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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주권 (요 15: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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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치고 말 못하는 사람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의 뜻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말을 곧잘 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이것을 좀 더 풀이해서 해석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만 많고 실천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말을 듣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천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간단하게 한 두 가지로 정리를 해서 대답할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할 때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 적용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실제로 우리교회가 제자훈련을 시작하기 전, 프리셉트 성경공부를 통해 많은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전체 공부가 끝나면 각자 소그룹에 들어가서 그날 공부한 내용을 가지고 토의를 하게 되는데 적용부분에 가면 언제나 남에게 적용하는 예를 자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성경공부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들을때에도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말씀을 남에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내 남편이 꼭 들었어야 할 말씀인데 너무 안타까워'라든지 '아무개 집사가 저 말씀을 들었으면 자기 잘못을 알고 반성도 할텐데'라든지 적용이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적부터 하나님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았기 때문입니다. 시편을 묵상하고 지혜서로 불리워지는 잠언이나 탈무드를 읽고 그렇게 성장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어떻게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왕들과 그 나라를 어떻게 하실 지에 대해서도 잘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향해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어느 날 베드로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선지자중의 하나라고 하더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부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를 잘 압니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도 잘 압니다. 교회도 날마다 갱신되어져야하고 이 세상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큰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는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신앙생활 하는 동안 그런 질문은 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21절에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 모든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유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미워해서 핍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유대인들은 제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일까요?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일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조선시대때 암행어사제도가 있었습니다. 암행어사는 임금의 어명을 받들어 지방에 밀파되어 그곳 행정과 백성들의 실정을 조사하여 중앙으로 보고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특히 암행어사는 임금의 명을 직접받는 사람이기에 상당한 권세를 가집니다. 하지만 자신을 보낸 사람이 임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백성들의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다녔습니다. 그러다보니 원치 않는 봉변을 당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무슨 벌레 쳐다보듯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약 임금의 밀명을 받고 다니는 암행어사라는 사실을 알면 그렇게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대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공사가 한창일 때 공사일을 좀 도운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저를 교회에서 채용한 일용직 노무자인 것으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분이 저를 보더니 '어이 아저씨 거기에 있는 나무판 하나 좀 갖다 주시오'라고 했습니다. 제가 서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나무판을 주어 갖다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 교회에 담임목사인데요"

그 얘기를 들은 분이 얼마나 민망해 하시든지 '죄송하다'며 몇 번이나 사과를 하셨습니다. 물론 민망해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누군지 알면 사람의 태도나 행동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유대인들이 핍박하는 것은 자신을 보내신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을 보낸 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말은 암행어사를 보낸 분이 임금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핍박한 이유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교회 주변은 거의 다세대나 다가구주택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집들은 각층마다 아파트와 같이 분양이 되어 있기 때문에 주인이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한 건물에 주인이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건물의 주인이 함께 사는 경우도 있고 더러는 세만 주고 주인은 그곳에 살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인이 한 건물에 살면 여러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단점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집을 수리해야할 때 주인이 한 건물에 살면 불편한 점을 얘기하고 집을 수리하도록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먼 곳에 살면 고쳐달라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반대로 함께 살면 주인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개 주인들은 제일 위층에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물 청소한다며 위에서부터 물을 뿌리기 시작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나가서 도와야 합니다.

물론 '어느 날 청소를 합시다'라고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무작정 물 청소를 시작하면 하던 있는 일을 멈추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난감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른척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주인이 함께 살면서 '이렇게 하시오, 혹은 저렇게 하시오'라고 말하며 간섭하기 시작하면 세들어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집 없는 것도 서러운데 주인이라고 꼭 그렇게 티를 내야 하는 것이냐?'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땅에 보내신 것은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한다고 해서 단순히 자기의 것을 가지고 골탕먹이려 하거나 더 불편하게 만들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좋지 못한 습관을 고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우리들이 사는 주택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심방을 가보면 그 건물에 주인이 사는지 살지 않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대개 주인이 살지 않는 경우는 광고지가 현관문이나 아니면 현관옆에 있는 우체통에 덕지 덕지 붙어 있습니다. 물론 세들어 살지만 주인의식을 가진 분들은 그 광고지를 떼고 건물을 깨끗하게 청소를 하며 삽니다. 그러나 주인이 한 건물에 살지 않는 경우, 대개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집 현관문에 붙은 광고지는 떼지만 현관문앞에 있는 우체통 같은 곳에 붙어 있는 광고지는 떼지 않고 그대로 붙어 있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런 경우 십중팔구는 주인이 그 건물에 살지 않거나 산다면 게으른 주인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주인들은 건물전체가 가급적이면 깨끗하고 청결하게 유지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붙어 있는 광고지도 떼고, 현관문도 닦고, 집앞에 널려 있는 쓰레기도 치웁니다. 그것은 세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청결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죄가 가득한 상태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세와 권리를 가지고서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수하에는 수많은 부하들이 있습니다. 그중엔 천사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천사들을 보내지 않고 아들을 보내셨겠습니까?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비중이 클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는 온 세상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이 아들의 이름 앞에 복종하기를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을 얘기할 때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도를 알고, 그래서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면서 헌금생활을 하면 그것이 곧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정도로 단순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거기에 내 모든 것을 복종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유로 인해 자신의 재산이 압류 당하게 되면 공무를 집행하는 자들이 와서 딱지를 붙이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재산에 대해 내 마음대로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권리를 넘겨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 몸에 예수의 딱지를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 딱지가 붙는 순간 내 몸이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분께 모든 권리를 넘겨드려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 모든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제자들을 핍박합니까? 자신들의 권리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예수의 이름 앞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아도 힘들게 사는 우리들을 더욱 힘들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좀 적당하게 내 버려 두시지 왜 우리로 하여금 핍박받고 고난 당하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산다는 것이 때때로 버겁게 여겨질 때가 있는데 그런 우리들을 왜 괴롭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근근히 월급을 모아 이제 내 집 마련하고 알콩 달콩 좀 재미있게 살아보려고 폼 잡는데 갑자기 소유권이 이전되지 않았으니 집을 내어놓으라며 자기의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느 것도 내 것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들일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들이 제일 황당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벌어왔는데 예수 믿는다는 아내가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며 갖다 바칠때일 것입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땀을 흘리고 일한 것은 자긴데 자기에게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고 교회에다가 감사헌금 갖다바치고 십일조 떼고 하느냐? 는 것입니다. 도무지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우리를 보실 때에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들의 행동을 보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사람들은 자기의 것처럼 생각해서 세상을 향해 그것을 갖다 바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태양과 비를 주시며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셨는데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많이 차지하지 못한 것을 불평하고 있습니다. 이 상태는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입니다. 이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어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 때문입니다. 원래 사람은 만들어질 때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적인 관계로 창조되었습니다. 여기서 의존적이라 함은 로봇식으로 하나님에 의해 조종당한다는 의미가 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심을 깨달아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더 크시고 풍성한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그런 관계가 회복되어질 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과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아들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기까지 순종한다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다 순종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욕심이 많은 인간들이 그 이름을 거부하고 그에게 복종하기를 싫어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여전히 자기의 것이라 고집하며 자기 방식대로 살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온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고 더 아름답고 영원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뜻을 유대인들에게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이름 앞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그 이름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 이름에 복종하는 자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받으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고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더 잘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도 모든 것이 잘 되었는데 예수 믿고나면 더 잘되고 더 형통하고 더 복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이야기하는 것과 너무도 다른 것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앞에서 나의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 이름앞에 복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반역하던 무리들이 정복하러온 장군 앞에 자기의 모든 무기와 권리를 내려놓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처럼 예수의 이름앞에 나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이 나를 이 세상에서 크게 쓰실 수도 있고 그저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이 땅에서 오랫동안 살게 할 수도 있고 짧은 생애를 살게 한 뒤 데려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환경을 만나고 어떤 처지에 놓인다 할지라도 나의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겨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부터 나에게 그런 권리를 주장하십니까? 그것은 복음이 내 귀에 들리기 시작한때부터입니다. 22절을 보면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24절에 보면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자기 욕심대로 사는 자들이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도 하나님앞에서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예수께서 친히 오셔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그 말씀의 증거로 능력과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죄보다는 작은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복음을 듣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들과 복음을 듣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서도 자기의 것을 포기하기 싫어 여전히 자기 욕심대로 사는 자의 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하고 천사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다른 이방인들은 선지자나 천사같은 것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들은 그분이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말씀하시는 것은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가 행하시는 능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이야기했다면 그들이 믿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더 부자가 되고 싶었고 자기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얘기하면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정 반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자신이 온 것도 하나님의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 말이 반가울리 없습니다. 아니 그냥 방심하고 있다가는 목수의 아들에게 자기들의 것을 다 빼앗길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를 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도 핍박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말씀하기를 '죄는 다 똑 같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지 하나님 보시기엔 도토리 키 재기다' 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씀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죄도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난 후에 그 말씀을 무시하고 여전히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은 더 큰 죄에 해당됩니다. 아예 복음을 듣지 못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사람과 복음을 듣고도 여전히 자기 욕심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도 더 큰 책임감과 부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제 교회에서 저에 대한 위임식이 있었고 장로장립과 명예권사추대가 있었습니다. 위임식은 저로 하여금 이 교회를 떠나지 말고 정년때까지 이 교회에서 충성하라는 뜻입니다. 아마 훗날 하나님앞에 섰을 때 위임목사가 아니었던 때와 위임을 받은 이후에 저의 삶이나 행동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다르게 평가를 내리실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장로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사로 있었던 때와는 분명 다른 판단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장로는 그만큼 책임이 따르고 의무가 따릅니다. 집사때와 동일한 방법으로 충성하려 한다면 그분들을 지켜 보는 성도들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훗날 하나님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따져 물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복음을 들은 자의 자세가 어떤 것입니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나 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돈을 쓰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써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실 복음을 들으면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을 두가지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다 청산하여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든지 아니면 이 복음을 미친 짓이라 생각하여 아예 그 자체를 거부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중간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하나님앞에서 얼마나 정직하지 못한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단지 많은 사람을 붙들어 놓기 위해 복음을 희석시키는 중간지대를 만들어 놓고 있다는 얘깁니다.

성장이나 부흥이라는 대 전제하에 우리 스스로 중간지대를 용납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많이 모이면 곧 복음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거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신앙을 훼손시킬 엄청난 파괴력이 숨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제 교회 설립 10주년 예배를 드렸는데 어떤 마음으로 드렸습니까? 너무 바쁘게 지내다보니 미처 아무런 생각을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의 마음을 정리하며 뭔가 깊은 생각을 해야 할 때라고 여겨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훼손하는 중간지대를 만들지 말자는 얘깁니다. 지금 당장은 편한 것 같은데 그것이 결국 우리의 영혼과 신앙의 본질을 파괴하고 말 것입니다. 복음적이지 않은 것은 지금 당장은 우리에게 아픔이 되고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결단하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우리 함께 그렇게 되도록 노력을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아서 그분을 의지하여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26절과 2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왜 여기서 성령을 언급하시는 것일까요?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인간의 악한 마음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심이 사흘을 가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 있고 에덴에서 살고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교만과 거짓됨은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고칠 수 있습니까? 예수님앞에서 자기의 모든 권리를 복종시키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자기 뜻대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오직 예수께 자기의 모든 권리를 다 맡긴 자들 그들이 새로워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첫 표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 나의 것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것인데도 교만하게 나의 것인줄 알고 내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가장 귀한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은 아무리 악한 마음을 가진 자라도 능히 고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성령은 내 고집대로 살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셔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요청을 듣고서도 여전히 자기의 욕심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사는 자들이 있다면 하나님앞에서 비참한 심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사시렵니까?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에 근거하여 그 감동대로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내 욕심과 고집대로 사시겠습니까? 설립 1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의 교회에도 새로운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감동과 더불어 하나님앞에서 새로운 삶의 결단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랍니다. 굳게 닫힌 우리의 빗장을 활짝 열어 젖혀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로 발돋음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김해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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