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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아버지여 (왕하 2:12 ~14, 마 26: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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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작은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황제가 된 나폴레옹은 부하를 통솔하는 대범한 힘을 가진 작은 거인이었습니다. 황제가 된 뒤 그는 폴란드를 진격하였습니다. 폴란드는 약소국이어서 이내 항복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폴란드의 어느 농촌마을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안 영주는 나폴레옹이 마을에 해를 입히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고민하던 영주는 나폴레옹을 자기 집으로 저녁 만찬에 초대하였습니다. 영주는 자기 집 문 앞에서 나폴레옹을 맞고 예를 갖추어 안으로 모셨습니다. 나폴레옹은 제일 높은 상석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앞서 걷던 영주는 첫 번째 상석을 지나쳤습니다. 두 번째 상석도 지나쳤습니다. 세 번째에 이르자 나폴레옹에게 세 번째 상석에 앉기를 청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맛살을 찌푸렸습니다. 나폴레옹의 신하는 영주를 꾸짖었습니다. “대 프랑스 제국의 황제 폐하를 이렇게 푸대접하는 걸 보니 영주는 두려움이 없는 모양이군.” 영주는 조심스레 대답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이 자리는 제 부모님의 자리입니다. 나라에서 황제가 제일 높듯 우리집 안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제일 높습니다.” 나폴레옹은 영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웃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누가 제일 높습니까? 부모님이 제일 높은 가정은 좋은 가정입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이 쩔쩔 맵니다. 아이들이 상전이라고 드러내놓고 말합니다.

  높은 사람이 높은 사람으로 대접을 받아야 질서 있는 가정입니다. 높은 사람이 높은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질서 있는 사회입니다. 요즘은 너나 나나 다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대단히 공평하고 민주적인 사회 같지만 사실은 더 혼란하고 어려운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부모의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부모가 부모로 대접을 받아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회는 반대로 치닫습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거역합니다. 로마서 1:30에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라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3:2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종말적인 현상은 부모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종종 자녀가 부모를 죽였다, 때렸다는 보도를 신문에서 보게 됩니다. 보지 말아야 할 슬픈 이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집니다. 자기 사랑이 팽배합니다. 부모를 거역합니다. 이런 말세에 고통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종말적 현상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바른 자세를 가르칩니다. 출애굽기 20:12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잠언 23:25에는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6:1에는 “네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3:20에는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 신명기 27:16에는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합니다. 빨리 ‘아멘’ 하세요. 부모를 경홀히 여기면 부모는 가만 계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오늘의 성경본문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지도력 계승 장면입니다. 지도력 계승은 어느 시대 어느 공동체나 고통과 시련입니다. 그러나 좋은 지도력 계승은 공동체나 개인에게나 은혜가 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나의 아버지여”라고 부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엘리야와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일을 아들에게 계승하듯 엘리야의 사역은 엘리사에게 계승 됩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내 아버지여”라고 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 존경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를 아버지같이 존경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엘리사는 잃지 않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존경심은 엘리사의 사역에도 큰 힘이 되었고 엘리야가 그의 사역을 계승하는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네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공경은 부모에 대한 거룩한 예의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닮기를 원했습니다. 스승의 본을 자신의 삶으로 삼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영감의 갑절을 요구했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닮기를 원한다면 스승의 삶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경하면 끝까지 따라가게 만듭니다. 끝까지 닮게 만듭니다. 따라가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모든 것을 얻을 때까지 따라갑니다.

  북미 추마시 인디언의 교훈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살아가기 위하여 매일 성스러운 대지를 사용한다. 만일 자신의 신앙과 전통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바라본다면 우리 주위의 사물들 중 어느 하나 성스럽지 않은 것은 없다”. 자연을 존경하는 마음만 있어도 닮아갑니다. 그런데 하물며 사람을 존경하면 닮지 않겠습니까? 닮으면 자연도 성스럽게 보입니다. 하물며 부모님을 닮아 사는 삶이 성스러운 삶이 아니겠습니까?

  잠언 4:3에는 솔로몬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아들이었노라”. 당시는 남성중심의 사회였습니다. 여성의 지위란 감추어지고 정해지지 않은 때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어머니를 존경하고 높이는 솔로몬입니다. 지혜가 많았던 솔로몬은 어머니가 자신보다 지혜가 더 많다고 합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도 어머니는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시대나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어머니는 어느 시대나 사랑의 대상입니다.

  무엇이 성공입니까?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입니다. 현명한 이에게 존경받고 사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서 사랑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공했습니까? 우리 모두가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공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기를 바랍니다.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세대는 기성세대를 존경해야 한다. 기성세대는 신세대를 사랑해야 한다”. 서로가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존경과 사랑은 항상 나란히 갑니다. 존경과 사랑은 성경이 가르치는 기본적인 인간관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목사는 저의 선친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많은 것을 목회자로서 배웠고 존경합니다. 한번도 저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시지 않았지만 제게 가장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냥 아버지의 삶을 통하여 목사는 이렇게 사는 것이구나, 목회는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많이 배웠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다고 봅니다. 세상을 사는 이야기를 부모에게서 가장 많이 배웁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부모에게서 가장 많이 배웁니다. 아들딸에게 존경받는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입니다. 행복한 아버지입니다. 부모님께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자녀는 행복한 자녀입니다.

  요즘에는 모든 면에서 얼마나 풍부한 자료가 있습니까? 공부하기 얼마나 좋은 배경입니까? 저의 부모님은 그 당시에는 자료도 없고, 경제력도 없었지만 훌륭하게 사셨다고 봅니다. 훌륭한 목회를 하셨습니다. 자료가 아니라 기도와 영력으로 하신 것입니다.

  사회학자 뉴스트롬은 조직원들의 사기(morale)의 기초가 되는 다섯 가지 욕구를 말했습니다. 안정욕구, 사회적 욕구, 긍지와 존경에 대한 욕구, 자율성에 대한 욕구, 자기실현의 욕구입니다. 누구나 존경받고 싶어 합니다. 누구나 존경할 대상이 있어 존경하고 싶어 합니다. 부모님들은 존경받는 대상이 되고, 자녀들은 존경하는 가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관계와 사명을 의미합니다.

  “내 아버지여”란 말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가를 말합니다. 이 두 사람은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좋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습니다. 좋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였습니다. 엘리사는 이런 관계에서 “아버지여”라고 합니다.
  “내 아버지여”란 말은 사명에 대한 확인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아버지같이 섬기면서 그의 사명을 확인하였고 자신의 사명을 보았습니다. 시대에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아버지를 통하여 봅니다. 이런 극진한 사명감이 엘리야를 아버지처럼 섬기에 하였습니다. 지금도 아들은 아버지의 사명을 계승하고, 아버지의 가업을 계승합니다.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는 것은 영광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기쁨입니다. 아버지는 가업을 이어주는 아들에게 굉장히 고마워합니다. 저의 선친도 그랬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에 저의 형님이 미국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의 선친께서는 저의 삼 형제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형님께서 미국에 가시면 언제 다시 세 아들을 함께 만날 수 있을지 모르셨기 때문입니다. 선친께서는 먼저 저에게 목사가 되기로 해서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저의 형님과 동생에게는 형도 동생도 목사가 될 형제를 잘 도와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돈도 많이 벌지 못하고, 항상 일이 많고, 힘이 든 일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형님과 동생에게는 “너희 둘은 다 목사가 되어야 할 책임이 3분의 1 씩은 있는데 안 되었으니까 잘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선친께서는 저에게 고마워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별로 형님이나 동생의 도움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한국에 나올 때도 저의 마음에는 부모님께서 원하시니 나간다는 생각이 제일 컸습니다. 미국에 만 7년이란 세월을 살다보니 미국에 익숙해졌고 아이들의 문제나 모든 문제가 그렇게 쉽게 한국에 나오게 되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저에게 꼭 한국에 나와서 목회하라고 하셔서 하나님께 그랬습니다. “하나님, 아이들 문제도 그 외의 문제도 다 책임지실거지요? 다른 건 몰라도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만 보고도 앞으로 모든 일들 잘 되게 복 주실거지요?” 그렇게 기도하고 아무 대책 없이 나왔습니다. 부모님께 순종하는 한가지만으로도 하나님은 제게 엄청난 복을 주셨습니다. 연동교회 목사가 보통 복입니까?

  아들이 장자든, 막내든 아버지의 가업을 이을 책임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관계가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관계이며 사명입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사명이 있고 아들은 아들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부부는 관계이며 사명입니다.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사명이 있으며 아내는 아내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사제는 관계이며 사명입니다. 스승은 스승으로서의 사명이 있으며 제자는 제자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모든 관계는 사명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창세기 2:18에는 갑자기 “좋지 못하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 중에 유일하게 불만족을 표출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담이 혼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의 관계적 본성을 확실히 강조하십니다. 관계가 끊어진 인간을 보시니 좋지 않으셨습니다.

  영국의 형이상학파 시인인 존 던은 “인간은 누구도 섬이 아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가 아닙니다. 관계는 자랍니다. 정지된 관계는 죽은 관계입니다. 관계의 성장은 사명의 성장입니다. 성경적인 영성은 관계 지향적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과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이름 정도, 얼굴 정도 아는 것이 아니라 깊은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릭 워렌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이나 성취가 아닌 관계다. 바쁘게 사는 것은 관계를 맺는데 가장 큰 적이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관계와 이런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관계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흔히 ‘내리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습니까?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에서도 아마 내리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극진히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영감이 갑절이나 있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엘리사의 원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엘리야는 자기보다 갑절이나 달라고 하는 제자에게 질투하지 않고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제자가 더 똑똑하면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아버지 같은 스승이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정말 아버지 같은 스승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마가에게 아버지 같은 스승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예수님께 대한 모든 지식을 고스란히 다 전수해 주는 스승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 폴리캅에게는 아버지 같은 스승 요한이 있었습니다. 요한처럼 폴리캅도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헬렌 켈러에게는 어머니 같은 스승 설리번여사가 있었습니다. 삼중고의 장애를 극복하게 해 주는 스승의 끈기 때문에 헬렌 켈러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군대 가기 전 아들이 돌아오지 군대 간 아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군대 가 있으면 누구나 효자가 됩니다. 그런데 제대하고 돌아오면 원래 아들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좋은 아들로 돌아오십시오. 늘 효자로 사십시오. 별로 어려운 것 아닙니다. 효자로 사는 것은 보람 있는 일입니다.

  좋은 부모로 사십시오. 별로 어려운 것 아닙니다. 얼마 전 신문에는 ‘불안한 십대, 이유 있는 반항’이란 제하의 글이 있었습니다. “엄마 아빠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아이들의 호소 가운데 앞에 실린 두 가지만 소개합니다. 첫째는 제 방에 들어올 때 ‘노크’를 잊지 마세요 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야’라고 부르지 마세요. 저에게도 이름이 있어요 랍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좋은 부모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좋은 관계는 좋은 부모의 사명입니다. 좋은 부모의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지그 지글러는 그의 책에서 “자녀들은 당신의 말 보다 당신의 행동에 더 주목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자녀들을 즐겁게 하고 “내가 제일 존경하는 위인은 이순신이야, 슈바이처야”라고 하지 않고 “내 아버지, 내 어머니야”라고 할 것입니다.

결론

  심리학적으로 미소를 ‘상대의 발을 묶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아동정신분석학자 볼비는 ‘애착이론’에서 아이가 미소를 지으며 부모의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부모와 아이 사이에 애정이 형성된다고 분석하였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애정은 작은 미소에서 시작됩니다. 지극히 작은 관계에서 큰 사랑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6-11에는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리는 예수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를 얼마나 친근감 있게 표현하는지 모릅니다. 이 부분에는 “아버지”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그 아버지께 “저들을 부탁합니다”라고 제자들을 부탁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제자들의 앞날을 의탁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사랑이 표현된 장면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에게 존경받는 부모가 되세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라 할 수 있도록 존경의 대상이 되십시오. 그리고 좋은 스승이 되십시오. 이 세상 누구의 존경보다 더 소중하고, 더 아름다운 것이 자녀의 존중일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님께 많은 것 배우세요. 인생은 가장 값비싼 투자랍니다. 부모님께로부터 인생의 좋은 것, 신앙의 값진 것들을 많이 배워서 좋은 가정을 만드십시오.

  그리고 좋은 부모, 좋은 자녀가 모인 가정을 통하여 이 사회의 모범이 되기를 바랍니다.
(/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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