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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왼손도 모르는 구제 (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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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주부가 길에서 휴지를 줍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할머니는 무거운 종이 짐을 나르다가 지쳤는지 길가에 앉아 쉬고 계셨습니다. 안 됐다는 생각에 젊은 주부는 할머니에게 오천 원을 건넸습니다. 식당에서 한 끼 식사라도 해결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빙긋 웃으면서 오천 원을 사양했습니다. 자기는 남에게 도움을 받을 만큼 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종이 줍는 것은 남을 돕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자기는 집도 있고 남편과 자식이 있어서 먹고 사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답니다. 단지 평생 자신 만을 위해서 살았다는 것이 부끄러워 이제라도 내 손으로 번 돈으로 남을 돕자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젊은 주부는 오천 원을 건넸던 손이 도리어 부끄러웠습니다. 남을 위해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계신 할머니를 초라하고 궁하게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제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제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 장은 크리스천의 은밀한 영성 세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제, 기도, 금식 이 세 가지는 드러내지 말고 은밀하게 해야 할 영적 삶입니다.

구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골방에서 문을 닫고 하라고 했습니다. 금식은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면서 티를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본문 1 절은 구제, 기도, 금식에 대한 교훈의 표제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 6:1>

구제, 기도, 금식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면 안 됩니다. 구제, 기도, 금식을 은밀히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구제는 이웃에게 하는 선행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구제, 기도, 금식은 믿는 사람들의 경건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가 자칫하면 사람들 앞에서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이 세 가지 경건이 드러나면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땅에서 그 상을 이미 받은 것이 됩니다.

구제, 기도, 금식 이 세 가지 경건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4 절에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6 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8 절에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가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면 하나님이 은밀히 보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이 갚으십니다.

갚는다는 개념은 빚을 졌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대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갚으실 의무를 가지십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갚으시겠습니까? 그것을 성경은 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제를 하려면 돈이 들어갑니다. 구제는 꿔주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 없이 그냥 베푸는 것입니다. 구제를 하면 할수록 나는 손해입니다. 그런데 그 손해를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갚아 주실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제를 은밀히 하는 것입니다. 만약 구제를 숨기지 못하면 하나님은 갚아줄 의무가 없어집니다. 이미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기 때문에 하늘의 상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제는 사람 앞에서 감추기가 어렵습니다. 기도나 금식은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제는 사람에게 하는 선행이기 때문에 감추기가 어렵습니다. 적어도 구제를 받는 사람에게는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 삼자를 통해서 전하면 감출 수는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를 수가 있습니다.

이 왼손도 모르는 구제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제의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 가운데 자기를 나타내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랑거리들을 널리 알리고 싶어 합니다. 유명해지는 것이 성공의 잣대입니다.

어떤 사람의 명함을 보면 그 안에 그 사람의 자랑거리가 가득 담겨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입니다.

사람의 욕구 가운데 자기실현의 욕구가 있습니다. 성공한 인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 가운데 남들 앞에서 내세울 만한 것이 있으면 총동원합니다. 옷을 골라 입고 화장을 하는 것도 그런 욕구들입니다.

그런데 자랑거리 가운데 구제는 아주 고상한 자랑거리입니다. 자기가 구제하는 사람으로 알려지면 고상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것은 박사학위보다, 부자로 소문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구제를 통해서 은근히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구제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외식입니다. 이들은 구제하면서 나팔을 붑니다.

나라에 재난이 일어나면 방송국에서 모금운동을 합니다. 방송국에서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 열심히 성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을 밝혀줍니다. 명단이 나오고 얼굴 사진이 나옵니다. 이것은 방송국에서 사람들의 외식하는 심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방송국에서 대신 나팔을 불어줍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많이 가지고 나옵니다. 이 방송의 위력으로 많은 돈을 거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하는 구제는 그 빛을 잃어버립니다.

이렇게 구제를 통해서 외식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경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무시하십니다. 그의 구제가 얼마나 경건한지 불경스러운지를 판단하십니다.

그 동기가 불순하기 때문에 그런 자의 구제를 역겨워하십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알아달라는 마음으로 집을 팔아서 바쳐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른다 하실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집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가지고 나왔습니다. 전부를 바치기에 아까운 생각이 들어서 얼마를 숨겼습니다. 그러고도 전부인 양 가지고 나왔습니다. 사실 집을 팔아 헌금한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헌금이 불경스러움으로 더렵혀졌습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하나님께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멋진교회는 헌금을 할 때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드리자는 뜻입니다. 저는 교회를 개혁하면서 익명의 헌신을 참 잘했다고 봅니다. 앞으로도 이 익명의 헌신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계속 해나갈 것입니다.


왼손도 모르게 하라는 구제의 두 번째 의미는 자기 자신도 구제한 일을 잊으라는 뜻입니다.

구제도 사실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구제를 할 때는 할까 말까 망설입니다. 자기하고 의논하다가 결국 구제를 하면 스스로 자신을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지만 자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 이유는 구제하는 자신에게 그런 명분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 도와준 것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야 합니다. 구제를 해놓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자기 올무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나중에 구제를 받은 사람이 찾아와서 고마워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가 그랬나?” 하면서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구제입니다.

이 구제에 대해서는 알츠하이머라는 병에 걸려도 좋습니다. 구제를 하는 순간 누구에게 얼마를 했는지 잊어버리는 것은 복입니다.

구제를 해놓고 그걸 기억하고 있으면 서운한 마음이 들게 됩니다. “저 사람은 내가 얼마를 도와 줬는데 은혜를 갚을 줄 모른다.” “저는 감사를 모르니 다음에는 구제하지 말아야 하겠다.” 구제를 하면서 저를 굽실거리게 만듭니다. 자꾸 구제를 하면서 생색을 내게 만듭니다. 그래서 구제를 기억하는 것은 점점 나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구제는 하고 곧 잊는 것이 좋다는 뜻으로 왼손도 모르는 구제를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도와 구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복입니다. 구제할 수 있는 그 자체가 이미 상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채워주지 않으셔도 구제할 수 있는 자체를 복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상이란 우리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것입니다. 기쁨과 평안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질로 갚아주시는 것보다 기쁨과 평화로 채워주시기를 소망하십시오.

구제는 기분이 내킬 때만 해서는 안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구제할 대상이 생겼을 때 일회적으로 하고 맙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성은 구제를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는 구제의 십일조가 있습니다. 이 구제의 십일조는 3 년에 한 번씩 드렸습니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의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4:28∼29>

이 구제의 십일조는 기존의 십일조를 드리고, 나머지 10분의 9에서 다시 십일조를 뗀 것입니다. 이 구제의 십일조는 어려운 이웃을 돕고 격려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나그네와 고아, 과부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에는 7 년에 한 번씩 면제년을 두었습니다. 이 면제년은 빚으로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7 년에 한 번씩 어떤 빚도 탕감해 주는 법입니다.

“매 칠 년 끝에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무릇 그 이웃에게 꾸어 준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 해는 여호와의 면제년이라 칭함이니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인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 15:1-4>

가난한 자들에게 빚은 해마다 늘어나는 악순환의 고리입니다. 빚에는 이자가 있고, 원금과 이자를 갚아 가자면 어려운 살림은 날로 오그라듭니다. 그래서 면제년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일종의 해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위하셨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은 언제나 하나님 편이었습니다.

추수를 할 때도 밭 한 귀퉁이는 남겨두게 하셨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여분의 몫으로 두게 하신 것입니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5:10>

이렇게 구제는 즉흥적이기보다는 원칙을 정해놓고 해야 합니다. 구제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소득에서 매번 일정한 비율을 떼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월 마지막 주일에 부스러기 저금통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 부스러기를 모으는 운동은 하루에 고작 300 원을 저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달에 만원을 만들어서 독거노인과 소년소녀 가장을 돕고 있습니다.

이 부스러기를 모으는 것은 구제라고 말하기에 부족합니다. 다만 교인들에게 구제를 생활화하기 위해서 시작한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우리는 물질로도 주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로 주님을 섬기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헌금과 구제와 대접하는 생활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돈이 듭니다. 돈에 인색하면 결코 영적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가난한 이웃에게 언제나 후하고 넉넉하면 그 헤아리는 대로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구제는 넉넉한 사람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실컷 구제하겠다는 사람은 많습니다. 구제를 나중에 미루는 사람, 돈 생기면 하겠다는 사람은 결코 구제하지 못합니다.

하루는 테레사 수녀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있는데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테레사 수녀의 구제하는 방법에 딴죽을 걸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빵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다. 매번 빵을 해결해 주면 게을러지고 의타심이 생겨서 자립할 수가 없다. 그러니 생선보다는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핀잔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는 구제는 병들어 낚싯대조차 잡을 힘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낚싯대를 잡을 힘이 생기면 그 때 여러분들이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시지요. 저는 쓰러져 있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계속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절대 빈곤에 시달리는 이웃이 많습니다. 이들에게 언제나 눈을 돌릴 수 있는 영적 그리스도인들이 되십시다.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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