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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들이여! 참된 비전을 품어라. (잠 29:18. 히 1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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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묵시가 없으면 방자히 행한다고 지혜 자는 경고한다. 여기에 黙示라고 표현한 말씀의 원어의뜻은 vision 입니다.  그렇다면 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放恣히 란 말은 어려워하거니 삼가는 것이 없이 제멋대로 건방지게 구는 태도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제력이나 신중함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말합니다.
도대체 비전이 무엇이기에 그 비전이 없으면 사람들이 자제력을 잃고 신중성을 상실한 채 경거망동을 일삼게 되는 것일까요?

■ 비전이란 무엇인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마음으로 읽고 보는 통찰력 내지는 상상력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그의 시선이 목전을 뛰어넘어 더 먼 곳을 , 더 먼 시간을 내다보는 사람입니다. 눈앞을 뛰어넘어 더 먼 곳을 보는 사람은 더 먼 날을 내다보는 사람은 절대로 현재의 안일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시선이 닿아있는 더 먼 곳을 더 먼 미래에 자기를 맞추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장래성이 있는 사람을 가리켜 비전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는 포부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하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전이 있는 사람은 장래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전이 없는 사람은 방자히 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이란 시선이 눈앞에만 국한된 사람입니다. 눈앞에 작은 이득과 유혹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유혹의 손길이 손짓하는 데로 욕망이 부르는 데로 자신의 마음과 생각이 내키는데로 희망도 소망도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니 비전이 없으면 방자히 행할 수밖에 없고 그 끝은 파멸일 수밖에 없습니다.

1. 비전은 꿈이 아니다.

물론 꿈을 가지라고 할 때 그 꿈이 비전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전은 꿈이 아닙니다. 허무맹랑한 말을 할 때 ‘야, 꿈에서 깨라.’ 말할 때 그 꿈은 망상을 말합니다.
비전이 망상일수 없습니다. 비전과 망상사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영국의 수상을 지낸 대처여사는 그 차이를 명확하게 진술하였습니다.
“비전은 실현 가능한 결과를 수반하는데 비하여 꿈은 꿈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양자의 차이다.”
다시 말합니다. 비전을 품은 사람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하여 있고 그 먼 곳에 자기를 맞추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수반하기에 비전이 어떤 형태로든 그 결과가 실현됩니다.
그러나 망상으로의 꿈을 품은 사람은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고 즐기기만 하려고 합니다.
이때의 꿈은 그야말로 꿈으로 끝납니다. 그것은 책임회피와 현실도피를 낳습니다.
*  우리는 아메리칸 드림을 아메리카 비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2. 비전은 야망도 아니다.

야망은 자신이 목적으로 하는 것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행동한다는 의미에서 분명히 꿈과 구별 됩니다. 그런데 야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전과 야망이 흡사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도 비전은 야망과 같은 말이 될 수 없습니다.
비전은 끊임없이 오늘의 현실을 뛰어넘어 미래를 향하여 시선을 두되 좀더 밝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기를 계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남을 해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비전이 모두를 유익하게 하는 시발점과 발판이 되어줍니다.
그러나 야망은 욕망의 산물입니다. 야망을 가진 사람의 시선도 오늘을 뛰어넘어 먼 곳을 보지만 그 시선이 닿는 곳은  언제나 자신의 욕망입니다. 욕망의 도구가 되면 자신을 죽이고 남을 해칩니다. 쇠에서 나온 독이 쇠를 갉아먹고 사람들에게도 독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방자해집니다.
망상을 좇으면 패가망신하고 야망의 노예가 되면 자신도 남도 죽이게 됩니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적지 않은 크리스챤들이 망상과 비전을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야망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보다 좀더 큰 문제는 많은 교회가 역사적으로 비전의 미명하에 망상을 좇았고 야망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가령 천년왕국이니 하면서 망상을 좇았던 적이 얼마나 많은가? 현실적인 책임을 회피한 채 도피케 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겠습니까?  여기 종교는 절대로 불교나 힌두교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현실을 회피하는 크리스챤 망상가들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합니다. 망상을 좇으면 패가망신 합니다.야망의 노예가 되면 자기도 죽고 남도 죽입니다. 비전은 망사의 꿈도 야망도 아닙니다.
청년들이여 지금 당신이 품고 있다는 그 비전이 혹시 야망은 아니가?
내가 가지고 있는 비전이 망상의 꿈은 아니가?

        ■ 어떻게 참된 비전을 품을 수 있는가?

3. 참된 비전은 하나님의 비전이다.

우리는 어떻게 망상도 야망도 아닌 참된 비전을 가질 수 있는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나의 비전을 이루려한다면 그것은 100%망상이요 야망입니다.
참된 비전은 나의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나의 비전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사람만이 나의 욕망과 야망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비전을 이야기할 때 거론되는 인물입니다. 어린시절 그가 꾼 꿈을 비전으로 삼아 큰 인물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도 그런 꿈을 품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요셉이 그 꿈을 비전으로 삼았다면 그는 감옥을 탈출하거나 알콜 중독자가 되었거나 자살을 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어렸을 때 꾼 꿈을 비전으로 삼았다는 말은 완전히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창42:9)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요셉은 그때까지 그의 꿈을 기억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절망을 딛고 국무총리가 된 것은 자기가 꿈을 비전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비전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종살이도 감옥살이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보디발 가정에서 충성하고 감옥에서도 충성하여 가정총리 옥중총리 마침내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80세에 부름 받은 모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일컬음도 거절하고 자기백성과 함께 고난을 잠시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능욕을 받는 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귀히 여겼습니다. 그토록 고달픈 광야를 통과하고 그토록 열망했던 가나안은 들어가 보지도 못하였다. 그는 헛수고를 했는가? 그는 실패자인가?
그는 자신의 실패와 성공을 뛰어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방자히 행합니다. 망상을 좇으면 패가망신 야망을 좇으면 자타를 죽입니다.
망상과 야망을 비전으로 알고 있으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를 통하여 이 땅에 펼쳐지게 된다면 이는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이겠습니까?
청년들이여 참된 이 비전을 품기 바랍니다. 망상의 꿈도 야망의 포부도 버리고 하나님의 새 비전을 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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