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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식없는 신앙적 열심 (요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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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와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오래 전에 종전을 선언했지만 이라크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랍권의 나라들이 전쟁을 치룰 때 그들은 '거룩한 전쟁'을 선언하며 그 전쟁이 '알라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90년도에 있었던 '걸프전'이나 최근에 있었던 이라크 전쟁의 경우 후세인은 이라크인들에게 미국과 맞서 싸우는 이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기에 그 전쟁터에서 순교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축복'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미국은 걸프전과 이라크 전을 치루면서 이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마치 중세시대때 십자군전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군 전쟁때에도 아랍나라들은 '알라의 뜻'이라고 말했고 기독교 국가들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국가나 국민들은 이 전쟁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서로의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한쪽은 알라의 뜻이라고 하고 한쪽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니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자기들 나름대로 해석하며 전쟁하는 경우,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알라신과 하나님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다른 신을 섬기고 있기에 서로의 입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면서 어떤 큰 어려움을 잘 헤치고 나왔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신자들은 '부처님의 공덕'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알라신을 믿는 자들은 '인샬라'라고 말합니다. 얼마든지 서로가 섬기는 신이 다를 경우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소에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가 두분 있습니다. 이 두분을 한 사람씩 따로 따로 생각해볼 때 이 분들보다 더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들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매사에 성실하면서 책임감있게 언제나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분사이에 서로 합쳐질 수 없는 깊은 골이 있습니다. 아니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치 물과 기름 같습니다.

어떤 때에는 노골적으로 서로를 공격하기도 하고 뚜렷한 입장차이로 인해 자주 다툽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두분을 지켜보며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어쩌면 저렇게 다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섬기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입니다. 한 사람은 알라신을 섬기고, 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서로가 다릅니다. 서로가 굽힐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로 인해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떻게 이런 부분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분명 둘 중 한 사람은 잘못되었습니다. 두 사람중 한사람은 분명 섬기는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바른 열심이 아님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왜 서로 다른 생각이나 입장을 가지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문제가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런 갈등이나 부딪힘은 신앙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그들이 자신들의 아집에 빠져 있기 때문에 서로 다투게 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언제나 자기 주장외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아직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할 때에는 이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문제라며 자신은 상관없는 것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기 시작할 때에는 이 문제가 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 성장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겪어야만 하는 어려움입니다. 무엇인가 바로 알기 시작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게 될 때, 지금까지 나에게 잘해주고 나와 좋은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이 어느 한 순간부터는 도저히 친구라고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갈등관계에 빠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앞에서 언급했던 문제들은 너무도 미묘한 사항이어서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비록 예수님을 3년동안 따라다녔던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정신적인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가장 신실한 유대교의 형제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한다는 뜻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즉 출회하기로 결정한 유대인들이나 출회를 당하게 될 제자들이나 둘 다 분명히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섬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 다릅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죽이면서라도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방법중에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이렇게 다를 수 가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한편에서 다른 한편을 잡아 가두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면서 이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는 것을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줄로만 압니다. 물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한 형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 안에는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매우 깊고 미묘한 문제이기 때문에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깊은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경계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그것을 행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쉽게 표현해서 한주일동안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 별로 빠지지 않고 착실하게 다니면서 교회에서 정해놓은 헌금, 십일조나 감사헌금 그리고 때때로 건축헌금 이런 종류의 헌금을 구분해서 드리며 별탈없이 교회에 다니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란 얘깁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장 핵심된 내용은 따로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신앙교육을 받고 또 그 교육에 따라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그 안에 '이것'이 빠지면 마치 생명없는 몸뚱아리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빠지면 안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성령'입니다. 왜 성령이 없으면 생명없는 몸뚱아리처럼 되는 것입니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란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깨달음을 주는 순간부터 우리가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성령님께서 우리안에 찾아오셨을 때 제일먼저 우리안에 있는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실때 지금까지 내가 믿고 의지해왔던 것들이 너무도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런 것으로는 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의지하며 살았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예수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깨달음없이 기독교 세계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진실로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다른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즉 기독교 지식을 추구하게 되고, 종교적인 체험을 추구하게 되고, 기독교 안에서 폭넓은 인간관계를 추구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는 어떠했을까요? 모든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령이 주시는 진정한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물론 머리로는 인정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것이 자신들의 폐부를 찔러 쪼개는 말씀이 되어 진정으로 죄에 대해 통회하는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종교는 유대교라는 넓은 울타리 안에서 각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열심히 추구하는 종교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유대교 안에서 종교적인 체험을, 어떤 사람은 유대교 안에서 율법의 지식을, 어떤 사람은 유대교 안에서 현실적인 축복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에 하나같이 열심이었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고, 이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방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의 평가는 어떠했습니까? 3절에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열심을 내어 최선을 다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제쳐놓고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을 볼때 그들안에 진정한 깨달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금 핵심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란 반드시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성령의 도움이 없는 기독교 신앙은 겉으로 보기엔 트집잡을 것 하나 없이 깔끔한 것 같고, 거룩하며 성결한 것 같고, 열심이 특심인 것 같아 보여도 결국 그들이 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심하게 대적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도 없고,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하나될 수 없는 넓은 간격과 벽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도움없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결국 기독교안에서 자기 자신을 믿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안에서 자아성취를 추구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난 후 많이 달라지고 모범적이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으로 성령의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아직은 아닐 수 있습니다. 비록 교회에 출석하고 생활에 많은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할지라도 그것만으로 그가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깨닫게 하고 예수외에는 달리 죄 용서 받을 길이 없다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들어서 통회하는 심정으로 주께 나오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의뢰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정죄하고 심지어 그들을 죽이는데까지 몰고가면서도 자신들은 조금도 잘못함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어떤 큰 해를 끼친 일도 없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면서도 이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주님은 그들이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단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모르기 때문이라는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속에 성령의 비췸이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만약 우리안에 성령의 비췸이 없다면 우리들은 언제나 자기 생각대로 믿게 됩니다. 비록 기독교적인 생각을 가지고, 기독교적인 어떤 일을 했다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추구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자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때로는 직분일 수도 있고 때로는 예수를 믿은 햇수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아무리 직분을 가졌다할지라도 성령의 비췸이 없는 신앙생활은 살아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제대로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내 안에서 비치게 될 때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내 실체를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경계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옛날처럼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라는 식으로 무대포로 나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은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서 자기 자신을 믿고 산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주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주님의 도우심보다는 지식을 추구하고, 주님의 도우심보다는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있고, 주님의 도우심보다는 그저 세상을 사는 동안 걱정이나 근심이 없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여러분! 복음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 가운데 있는 세상의 것을 의지하고 그것을 신뢰하며 살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성령이 아니면 참된 신앙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며 아무리 자기 나름대로 열심을 다한다 해도 결국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열심히 대적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인류의 소망은 오직 성령께서 믿는 자들 위에 부어져서 그들을 통로로 하여 이 세상에 계속 하나님의 은혜를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이 사실을 자주 잊고 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또 다시 우리의 능력과 열정과 우리의 지식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의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어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히 채우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시도록 하지 않습니다.

그런의미에서 볼 때 우리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새 마음을 주시고 성령께서 능력을 주실때에만 소망이 있고, 삶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발버둥치며 살아도 참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같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지만 우리안에 긴장과 갈등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래야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러기에 성령님이 얼마나 소중하며 그분을 의지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얼마나 필요한 분이시며 이분이 그들을 얼마나 능력있게 할 것인지를 깨닫기 원하는 마음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당할 핍박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만일 제자들도 성령을 믿지 않고 자기의 힘을 믿는다면 이들과 똑같은 일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깊이 염려하고 있는 한가지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심으로 그들이 경험하게 될 절망과 좌절감입니다. 4-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예수님은 왜 이제야 제자들이 받을 핍박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아무나 붙들고 싸우지 않습니다. 사탄은 가장 중요한 사람을 공격합니다. 항상 대장이나 영적인 책임자를 공격해서 쓰러뜨립니다. 왜냐하면 목자를 치면 양떼는 흩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사람의 마음과 공격의 대상은 오직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을 지키는 방패요 산성이요 피난처였습니다. 참소하는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몰랐습니다. 어쩌면 마음속으로 마치 이것이 남의 일이나 되는 것처럼 '왜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논쟁을 벌이실까?'라고 불평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떠나시고 나면 이제 사탄의 주된 공격의 대상은 바로 제자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될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은 너무나 독단적인 몇몇 목회자들의 문제요 그들이 싸워야 할 문제라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신앙이 자라면 자랄수록 누구나 다 이런 미묘한 싸움에 걸려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 휴양지는 없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복음에 있어서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휴양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강원도에 있는 한 휴양지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이승만 대통령의 휴양지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김일성 휴양지도 함께 있었습니다. 아마 가 보신 분들은 어떤 곳을 얘기하는지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주변환경이 너무도 쾌적할 뿐 아니라 답답한 가슴이 딱 트일정도로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머물러 있노라면 정말 편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다윗이 군사들을 전쟁터에 보내놓고 자신이 한가하게 쉬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 전쟁은 자신이 함께 싸워야 할 전쟁입니다. 아무리 왕이되어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상태였다 하더라도 군사를 보내놓고 자신은 한가이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함께 싸우지 않고 편안하게 있다가 결국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피흘리면서 싸우는데 나 혼자 편안하게 마치 옆집에 불난 것을 구경하듯이 그렇게 있을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옆집에 불이났으면 함께 불을 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불을 끄지 않았을 때 내 집도 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영적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나는 편안하게 인생을 적당하게 즐기며 살아가면 안됩니다. 함께 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시 후 내가 누리던 평안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릴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왜 그토록 훌륭한 사람들이 아주 사소하게 보이는 문제를 가지고 대립하며 그들 사이에 결코 하나될 수 없는 깊은 골이 있었던가?'하는 것을 남의 문제로만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문제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심으로 분명히 그들을 떠나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들은 주님이 자신들을 떠나신다는 사실만 생각하고 그 뒤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감히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주님이 육신의 상태로 그들과 영원히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죽으신다고 하며 떠나신다고 하니까 그만 절망해서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뒤의 일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마치 하나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한 듯 낙심과 좌절감에 빠져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아무런 소망도 갖지 않으려 합니다. 마치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 있을 때 세상이 무너진 듯한 절망감으로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좌절감을 맛볼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왜 내가 떠나고 난 후에 어떻게 되느냐고 질문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다 낙심하고 침울해 있기만 하며 그 후에 주어질 놀라운 일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육신의 주님과 함께 있었던 때보다 더 강해지고 더 온전해지며 더 완전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에는 그들의 속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늘 그대로일 뿐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도 잘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들에게 깊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며 그들에게 확신을 가지게 하시고 그들속에 있는 모든 죄성을 치료하시며 시간과 공간의 제한없이 그들을 도우십니다.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오늘 이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오신 성령이 얼마나 귀하신 분이며 우리가 이분을 의지하지 않고 살며 이분을 소망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의 도우심없이 사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의사를 가까이 두고서 혼자 병을 치료하려고 이 약 저약을 먹는 것과 같고 가장 훌륭한 코치를 가까이 두고서 자기 혼자 시합에 나가려고 달밤에 체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만이 우리에게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신앙과 삶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의 능력을 의지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내 힘으로 살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보아도 단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해 지쳐 나가 떨어져 버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부메랑과도 같습니다. 멀리 날아간 것 같은데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는 삶의 결과가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성령을 의지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식없는 신앙적 열심만으로는 안됩니다.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지식이어야 합니다.성령께서 내 마음가운데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앞에 순종하려는 분명한 믿음의 태도를 보일때에만이 우리의 삶은 한없이 풍요로와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도 지식없는 열심만으로 주께 충성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듣고 살아서 움직이는 역동적인 믿음생활에 충만한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해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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