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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소중한 것 (마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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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에 관한 7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가운데 불과 한 절로만 되어진 비유가 오늘 본문의 소위 ‘밭에 감추어진 보물’입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일구다가 뜻 밖에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가진 돈을 다 모아서 그 밭을 샀습니다.
몇 가지 미리 알아야 할 사항은, 밭을 일구는 사람은 그 땅의 주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소작인일 것입니다. 돈을 주고 그 땅을 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땅의 주인은 그 땅에 보물이 있는 줄 몰랐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보물은 그 땅 주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 보물을 자기가 감추어 두었다면 결코 그 땅을 팔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해석상의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고 있는 것 없는 것 다해서 돈을 장만하여 그 밭을 산다면 과연 정직한 일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교활한 짓이라고 말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질문에 어떤 이는,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서 샀느냐, 당신이 그 밭을 내게서 샀느냐에 따라서 정직하냐 부정직하냐가 결정 되겠구먼” 하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 밭을 땅 주인으로부터 샀다면, 나는 그 일이 옳다고 주장할겁니다. 내가 가져야 하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 땅을 나에게서 샀다면 나는 그 일이 옳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땅을 팔았지, 그 땅의 보물을 판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더구나 그 땅에 보물이 있는 줄 알면서 아무 말 안하고 땅을 사간 그 사람이 나쁜 놈 이라고 말할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어떤 그러한 윤리적인 상황에 대한 말씀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제로 그리한다면 양심에 어긋나는 일일 것 같으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말씀일까?
하나는, 우연한 발견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이야기는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던 일입니다. 팔레스틴은 자주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침략군들이 쳐들어오면 집안을 몽땅 떨어가기 때문에 재물을 어디에다 감추느냐 하는 것이 큰 고민거리였습니다.
근동지방에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지역의 부자들은 보통 재산을 3등분 하였습니다. 그래서 3/1은 사업투자 및 생활에 사용했고, 3/1은 여차하면 들고 달아날 수 있도록 보석으로 바꾸었고, 3/1은 땅에다 묻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묻어 놓고 죽어버리면 아무도 모릅니다. 다시 그 땅을 산 사람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것은 땅을 일구는 사람에게 발견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입니다. 아무도 보물이 그 땅에 뭍혀 있는지 모르는 그러한 상황인 것입니다. 어느 날, 그 땅을 갈고 씨를 뿌리려는 사람이 땅을 갈려고 파다가 그 보물을 발견한 것입니다. 뜻밖에 만난 것입니다.
바로 이 비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뜻 밖에 만나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의 한 여인, 남들은 아침저녁 시원 할 때 물 길러 가는데, 이 여인은 한 낮에 남들을 피해서 물 길러 나갔다가, 뜻하지 않게 생명의 물이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가 뜻밖에 십자가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 십자가를 대신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지휘하던 로마인 백부장, 그는 단지 백부장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러 나왔다가 뜻 밖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구나.”하고 고백할 정도의 사건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영적으로 거듭난 생활을 하려해서가 아니라, 그냥 교회에 나았다가, 오라고 오라고 강조해서 또는 마지못해 끌려 나왔다가 찬송 부르고, 말씀을 듣는 순간 뜻 밖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더욱이 이 우연한 발견이라는 말은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밭에서 보물을 찾아낸 사람 자기가 묻어 두었던 것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도 내가 만들어 놓은 것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리고 우리로 당신 앞에 나가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고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린 그 부르심을 못 들었습니다. 또 들었다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정말 우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구원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그 기쁨과 감격을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세월이 가면서 “그게 그것처럼” 되다 보니, 그 기쁨 감격을 잊어 버렸다는 겁니다. 여전히, 지금도 우리는 말씀과 신앙의 봉사와 헌신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냥 옛날만  돌아다봅니다. “처음 믿을 때 참 좋았지” “그때 몇 년 도에 했던 부흥회 참 은혜롭고 좋았는데”
우연한 발견은 처음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발견했다면, 그래서 그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우리가 안다면, 우린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고, 잃어 버렸을 때 그것을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제는 “우연히 만나 지겠지”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5:8-10,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열 개서 은전 가운데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져 보았습니다. 결국 찾았습니다.
이제는, 우연 발견이 안라 내가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잃고, 듣고,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있어야만 합니다. 즉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기쁨도 있고 감격도 있는 겁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여전히 그 우연한 발견을 기대합니다. “그때 그 부흥회 참 좋았는데 어디 그런 부흥회하지 않나?” 그때, 그 자리에 나가 우연히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도 그 자리에 나가 우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연한 만남은 그 다음의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비유에 등장한 사람은 그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그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그는 그 문제를 놓고 이리궁리 저리 궁리하지 않고 그 순간 행동하였습니다.
제임스 러셀 라웰은 “인간이나 민족에게 한번은 결단할 순간이 온다.”고 말했습니다.
늘 듣는 이야기, “인생에 세 번의 기회가 온다. 그런데 그 기회는 달리는 말 같아서 왔구나 하고 바로 잡아야지 우물 주물 하다보면 놓쳐버린다.”는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붙잡아야 합니다.
더더구나 그것이 내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면 어찌 망설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 민족은 양반을 앞세워서 “비가와도 뛰지 않는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을 안친다.” “아무리 쫓기어도 신발 벗고 가랴”
그러다 보니 예수 믿는 것도 체면 차립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 믿으세요.”하자 “조금 더 있다가” 하고 대답 합니다.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에 나온 사람도 그렇습니다. 교회봉사에 대해 이것저것 핑계가 많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는, 우리가 고귀한 충동에 의해 감동을 받았는데도 즉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 내가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그리 해야지” 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지, 꾸물거리면 그 충동은 흔히 사라집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내가 헤엄칠 줄 알면 뛰어 들어야 합니다. 헤엄칠 줄 모르면 뭔가 도움 되는 것으로 건져 내야 합니다. 그런데 물 밖에서 저 사람이 왜 물에 들어갔을까? 자살일까? 누군가 밀어 넣은 타살일까? 어디 사는 누굴까? 혹시 건져주었다가 나만 귀찮아지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하다보면 이미 물에 빠진 이는 죽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구원에 대해서 압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지도 압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머뭇거립니다. 이리저리 궁리하고,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토론하다가 끝납니다.
왜 그런가요? 그것은 내가 손해 보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왜 수고해야 하나, 내가 왜 시간 드리고 물질 드려야 하나, 나도 힘든데…….

오늘 본문의 사람은 밭의 보물을 보고 있는 것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이제 그 밭은 그 사람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처음 말씀드렸듯이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문제가 있다.
미국 문학의 아주 아름다운 시들 가운데 사라 피스데일이 지은 “인생에는 돈 주고 사야할 사랑스러움이 있다”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의 마지막 연은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사랑스러움을 사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보물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우리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 대문에 그 하나님의 나라를 놓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 믿는 믿음 때문에 박해를 당했습니다. 오늘날은 그런 일은 없습니다. 때때로 그리스도를 인하여 사회적으로 어려움 당하고, 가족의 유대가 깨어지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허지만 우리는 흔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모순 되는 나의 야심과 생활 방식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7:22-24에서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 라고 외칩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나도 인간인데, 내 삶도 있는 것 아니냐? 이 갈등에 바울은 고민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내 삶과 연결 되어진 일 때문에 고민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7:25에 “고맙게도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하고 확신에 찬 외침을 외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모순 되는 야심과 생활 방식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어 놓고 포기한 우리는 그리스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믿음에 따르는 희생을 치르지 않고 입으로만 신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본문의 그 사람이 소유한 모든 것을 팔아 소유주로부터 밭을 샀다, 보물까지 얻었다, 하는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우리가 구원을 그 무엇으로 산다고 하는 것과는 전혀 의미가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비유의 요점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하는 그것 자체가 곧 가장 소중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는 것 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 더 끌어안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을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을 포기하기 못했기에 가장 소중할 것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갖기 우해 발버둥치는 자가 아니라 포기하기 위해 애쓰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포기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10:29-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집 100채 얻기 위해 집 한 채 주를 위해 버리라는 것인가? 집 한 채나 논이나 밭 얼마를 주를 위해 버렸더니 백배나 받았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어떻게 이해가 된다고 합시다. 그러나 형제자매, 부모나 자식을 주를 위해 버렸더니 백배나 받았다, 한 분 아버지 주를 위해 버렸더니 백 명의 아버지가 생겼다?

아니 형제자매 어미 아비 자식을 버릴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슨 말입니까?
집, 형제, 자매, 부모, 자식, 전토는 내 것입니다. 내 집, 내 형제자매, 내 부모, 내 자식, 내 논, 내 밭, 거기에서 ‘내’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내 부모이니까 관심 갖고 사랑하는 것은 결국 내가 기준입니다. 내 자식이니까 관심 갖고 사랑하는 것 역시 결국 내가 기준입니다. 그러다 보니 “부모가 되서 내가 해 준 게 뭐냐?” “자식들이라고 그렇게 키워 놓으니까 부모에게 한 게 뭐냐?”는 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 “내” “혈육이기에” 이것을 버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기준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 됩니다. 이럴 때, 내 부모는 혈육으로서의 내 부모만 아니라, 이 땅에 모든 부모가 내 부모가 되고, 혈육으로서의 자식만이 아니라 이 땅 에 모든 자녀가 내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내 거”라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하게 될 때 모든 것,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이 또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 소유를 다 팔아서 살만큼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왔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생명, 그리스도와 함께 사랑하는 삶, 이것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믿습니다.(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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