하시는 것이죠? '그래도 먹을 것은 내가 책임질 일이지' 라고 생각되십니까? '만나와 메추라기가 떨어진 것은 과거의 일이지 오늘날에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지는 않으실꺼야' 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러면 성경이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이 약속은 부도난 공수표란 말입니까?

도대체 성경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신수양을 위해 필요한 것인가요?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인가요?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어른 말 잘 들어도 떡이 생긴다'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먹을 것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만약 책임져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거짓말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분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진실입니다.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은 인기성 발언이 아닙니다. 한번 던져보고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나 보려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분명 그렇게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 여전히 우리의 생각과 노력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가 욕심부리는 것 만큼 하나님께서 채우시지는 않겠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나의 욕심을 채워주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 능력으로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요즘 기대가 너무도 큽니다. 그 기대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교회를 어떻게 사용하실까?에 대한 기대입니다. 지난주에 건축이후에 감당해야 하는 재정적인 부담에 대해 보고를 받고 염려도 되고 생각도 많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매일 저녁마다 기도하는 분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저는 오히려 거역할 수 없는 큰 희망의 물줄기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일하십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매어 달릴 때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했다면 이제는 전적으로 주님께 맡기고 주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직 기도할 뿐입니다. 그때가 주께서 일하실 때입니다. 그때가 주께서 역사하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중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면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 보통 분이 아니란 점입니다. 그분은 하늘나라의 심부름꾼 정도가 아닙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그토록 존귀하신 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를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보통우편으로 발송할 것입니다. 그보다 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등기로 보낼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하면 택배로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물건이라면 택배로 보내지 않고 여러분이 직접 가지고 가지 않겠습니까? 귀한 선물은 주인이 직접 갖다줌으로써 그 선물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구원은 어떤 것입니까? 영원전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모든 영광을 나누신 그 분, 이 우주에서 가장 존귀하고 가장 영광스러우신 분, 그분이 우리에게 직접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이라는 선물은 너무도 소중하고 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선물을 받는 즉시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잡다한 일들을 중단해야 합니다. 도대체 이 엄청난 선물이 왜 우리에게 주어졌는지를 생각하고 이 선물이 가지는 의미와 축복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이 구원을 얻는 것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세상일로 너무 바빠서 구원의 메시지를 듣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잠시 후 땅을 치며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급한 일은 바로 이 구원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예수를 믿는데 아직도 많은 불만과 불평속에서 살고 있다면 이 구원이 얼마나 크고 엄청난 것인지에 대해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가운데 이삭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족장들에 비해 이삭의 삶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너무 일찍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어렸을 때 모리아산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번제물로 바쳐질 뻔 하다가 살았습니다. 거기서 이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그런 이삭에게 남은 생애동안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한평생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교회만 오면 눈물을 흘리는 분이 계십니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면서 또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몰래 몰래 눈물을 훔치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강팍해져 버렸습니다. '나도 옛날엔 다 그랬어' 왜 우리의 마음은 점점 굳어져 가는 것일까요? 돌짝밭처럼 딱딱하게 굳어져서 구원에 대한 감격을 찾아볼 수 없어서 점점 메말려 가는 것일까요?

오래전에 어느 목사님이 씨뿌리는 비유속에서 돌짝밭에 뿌려진 씨에 대해 설교하신 내용이 생각납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바위위에 떨어진 씨는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습기가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습기는 몇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구원의 감격에 대한 눈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설교를 들을 때 처음엔 '참 알레고리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씨뿌리는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그 습기가 구원의 감격에 대한 눈물이라고 해석을 하실까? 라며 비판적인 투로 설교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씀이 그 목사님의 오랜 목회경륜을 통해 나온 깊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사건이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 구원의 감격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구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구원의 감격은 사라지고 성경적인 지식만 남아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우리 안에 있는 내 개인적인 감정에 더 많이 좌우되는 신앙생활로 고착화 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저 감사하고, 감사하는 마음 때문에 교회에만 오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입니다. '저 사람 뭔가 큰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라든지 '저사람 하나님앞에서 큰 죄를 지은 모양이야'라든지 '나도 한때 다 그렇게 신앙생활했어'라든지 그런식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다보니 언제나 뭔가 진리라는 이름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고, 뭔가 내 생각에 맞지 않으면 용납도 이해도 되지 않는 수준에 머물러 버릴 때가 많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크고 감격스러운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나머지 생애가 날마다 감사와 찬양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도 모자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며 용납하려면 마음들이 부족한 것일까요? 왜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이 없는 것일까요? 희생을 말하면서 희생이 없는 것일까요? 왜 용서를 말하면서 용서가 없는 것일까요?

창세 전에 아버지와 영화를 함께 나누셨던 그분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구원은 너무나도 큰 구원이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멸망에서 벗어나 영원히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사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광을 되찾기를 원하셨습니다. 놀라운 지위에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신 때가 언제입니까? 십자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입니다. 왜 이 시점에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확실성을 고백하고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의 자리에 이르시는 분은 영원한 영광중에 계시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지속적으로 죽음의 자리에 계실 수 없습니다.

원래 주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곳은 하나님의 보좌우편입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 계셔야 가장 자연스러운 분이십니다. 비록 죄인들을 위해 이제 십자가를 지시게 될 것이지만 주님은 하늘에 올리우시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회복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혼자 그 곳에 가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이름을 다 짊어지고 하늘의 보좌 우편으로 가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이처럼 가장 중요한 사실을 하나님과 함께 나누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떻게 합니까? 우리에게 일어날 가장 중요한 일을 나누지 않습니까? 집에서 아내와 남편이 대화를 나눌 때 어떻게 합니까? 부부는 서로 가장 중요한 일을 나눕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 그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죽는 것이고, 그 결과 아버지께서 수 많은 사람들을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고 더불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내가 얼마나 좋은 조건에서 사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보십니다. 여기서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이 세상의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보다 더 귀하고 값진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분이라면 그 나머지의 것도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의집 얘기를 한가지 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제 바로 위에 누나가 오랫동안 기도하며 준비한 끝에 올 초에 4살짜리 남자아이를 입양했습니다. 자녀가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남들이 입양을 꺼려하는 남자아이를 입양했습니다. 입양을 주선하는 기관에서 한편으로 염려하는 말을 했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크면 재산 상속문제가 걸림돌이 될 수 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누나나 매형의 입장은 매우 단호했습니다. 아이를 자식으로 맞아들여 자신의 호적에 올렸는데 그까짓 재산상속이 무슨 문제냐? 재산상속 뿐아니라 자녀가 된 이상 이 아이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의지가 너무도 단호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그 귀한 구원을 선물로 주셨는데, 가장 귀한 것을 선물로 주셨는데, 그 나머지의 것이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의 것을 의지하며 살았던 삶을 청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 숨쉬는 동안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분이 내 생애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한번 보고 싶지 않습니까? 요즘 저는 그런 열망이 간절합니다. 저뿐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의 살아역사하심을 보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포기합시다. 우리의 판단을 과감하게 버립시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살아역사하심을 우리의 눈으로 보는 영광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해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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