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 세상이 기다리는 사람 (마 9:18~26)

  • 잡초 잡초
  • 234
  • 0

첨부 1


- 설교: 강석공 목사  I  2005년6월5일 설교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꼭 정확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착시 현상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영화일 것입니다. 영화를 볼 때 영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조금씩 다른 정지 화면을 연속적으로 보여 주는 것을 그렇게 움직이는 것처럼 볼 뿐입니다. 또 배고픈 사람은 다른 것을 그린 그림을 보고 음식물로 착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가장 큰 원인은 우리의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도 우리로 하여금 착각을 하게 만드는 주요 변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부터가 우리의 의식 구조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보지 못하고 착시 현상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메시야가 오시자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에 따라서 모든 것을 판단했기 때문에 메시야를 메시야로 보지 못하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던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살피기에 앞서 그 앞에 기록되어 있는 기사부터 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함께 앉았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그 때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스승의 뜻을 제대로 헤아렸더라면 그렇게 건방지게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그들에게 그 까닭을 설명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간청했습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니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두 말 없이 그 관리를 따라 나가셨습니다.

  길을 가던 도중 한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다가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그 여인은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였습니다. 그 여인은 마음 속으로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과연 그 여인의 병은 말끔히 나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관리에 집에 도착하셔서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사람들이 비웃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자 죽었던 그 소녀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사건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과연 무엇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이 바로 사람들이 그토록 간절히 기다려 온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메시야를 영접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기적들을 보고서도 사람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은혜에 감격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나름대로 경건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정 관념의 틀을 깨뜨리지 못한 까닭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깨뜨려야 할 고정 관념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것을 사람들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일찍부터 모세의 율법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오직 그 잣대로만 재려고 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 율법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죄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애당초 세리나 창기 따위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율법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그 율법을 그릇된 도구로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셔서 은혜가 없는 이 세상에 은혜를 선포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얼마든지 용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을 선물로 안겨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라도 예수님께서는 모두 다 용서하셨습니다.

  윤보영이라는 젊은 시인이 있습니다. 그가 쓴 시 가운데 “갈대와 연못”이라는 짧은 시가 있습니다. “그대가 갈대라 해도 괜찮고 / 그대가 연꽃이라 해도 좋아 / 나는, 어차피 그대를 담고 있는 연못이니까.”

  모든 것을 품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은 마치 연못과 같지 않습니까? 갈대도 품으시고, 연꽃도 품으시는 예수님께서는 매국노와 같은 세리도 용서하셨습니다. 남자들이 노리갯감처럼 즐기면서도 더럽다고 외면하는 창기들도 용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 때문에 오늘 우리도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습니까?

  둘째, 예수님께서 상한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사람들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한 관리의 딸이 병이 들어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그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치유 사역이었습니다. 종교 때문에 상처를 받고, 가난 때문에 상처를 받고, 불의와 불법 때문에 상처를 받은 모든 사람들을 고쳐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만나신 것도 바로 각색 병든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상처가 치유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상하시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단순히 육체의 질병뿐 아니라 영혼도 치유하시고, 가정도 치유하시고, 사회적 관계까지 치유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전인 치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특히 사람들의 상처난 마음을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각색 병든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환경과 사람들로 인한 상처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어서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찌르며 삶의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버려진 자도 돌보시는 것을 사람들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관리의 청을 받고 그 관리의 집으로 가시던 길에 예수님께서는 요청하지도 않은 한 여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앞으로 나서지도 못한 채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지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대 중심에 서지도 못했습니다. 여기서 한 관리라고 표현되어 있는 인물은 마가복음 5장 말씀을 보면 회당장인 야이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력한 인사라는 말입니다. 그녀는 유력한 인사의 청을 받고 가는 길에 끼어든 일종의 침입자였습니다. 저명 인사의 딸과 관계된 인상적인 이야기, 즉 죽은 소녀가 살아나는 이야기 중간에 끼어든 하찮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계속해서 혈루병을 앓으면서 참으로 많은 양의 피를 쏟았고, 의원들의 치료를 받으며 많은 돈을 썼습니다. 아마도 모든 재산을 다 갖다 바쳤을 것입니다.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도무지 고칠 수 없는 피 흘리는 병의 고통과 아울러 경제적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고통을 그녀는 겪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녀를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습니다. 침입자처럼 다가온 버림받은 그녀를 고쳐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서 딸이라고 불러 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녀를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도 칭찬하셨습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가련한 여인의 삶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삶의 모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말씀은 삶의 현장에서 피 흘리며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완전히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의 고정 관념과는 상관없이 주님은 죄인을 용서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 주님은 상한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려고 오셨습니다. 아울러 그 주님은 소외된 자와 버려진 자를 돌보시려고 오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치유자로 오셨으며 회복자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주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것뿐입니다. 그 옛날 메시야를 배척했던 사람들의 어리석은 실수를 오늘 우리는 결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달게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삶을 통해서 생명의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이 세상에 그 소식을 전하고 증거하는 증인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