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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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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 말로리(Mallory)라는 사람이 에베레스트 산에 도전했습니다. 1차 도전에 실패하고, 2차 도전도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도전했을 때 눈사태가 일어나 말로리 대장과 여러 대원이 참사를 당했습니다. 살아남은 등산 대원들이 영국에 돌아왔을 때 대대적인 환영 겸 위로하는 파티가 열렸습니다. 파티 장에는 거대한 에베레스트 산의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 때 생존해 돌아온 대원 중 하나가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노려보더니 펜을 들어 사진 위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에베레스트여, 너는 세 번 우리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더 높아지지 않을 것이나 우리의 꿈과 힘은 날마다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같은 것을 보면서도 사람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생각이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짓기도 합니다.
나치 독일의 비참한 수용소에 대한 관찰 기록인 프랑클(Victor Franckl)박사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수용소에 있는 인간상을 이렇게 구분해 볼 수 있었다.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곧 쇠약해졌다. 소망을 끝까지 가진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았다. 자기 혼자서 소망을 가질 뿐만 아니라 절망 속에 있는 이웃들을 도와주고 소망을 계속 갖도록 격려하던 사람은 몸도 마음도 가장 건강한 상태에 있었다.”
그래요.
끓고 있는 물주전자를 무심하게 쳐다 본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와트(Watt)는 거기서 짐을 끌고 가는 증기 기관차를 보았습니다. 번개를 보고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프랭클린(Franklin)은 그 속에서 어둠을 밝히는 전기를 보았습니다.

어느 날 조각가 로댕(Rodin)이 한 좋은 화강암 바위 앞에 섰습니다. 로댕에게 그 바위는 인생을 깊이 생각하며 고민하는 한 젊은이로 보였습니다. 얼마 후 이 바퀴는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쥐를 보면 많은 사람이 징그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디즈니(Walt Disney)는 같은 쥐를 보면서도 평화와 박애와 자유사상을 대표하는 애교 있는 미키 마우스를 보았습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성적이 나쁘고 엉뚱한 질문만하여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보지 못하는 것을 내 아들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그렇게 그의 수많은 발명은 실로 볼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에서부터 탄생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매력적인 말 중 하나는 아마도 “불가능은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라인홀드 니이버와 필의 이론으로 힘을 얻은 이 말은, 미국 ‘수정교회’의 로버트 슐러 목사에 의해 목회에서 확고한 자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불가능은 없다”는 이 말은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것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대부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은 “인간은 무력하다“는 것이 그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인간은 힘이 없습니다. 인간은 아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당연한 겁니다. 죄를 이길만한 힘을 사람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죄를 지어도 애통하거나 회개가 없습니다. 원래 인간은 그런 나약한 존재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나약한 인간이 무엇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하고 그저 기도하는데 열심을 다했습니다. 나는 힘이 없으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뭔가 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다가 “불가능은 없다”는 말이 영향력을 끼쳐 가면서 교회가 커지고 교회 건물이 대형화 되었습니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가 아니라 “뭐든지 할 수 있다.”로 바꾸어진 겁니다. 그리고 해냈습니다.
사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힘은 대단합니다. 그가 신앙인이든 아니든 사람은 절망 가운데서도 쓰러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문제는 “나는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 같은 게 무얼 하겠느냐?”는 생각이 그 자신으로 하여금 무슨 일이든 자신 없게 만듭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가능은 없다”라는 이 말은 마치 보약과도 같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은 기독교 신앙을 잘못 이끌어 가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유한성을 전제고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인간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은 오히려 이론상으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불가능은 없다”는 이 말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더 큰 혼란을 가져 왔습니다. 그 일의 결과가 하나님의 능력인지 사람의 능력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 입니다. 대형화 된 교회의 목사님을 보면서 “그분은 참 능력 있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교회의 목회자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목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생각하고 또 그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되어진 일이 결과에 따라 사람의 능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가복음 16:18에,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 중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을 믿고 독을 마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기의 믿음을 보이기 위해 독약을 마셨다가 죽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그렇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한 사람은 죽었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하시지 않으십니다. 사랑과 공의로 하십니다. 당신과 사람 사이에 맺은 약속에 따라 하십니다. 그것은 “무엇이든지”가 아니라 약속 안에서 “모든 것”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최근 사회에서 많이 이야기 되고 있는 권력형 비리를 봅니다. 유전사업이나 행담도 사업에 끼어든 권력자들, 리베이트들 받거나 공금을 유용한 노조의 간부들,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에게 위임된 범위 안에서 모든 것을 해야 할 사람들인 겁니다.

에덴동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겁니다.
본문의 사도 바울 고백 역시 그렇습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 대한 우리의 오해는 “주님께서 내게 능력 주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능력으로 병자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사람들 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라고 합니다.
두 가지 의미를 봅니다.
하나는, 그 능력의 주인이 주님이시라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했어도 그것을 가능케 하신 분은 주님이시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능력을 주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범위 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주님 안에서 입니다.
에덴동산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않는 범위 안에서 동산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먹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니까,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안 되냐 하는 불만 생기고, 끝내 그 범위를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소위, 능력 있다는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능력 주셨기에 그 능력으로 무엇이든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무엇을 할 수 있게 하십니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의 모든 것은 무엇입니까?

1.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탄생, 생애, 그분의 말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 재림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 중 어느 하나도 우리의 이해로는 믿을 수 없는 겁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마리아 자신도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고 반문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다 설명되지 않습니다. 나사로도 죽었다가 예수께서 살리셔서 다시 살아났는데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부활이라고 하지 않잖아요.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 그도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시고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는데도 못 믿겠다고 봐야 믿겠다고 그리 말했습니다.
성경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꽉 차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로 시작되는 첫 머리부터가 믿겨지지 않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바로와 싸우는 모세의 기적, 만나, 메추라기, 반석에서 나오는 물. 풀무불 속에 던져졌지만 머리카락 하나 그슬림도 없이 살아난 다니엘의 세 친구, 사자굴 속에 던져졌지만 살아난 다니엘, 골리앗과 싸워 이긴 소년 다윗 이야기 등등.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에게도 나타났습니다. 아람 사람 군대 장관인 “나아만” 그는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 집의 종으로 있는 이스라엘 소녀의 말은 듣고 이스라엘로 엘리사를 만나러 갑니다. 엘리사는 직접 보지도 못하고 엘리사의 종이 이렇게 하라고 전해주는 말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화를 내며 그냥 돌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아니, 요단강 물에 일곱 번 씻으면 몸이 깨끗해진다니요?” 그러나 그리 하였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살이 마치 어린아이 살 같이 깨끗해졌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 인간의 상식이나 이해로는 믿기가 불가능한 이야기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믿도록 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이 믿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던 겁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은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나와 앉아 있으니 여러분 스스로 믿은 줄 아십니까? 여러분 스스로 믿게 되어서 예수 믿으셨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다 이해가 되고 깨달아져서 예수 믿으신 겁니까?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겁니다.
그렇기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입니다.”하고 베드로가 말하자, 예수님은 “시몬 바요나야,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것은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복 있는 사람인 겁니다.

2.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십니다.

농부에게 “당신은 가을에 추수할 소망을 꼭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권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연히 그들이 가지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을 기독교의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 참 소망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38년 동안 그 사람은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했을 겁니다. 용하다는 의원 찾아 다녔을 거고, 좋다는 약도 다 먹어 보았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점쟁이 찾아가서 물어보기도 하고 푸닥거리도 해 보았을 겁니다. 그래도 안 되니 마지막 기적을 바라고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물이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물이 움직여도 그는 빨리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만치 몸이 쇠약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는 병 고침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그 사람은 “저 베데스다 물이 움직일 때 누군가 나를 넣어주기만 하면 나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이 움직여도 스스로 들어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의 소망은 자녀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준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75세 때입니다.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에 되었습니다. 그 아내의 나이는 89세 입니다. 아이를 나를 수 있는 능력도 다 멈추었습니다. 이런 나이에 아이를 낳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비정상 입니다. 누가 보아도 미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거나 바라지 않습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한 것을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것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해 놓은 선거 공약보다 더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구원, 생명, 하나님의 나라, 이거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겁니까? 그런 것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 하는 거고, 또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생각이나 할 수 있는 겁니까? 누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까?
그러나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가능합니다.
능력 주시는 그분이 바로 구원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시기 때문입니다.

3.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를 미워하는 사람 너의 원수 되는 사람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내어주고,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내밀라 하셨습니다.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까지도 따라가 주라 하셨습니다.
겉옷 달라는 것은 필요해서, 꼭 있어야 하기에 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것 아닙니다. 힘으로 빼앗는 겁니다. 그런데 주라는 겁니다. 오른 뺨 때리는 것도 내가 잘못해서 맞은 것 아닙니다. 힘 있다고 때린 겁니다. 억울하게 맞은 겁니다. 그래도 왼 뺨까지 내밀라는 겁니다.

어느 목사님 아들이 반 아이를 때렸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성경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 밀라고 하셨는데 너는 왜 다시 그 아이를 때려주었느냐?”고 야단쳤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의 말 “그래요. 오른뺨을 때렸으면 예수님 말씀처럼 왼뺨을 내 밀려고 했는데 이 녀석이 왼뺨을 치잖아요. 그래서 덤벼들어 때려 주었지요.”
오리를 가자는 것도 그냥 심심하니 동무하자고 하는 것 아닙니다. 자기가 들고 가야 할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가자는 겁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 하십니다. 오리가 아니라 십리까지라도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게 어디 가능한 말씀입니까?

부부지간에도 조금 기분 나뿐일 생기면 말로 안 하는데요. 같은 교회 다녀도 조금이라도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말도 안하고 인사도 안 하는데요. 심지어 하나님도 내 마음에 안 들면 신앙생활 포기 하는데요.
그런데 원수를 사랑해요?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정말 그건 정말 불가능 합니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신의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수 된 여러분과 저를 친구 삼으시고, 여러분과 저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그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이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그랬습니다.” 하고 기도하십니다.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죽이려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도저히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할 수 있다고 보여주셨습니다.
“나에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는 바로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우리는 도저히 사랑 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 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게 하는 힘이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사랑 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참 사랑은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안에서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듯,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하고,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고, 사랑 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주님의 능력 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과 우리가 다른 게 있다며 뭐겠습니까?
그럼요.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믿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 구원, 생명, 이런 걸 우리는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믿지 못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바랄 수 없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와 사랑을 우리는 바랍니다. 다른 사람은 상상도 못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우리는 가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도저히 사랑 할 수 없는 원수조차 우리는 사랑 합니다.
그것이 나에게 주시는 그분, 곧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잖아요? 여러분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거라면 뭐가 문제고 뭐가 걱정되겠어요?
그런데 그게 여러분의 능력으로 됩니까?
사도 바울. 그의 말년에 감옥에서 그의 살아온 날을 봅니다. 그 엄청난 일들, 어떻게 그것을 해냈을까? 감옥에 갇히고, 매도 맞고,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어떻게 복음 전하며 죽는 영혼들을 살려내는 일들을 해냈을까? 인간적으로 보면, 감옥에 갇혔을 때, 매 맞았을 때, 수많은 위험에 처했을 때, 그만 두었을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그 불가능한 일들을 해냈다니…….
그렇기에 그것은 자기의 능력이라 할 수 없는 겁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했다면 벌써 그만 두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주님 주시는 능력이었던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불가능한 일들을 해 낼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능력 주시는 줄 분명히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능력을 사모하십시오.
시편 105편에 보면, “여호와를 구하라”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하라“ ”그 얼굴을 항상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분은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며,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하나님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이며, 약속의 땅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황우석 교수. 그는 고1 때 전교 480명 중 400등이었답니다. 그런 사람도 세계를 놀라게 하는 일을 해냈습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능력 주시는 그분이 계시는데 우리는 왜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증거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데 왜 그분께서 능력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문제는 예수님의 능력 받아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능력주시는 그분을 위해 하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허락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올림픽의 영웅 제시 오웬. 그는 어릴 때부터 병을 앓아 빼빼라는 별명을 듣던 흑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오웬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개선한 학교 선배를 환영하는 환영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환영식 강당에는 많은 학생들이 가득 찼습니다. 어떤 학생이 그 금메달을 보고 선배에게 어떻게 메달을 따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선배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노력한 결과라고 대답했습니다. 오웬은 이 말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환영회가 끝나고, 오웬은 그 선배에게 다가가서, “나 같이 약한 사람도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선배는 물론 할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병약한 흑인 소녀 오웬은 그날부터 꾸준히 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영국 런던 올림픽에서 육상부분 4관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그의 모교에서 환영식을 베풀고, 그에게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나를 4관왕으로 만들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은 못 보는 것을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도 못하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환경이 힘들고 어려워도 오히려 그 안에서 소망을 가집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미워 원수 같은 사람도 오히려 사랑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주님의 능력에 여러분과 저에게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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