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름다운 父子關係 (부자관계) (요 17:1~19)

  • 잡초 잡초
  • 210
  • 0

첨부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요한복음 17:1-19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한 달 동안 가정을 주제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가정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는 육신의 가족과 영혼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육신의 가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어머니 마리아, 자녀들을 낳고 일찍 돌아가신 것으로 보이는 아버지 요셉, 평범한 유대인의 이름을 가진 남동생 네 명 -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 그리고 ‘여동생들’이란 기록으로 미루어 최소한 2명의 여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따라 30세까지는 목공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적 사역을 시작하시자 집안에, 특히 동생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형이 밖으로 돌아다니며 대중적 사역을 하고 복음을 전하니 반대세력이 점점 늘어나 가족이 핍박을 받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도 비난하니까 이러다 큰일나겠다싶어서 한번은 동생들과 어머니가 예수님을 데리러 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가 누구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분들이 내 형제요 내 어머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처음엔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확신을 얻었습니다. 바로 아랫동생인 야고보는 후에 예루살렘공회 의장이 되었고 신약의 야고보서를 썼습니다. 그 외에는 예수님의 가족에 대해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과 영적인 아버지,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부자관계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가정에 유익한 교훈을 얻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종종 ‘사랑한다’고 아들에 대한 사랑을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보면 알지, 꼭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첫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강에서 나오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세례는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중요한 사건들이 있습니다. 백일, 돌, 생일, 첫걸음마, 처음으로 말을 시작한 날, 유치원 입학, 초등학교 입학, 악기를 배워 첫 연주회를 한 날 등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날에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고 일기에 기록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그 중요한 순간에 자기의 사랑을 확인해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변화산상에서 찬란하게 변형되어,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받을 십자가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모세, 엘리야와 나누고 예루살렘으로 출발하려는 찰라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니 너희가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개인적으로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표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행복해지려면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자주 말해주어야 합니다. ‘지붕위의 바이올린이스트’(Fiddler on the Roof)이란 영화를 보면 노부부의 딸이 한 젊은이를 사랑하여 결혼하려 합니다. 그들의 사랑을 보고 감동한 남편이 이제 할머니가 된 아내에게 “여보, 당신도 날 사랑하오?” 묻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사랑? 여태까지 밥도 해주고 아이들도 낳아주며 빨래도 해주고 함께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어요?” 하며 화를 냅니다. 물론 꾸준히 밥해주는 것을 보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인간은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듣고 싶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최대의 행복입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내 인생은 의미가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Somebody loves me.”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 무슨 유행가 가사 같지만 이것을 확인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확인한 아이들은 행복하고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지만 그 반대 경우의 아이들은 마음이 메말라집니다.

저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미국에서 청소년 집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영어로 설교할 수 있는 목사가 마르크 김 목사와 저 둘 정도 밖에 없었기 때문에 전국으로 다녔던 것입니다. 그 때마다 늘 비슷한 현상을 보았는데, 설교를 들은 청소년들이 기도시간에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한 맺힌 것이 많아 저렇게 통곡하나?’ 해서 설교를 마치고 대화를 해보니 그 젊고 여린 가슴들에 공통적으로 맺힌 한이 있었습니다. 부모와의 갈등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잘할 때에는 마음속으로만 뿌듯하게 생각하고 입 다물고 있던 부모들이 아이들이 잘못할 때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는 한번도 나를 칭찬한 적이 없어요. 엄마도 아빠도 나를 싫어하세요. 맨 날 나의 잘못만 지적해요.” 사랑한다는 표현은 하지 않고 야단만 침으로서 부모가 자녀를 미워한다는 오해를 심어준 것입니다. 저는 ‘부모가 참 조심해야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예수님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신 것처럼, 여러분의 아이들도 부모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짐작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분명히 듣고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보, 당신 나 사랑해요?” “쓸데없는 소리.” “지난 15년 동안 한번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나를 정말 사랑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아니면 아니라고 말했겠지. 내가 옛날에 사랑한다고 그랬잖아.” 그렇지만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해요. 들으면 좋아요. 친구들끼리, 성도들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확인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혹시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오해하기 쉽습니다. 자녀들에게, 부모님들께, 부부들끼리 사랑한다는 말을 종종 하십시오. 성부도 성자에게 그렇게 했는데... 가정에 꼭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간에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의 정서성장에 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밖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혹시 친구들이 나를 거부해도 집에 돌아오면 부모님과 가족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난 달 ‘오늘의 양식’ 서문에 쓴 얘기는 제가 직접 들은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한번도 날 격려해주지 않았습니다. 한번만이라도 격려해 주셨다면 아마 내가 좀 더 잘 되었을 것입니다.” 옆에서 어머니가 “내가 널 사랑하는지 알지 않니? 하나님도 널 사랑하시잖니?” 했습니다. 그 아들은 어머니의 사랑은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사랑과 격려는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야단만 쳤기에 그 아이의 마음속에는 늘 불안이 있었고 인생을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여러분,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는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권위자요, 최고의 인물입니다. 따라서 부모에게 자주 인정받으면 자식의 성장에 큰 축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마십시오. 돈 드는 일도, 시간 드는 일도 아닙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께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다’ 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런 표현들을 주고, 받고, 확인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아들은 아버지를 자주 부르고, 심지어 아버지를 드높여 칭송했으며,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으시면 종종 산이나 들이나 광야 등 조용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일이 바쁘고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낮에 이야기할 시간이 없으면 밤에 혼자 산에 가서 밤새도록 성부와 대화하셨습니다.

부모와 대화를 잘하는 자녀는 건강합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부모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딸에게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는데 말하면 혼날까봐 숨기고 7개월이나 지났다고 해 봅시다. 그렇다면 큰일입니다. 남자를 만나자마자 엄마에게 달려와 “엄마 버스 안에서 한 남자를 만났는데...” “만날 데가 없어서 버스 안이냐?” 하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남자를 만났든지, 어떤 여자를 만났든지 부모에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가정에 조성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나를 사랑하고 인정해준다는 확신이 없으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말끝마다 톡톡 쏘고 비판하고, 아니다, 안된다 하니까 아들딸들이 숨기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함부로 말했다가는 큰일 나니까요. 그러나 설령 사랑에 실패했더라도 부모님께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엄마에게만 할 수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빠에게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사랑을 확인해줘야 합니다. 자녀가 늘 어머니를 부르고 아버지를 부르면서 부모 자식 사이에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26절까지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이 아버지를 몇 번이나 불렀는지 봅시다. 1절에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5절에 “오오 아버지여.” 11절에 “거룩하신 아버지여.” 21절과 24절에 “아버지여.” 25절에 “의로우신 아버지여.” 무려 6번이나 불렀습니다. 4절마다 한 번씩 부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얼굴을 맞대고 주목을 받으면서 대화하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도 부모나 어른들과 대화할 때 늘 부모님을 부르면서 이야기하면 주의를 집중해주실 것 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 번은 아버지를 드높이면서, 칭찬하면서 부르셨습니다. 11절에 “거룩하신 아버지여.” 25절에 “의로우신 아버지여” 하며 아버지의 장점을 높여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자식이 아버지를 칭찬하면 아버지가 어쩔 줄 몰라 하십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을 읽고 인천의 한 교사가 아이들에게 아버지를 칭찬하는 글을 쓰게 한 다음 그것을 집에 가서 실행하고 그 결과 아버지의 반응이 어땠는지를 보고한 내용을 글로 썼습니다. 평소 불평이나 하고 용돈이나 달라던 아이들이 갑자기 아버지를 칭찬하니 아버지가 기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아빠는 “무슨 그런 소리를 하고 있어” 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야단까지 맞은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다시는 아버지 칭찬을 하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그런 아버지는 자신도 칭찬을 받아보지 못했고 또 아들이 자신을 칭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한 번 칭찬에 아버지가 너무 흡족해하셔서 그때부터 뭐든지 많이 사주셨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도 칭찬이 필요합니다. 어머니도 칭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칭찬하셨습니다. 저는 한 때 사람의 성품을 연구한 적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람의 성품은 복합적입니다. 어떤 기질, 어느 성품이 좋으냐는 질문을 많이 하지만 제일 좋은 성품이란 따로 없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각각 장점이 있습니다. 모든 성품은 최소한 10가지 이상의 장점을 갖고 있으며 반드시 단점도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장점을 부각시켜야 합니다. 인간이 언제 어떻게 성공을 합니까? 우리의 장점이 부각될 때입니다. 단점이 부각되어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주에 국민일보로부터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뽑혀 대상을 받았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 교인들의 장점들이 모여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의 단점들을 모아서 위대한 일이 이루어집니까? 그렇다고 우리가 단점이 없나요? 다 있지요. 있지만 단점들을 모두 묻어놓고 장점들을 모으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이 땅에, 이 자리에, 이 교회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날은 신문을 보기가 참 싫습니다. 왜 매번 똑같은 단점을 지적하며 싸울까요? 그래서 사람도, 정부도, 국가도 싫다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저는 어제 읽은 글로 또 한번 속이 상했습니다. 계속해서 좋지 않은 것만을 지적하니까 심리적으로 힘듭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장점을 드러내어 아버지를 부른 것처럼 여러분도 늘 자식은 부모의 장점을 드러내고, 남편은 아내의, 아내는 남편의, 부모는 자식의 장점들을 부각시켜주고 칭찬하고 대화해서 여러분과 제 가정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시기를 원합니다.

셋째로, 부자간에 서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내가 영원 전부터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화를 이제 나에게 더욱 더 주셔서 내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본문 1, 4, 5, 10, 22절에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아버지를 서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Johnny Carson Show’(자니카슨 쇼)를 종종 봤습니다. 그 토크쇼의 출연자들은 매우 유명한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칭찬을 하니까 자연스럽게 모두 다 대단한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서로 칭찬하니까 서로 좋아보였습니다. 못은 망치로 때릴수록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 비난하고 공격하면 서로 작아져 버립니다. 서로 죽고 망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서로를 높여주셨습니다. ‘서로 영화롭게 한다’는 쉽게 말하면 ‘서로 돋보이게 해준다’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상대방이 돋보이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작년에 아세아신학연맹 이사회 일로 싱가포르에 갔었습니다. 총무인 싱가포르인이 참 좋은 교회에 다니는데 그 교회에 있는 신학교의 학장이란 말을 듣고, “당신의 교회에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하고 가 보았습니다. 그 교회는 듣던 대로 정말 훌륭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계획하고 있는 많은 프로그램들이 이미 그 교회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은 미국에 다니러가셨기 때문에 저는 수석 부목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신들은 목회를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물으니 이렇게 답하더군요. “우리는 모두를 서로간에 돋보이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5-6명의 구역식구들이 모일 때마다 서로 돋보이게 해주고 격려해주고 힘주는 일들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목사들이 수십 명인데 그 중에 설교를 잘하는 목사가 셋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세 분에게 자꾸 설교를 시킵니다. 만약에 설교를 잘 못하는 목사를 자꾸 세우면 그 설교 때문에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됩니다. 또 설교를 못한다고 그 목사가 자꾸 비난을 받으면 그 목사가 나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왜 못하는 것을 시키겠습니까? 우리는 각 사람이 잘하는 것만 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각 사람을 돋보이게 만들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가정이 되려면 식구들이 서로 장점을 돋보이게 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서로 영화롭게 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좋게 보이고 서로 돋보이도록 가족이 함께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권위와 사역을 위임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줄 수 있는 권위와 통치권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고, 또 제자들과 말씀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네가 땅에 내려가서 위임받은 책임을 다 하고 오라” 하셨습니다. 아들을 믿어주고 스스로 해결하도록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아들의 가치를 인정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른들이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자식들의 방을 깨끗이 치워주는 것입니다. 계속 자식들의 방을 치워주다 보면 결국 여러분은 자식을 자기 방도 치우지 못하는 무책임한 아이로 키우는 꼴입니다. 그러면 그 아이의 인생은 망합니다. 사회에 나가면 누가 대신 해줍니까? 그 아이를 망치려거든,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버지 어머니가 다 해 주십시오. 부모가 언제 자식을 다 키웠는지 알 수 있습니까? 부모의 도움 없이도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고 꾸려나갈 수 있을 때입니다. 아이가 어려서 신발 끈을 잘 묶지 못하면 엄마가 처음 몇 번은 묶어줘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 매도록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르치고 훈련시켜 줘야 합니다. 스스로 자기 방을 치우게 하고, 자기 양말을 치우게 하여, 작은 것에서부터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아이로 키워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자기 몫을 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돈 많은 가정은 자식들의 모든 일들을 돈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자녀 여섯 명 중 단 한 명도 제대로 된 자식이 없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가 나서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안됩니다. 고생해야 한다면 고생을 겪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이가 책임감을 갖고 성장합니다. 자식 고생 안 시키겠다고 부모가 다 돌봐주면 그 자식이 뭐가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고생스럽다 해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녀의 일을 자녀에게 맡겨주어야 하고 자녀들은 자신의 일들을 배워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고, 그로 인하여 자기가 쓸모 있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갖게 되고, 결국 사회에 진출해서도 매사에 자신 있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여러분에게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해당되는 것들이 있다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우리가 꼭 배워서 우리의 가정이 과거 언제보다도 더 좋은 가정이 되기를 원합니다. (김상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