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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에 대한 깨달음 (요 16: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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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철학자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 속담에는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는 것이 힘입니까?' 아니면 '모르는 것이 약입니까?'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요, 예를 들어 과거엔 환자의 병이 암이나 혹은 난치병으로 판명되어지는 경우 대개 본인에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가족에게만 알려서 '맛있는 것 많이 드시게 하고 마음 편하게 사시다가 가시도록 도와주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병들은 치료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또 환자가 자기의 질병을 알게 되면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에 차라리 모르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요즘은 암인 경우도 왠만하면 환자에게 병명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암이라고해서 반드시 치료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설령 치료가 불가능하다할지라도 본인에게 알려줌으로써 죽음을 스스로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도 있고, 반면에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도 있습니다.

최근에 김선일씨 참수장면이 인터넷에서 동영상으로 떠돌아 다녔다고 합니다. 학생들 중에는 이미 그 동영상을 본 사람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기성세대들은 대부분 얘기만 듣고 보지는 못한 것으로 압니다. 어떤 분들은 기어코 봐야되겠다는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절대로 보지 않겠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왜 보지 않겠느냐?고 질문을 해 보면 "보면 끔찍스러운 장면이 계속해서 눈앞에 어른거릴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정도라면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5절에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여기에 나오는 '비사'란 단어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비유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다시말씀드려서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 주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다시 이런 비사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분명하게 말씀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사람들이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제가 설교하는 내용에 대해 여러분들이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때 예화를 들어 설명하면 쉽게 이해되는 경우와 같습니다. 사실 저는 설교를 준비할 때 주로 논리적인 구성으로 접근을 해서 설교를 끌고 나갑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논리적인 사고에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논리적인 사고보다는 감정의 이입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강해설교를 들으면 어렵다는 생각부터 하기 때문에 예화가 섞인 제목설교나 주제설교를 더 선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제가 강해설교만 고집해 왔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어느정도 익숙해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꼭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심으로 제자들에게 진리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예수님은 진리에 대해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심으로 그 진리를 완전히 드러내는 일을 유보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제자들이 계속해서 진리를 깨달아 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살찌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론 여러 가지 특징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음식을 급하게 먹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본인이 살이 찐 상태라고 생각되시는 분이 계시다면 본인이 음식을 급하게 먹는지 아니면 음식의 맛을 음미하며 먹는지 한번 체크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십중팔구는 급하게 드실 것입니다. 위(胃)에서 포만감을 느끼지도 전에 급하게 음식을 먹다보면 훨씬 더 많은 양의 음식을 섭취하게 되지요. 그것이 살찌는 원인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하신 말씀 가운데 "얘야! 음식 그렇게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깨닫기보다는 계속해서 진리를 깨달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한꺼번에 엄청난 진리를 소화해 낼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러는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여 비유로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보아야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진리를 깨달아 가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유익이 있길래 그렇게 하셨는가?"하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많은 진리를 모르고 있고 실제로 모른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모른다고 해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지장이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냥 예수 믿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날에 그분께 가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좀더 쉬운 예를 든다면 이런 것과 같습니다. 저희 집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며칠전에 1학기말 시험을 쳤습니다. 수학문제를 보았더니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초등학교 문제가 그 정도면 고등학교 학생들의 문제는 어떻겠습니까? 아마 여러분들이 학교를 다닐 때 미분이다 적분이다 하면서 골치 아픈 수학문제를 붙들고 시름을 하신 기억이 있으실 것입니다. 저도 그랬구요.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생활하면서 미분 적분이 필요하던가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생활하는데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만 잘하면 됩니다. 요즘은 그것마저도 계산기를 두드리면 계산기가 알아서 계산해 주기 때문에 숫자만 알면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학교에서 이런 것들을 배웁니까? 실제 생활에 별로 적용되지도 않는 것 같은데 왜 학교에서는 학년이 올라가면 갈수록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을 가르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려운 문제에 대한 적응을 위해서입니다. 그런 것들을 배우고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쉬운 것은 너무도 쉽게 여겨지게 됩니다.

고3 문제에 적응이 되면 초등학교 6학년 문제는 너무도 쉽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6학년 문제만 붙들고 시름한 사람들은 고3문제는 읽는 것조차도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힘써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좀 의아하게 생각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엇을 비사로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요한복음 15장과 16장을 통해서 생각해 본다면 이렇습니다. 특별히 이 장에는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그 비유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따른 비유는 아기를 낳게 된 임산부 비유입니다. 여자가 해산을 앞두게 되면 그 고통 때문에 근심하게 되고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막상 아기를 낳은 후에는 아기가 너무나 귀엽기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다 잊어버립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드셨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그런 심정으로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는 두렵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태어나게 될 새로운 생명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이 두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비사는 포도나무 비유나 혹은 해산하는 여인에 대한 비유가 아닙니다. 이 후에 나오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완전히 드러나게 말씀하시지 않고 조금씩 감추시는 것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8절을 보면 결정적인 단서가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모든 것을 표현한 놀라운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은 충분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한번씩 혼동할 때가 있었습니다.

분명 말씀하시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인데 그의 외모나 인간적인 연약함이 자신들과 똑 같아서 제자들은 자주 이 사실을 잊곤 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것 자체가 하나의 비사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영광의 하나님이시며 그 분안에 하나님의 모든 능력과 신성과 지혜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육신을 입고 계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론이고 제자들조차도 그것을 바로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더 감추셨던 것은 자신의 죽으심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의 죽음을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면 하나님께로 가셔야 하는데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아버지께로 가는지를 몰랐습니다.

물론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잡혀서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는 것 사이에 아무런 연결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갈 것을 계속 말씀하고 계심으로 그들은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과정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며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식으로 표현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 사실에 대해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죄 때문에 이 죄 없는 어린양을 제물로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그들이 십자가에 대한 더 상세한 일들을 알게 되었다면 하나님을 불신했을 것이며 그나마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그런 일을 만났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있었지 만약 주님의 비참한 죽음을 미리 다 알고 있었더라면 아마 그들은 미쳐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비유로만 말씀하셨습니다.

'비사'란 단어는 '알쏭달쏭하다'는 뜻입니다. 마치 수수께끼 같아서 알 것도 같고 모를 같기도 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원토록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때'입니다. 29절과 3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사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

지금 제자들이 깨닫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28절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단순히 '비사'가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 우리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비유이며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를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지금 말씀하신 것은 분명히 드러내 놓고 하시는 말씀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30절에도 보면 "이로써하나님께로서 나오심을 우리가 믿삽나이다"라고 제자들이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참된 신성을 다시 한번 분명히 깨닫게 되었고, 주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많은 경우 진리라고는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그저 어렵고 불편한 것들 뿐인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흥미를 잃고 꾸벅꾸벅 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기 때문이 아닙니까? 만약 이 자리에서 제가 믿음이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보다 옛날 얘기를 하고, 우스운 얘기를 조리있게 한다면 아마 조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요즘 우리가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부분에 대해 정보를 전달한다면 더욱 흥미진지하게 듣지 않겠습니까?
요즘 여러분들에게 자주 걸려오는 전화가 어떤 전화입니까? 저는 자주 보험에 들라는 전화를 받습니다. 며칠 전에는 카드회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카드 포인트를 몇 백점 정립해 드렸다고 말입니다. 사람이 공짜로 준다는데 싫은 사람있습니까?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포인트가 적립되는 것이 공짜는 아니겠지요? 그런데 공짜로 포인트를 올려주었다면서 장황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다 들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마지막에 새로나온 보험상품이 있는데 들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포인트 적립이라는 미끼를 가지고 얘기를 다 듣게 하는 것,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똑 같은 전화를 하루가 지난 다음에 받았습니다. 아마 그분들은 제가 그 전화를 받았다는 것을 기록해 두지 않았거나 무차별 고객확보차원에서 전화를 다시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똑 같은 멘트에 똑 같은 포인트 적립에 대해 얘기하길래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설교가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처음엔 적어도 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웃고 난 뒤 무엇이 우리의 마음속에 남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신나게 웃고나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한번 웃은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이상 뭘 바라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사실 목사로서 제일 안타깝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에 대하여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할 뿐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말입니다. 자금사정이 어려워서 몇날 며칠 끙끙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며, 부모가 병들어서 오늘 내일 하는데 도대체 말씀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녀가 입시를 앞두고 하루 24시간이 아니라 25시간이라도 모자랄 정도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 말씀이 도대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요약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할 때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무지함을 물리치는 정도가 아니라 무지가 물러간 자리에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 대신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경험하는 일들이 어떤 것입니까? 처음 구원의 감격을 맛보았을 때 내 마음가운데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자리를 잡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 뜨거워짐을 통해 뭔가를 해야할 것 같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를 지나 두 번째 경험하게 되는 것은 말씀이 주는 폭포수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체험입니다. 처음엔 성령의 강권하시는 역사가 내 안에서 나를 움직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주체할 길이 없어 이리저리 다닙니다. 기도원도 가고, 은혜받는 장소라면 물 불 가리지 않고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그 단계를 거쳐 말씀이 주는 달콤함은 그 달콤함을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말씀을 보노라면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집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그분의 엄청난 사랑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내 인생을 세밀하게 간섭하시며 이끌고 계시는지 말씀을 보면 볼수록 더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은 그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내 삶을 그분께 전적으로 맡기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저도 처음엔 성령의 뜨거운 불을 경험했습니다. 그것을 경험하는 순간 내 안에서 나를 가만히 내 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 주체할 수 없는 성령의 뜨거운 역사하심이 나를 강하게 이끌고 계시는 힘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신학교에 들어가서 특히 말씀을 깊이있게 연구하는 모임 속에 들어가면서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의 달콤함입니다. 꿀송이보다 더 달콤함을 요즘도 여전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특히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을 깨닫거나 발견하게 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첫 만남에 대한 감격만 있고 말씀 안에서 주를 만나는 깊이를 체험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은 우리가 진리에 대해 계속해서 더 많이 알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으심에 대한 구체적인 부분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많은 부분을 숨기시면서 말씀하셨습니까? 아마 제자들이 주님께서 어떻게 죽으실지, 또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으실지를 다 알아버린다면 그들은 너무도 큰 충격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에 맞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이 씌여지고 온통 벌거벗겨진 채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미리 알았다면 그들은 미쳐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중에 성령이 오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영광의 의미가 제자들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영혼속에 깊이있게 박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성을 인함이며 그가 십자가에 달림은 우리의 교만함때문이었고, 그분의 죽으심으로 인해 십자가에 타나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 알게 될 때 온 몸에 전율을 느끼며 부들부들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를 어떤 좋은 사상에 대한 성경공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 사랑합시다. 서로 용납합시다. 서로 섬깁시다. 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그리고 설교시간에도 여러분들에게 참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로 하여금 이 설교를 통해 우리의 마음에 사랑을 심고 용서를 심고 섬김을 심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과 확신이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안에 깨달아지게 되는 것은 우리가 단지 성경적인 어떤 지식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깨달음은 모든 의심과 불신과 이 세상의 죄악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으로 돌변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더 많이 깨달아져야 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이 세상의 많은 일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매일 시험을 당하고 있으며, 매일 매일 우리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르고 넘어가서 다행이었던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진리가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확신과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는 이 길을 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적인 확신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보다 더 엄청나게 크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으며 나의 상태나 감정이나 조건에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셨으며 나를 기뻐하시고 이 세상의 어떤 시험이나 고통도 나를 이기거나 꺾을 수 없다는 확신입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주님이 힘을 주어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마 예수님이 계실 때 제자들은 하나님께 잘 기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몸을 입고 계신 주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제자들이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하늘을 향하여 대포를 쏘아 올리듯이 그들은 힘있게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자기들을 도울 인간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직접 하나님앞에 담대하게 기도하기 시작하고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 하늘로부터 직접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가장 중요한 능력의 끈 하나를 포기하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난관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기도하게 됩니다. 저는 요즘 개인적으로 참 기쁜 일이 있습니다. 저녁시간에 몇몇 분들이 자발적으로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강요해서도 아니고, 시간을 정해 놓고 함께 기도하자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한 명, 두명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쪼록 그 기도의 움직임이 전 교회로 확산되었으면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문제앞에서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하는 자세,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 깨닫는 반응을 보일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1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지금이라도 깨닫게 된 사실에 대해 주님께서 기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모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더 깊고 구체적인 진리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32절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주님은 바로 그들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다 도망치고 주님을 혼자 버려두는 것입니다. 주님이 혼자 잡혀가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지금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입니다. 제자들은 너무나도 두려워서 주님을 버려두고 다 도망을 치고 주님 혼자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신 말씀은 더욱 놀라운 말씀이었습니다.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제자들을 책망하시거나 부끄럽게 하시려고 하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이 십자가는 어차피 주님 자신이 감당할 것이며 이것은 제자들이 도울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보고서도 평안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미리 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제자들이 주님을 버려두고 도망칠 수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들이 다시 돌아와서 주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한평생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다시말해서 초대교회에서 도망친 제자들은 다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주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어느 인간도 도울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약속입니다. 어느 인간도 십자가에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보다 더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선구자이십니다. 주님에게 일어났던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에게도 주위에 있는 모든 친구들이나 동역자들은 도망치고 나 혼자 남아서 십자가와 같은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없는 가운데 한마디도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는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이 모든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때는 나를 위로해 주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한명도 없이 혼자 버림받은 것 같은 상태에서 시험과 환란을 당해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그 모든 환란 가운데서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은 나를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실패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하는 일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미리 말씀해 주시며 미리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힘들어하는 문제를 말씀을 통해 정확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주일 이 시간에 들려지는 말씀에 여러분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말씀하고 계실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우리가 그 말씀을 진지하게 하나님의 편에서 생각하고 받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맥추감사주일을 지키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던 그 첫 부르심을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그 은혜를 풍성하게 깨닫는 것이 진정한 감사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담대하게 세상을 이겨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해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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