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는 평신도 선교사 (행 11:18-26)

  • 잡초 잡초
  • 399
  • 0

첨부 1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해마다 감리교회에서는 평신도 주일을 지키는데 감리교회는 평신도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는 교단입니다. 본래 평신도란 헬라어로 ‘라이코스’라고 하는데 ‘백성’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즉, ‘성도’, ‘평신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백성인 평신도들을 부르십니다. 쓰시려고, 사용하시려고 계획하십니다.
‘라이코스’라는 말은 헬라시대의 전 시민을 가리킨 말이었으나 초대교회에서는 이방인과 대조가 되는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 (행4:10)을 가리켰고, 나중에는 신령한 이스라엘인 지상교회를 가리켰고, (행15:14). 그러다가 3세기 중엽부터 가톨릭이 제도화 되어감에 따라 교직을 가진 성직자의 위치가 강화되면서 그 당시 카르타고 감독이었던 씨프리안(Cyprian)이 비로소 ‘평신도’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천주교나 동방교회에서는 성직자와 비성직를 구별하기 위한 계급상의 의미로 비성직자를 가리키는 말로 ‘평신도’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후 일반교인을 가리킬 때 라 사용하면서 평신도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약화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차츰 평신도의 역할이 강조되고 성직자 중심의 목회 구조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공동의 목회 구조로 전환되어 가도 있습니다. 생각을 바뀌어야 합니다.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겸손한 태도로 사명에 불타는 목사와 평신도의 사랑의 협조만 있다면 앞으로 교회는 전도/선교의 대 승리가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교회 안에는 99%이상의 평신도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 교회를 알리는 일에 있어서 평신도는 1%미만의 성직자보다도 99%의 평신도들의 역량이 더 크고 중요다는 것입니다. 평신도들이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 되어 맡겨진 역할을 다할 때 교회의 존재가 분명히 들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교회의 평신도 가운데 10%는 신앙적으로 이미 죽었으며 80%는 잠자고 있고 나머지 10%만이 깨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잠자는 80%의 평신도를 깨워서 전도, 선교에 투입해야 합니다. 결국 80%의 잠자는 평신도를 어떻게 각성시키고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일에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에 따라 교회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1. 평신도에게 소망이 있다.

감리교회는 평신도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단입니다. 웨슬리는 어느 신학자나 목회자보다 평신도에게 희망을 두었습니다. 평신도를 훈련시켜 말씀을 전도 사역을 감당케 했습니다.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복음만 전해진다면 말입니다.
웨슬리의 신앙과 신학은 두가지로 말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입각한 뜨거운 성령 체험으로 이루어지는 개인성화와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돌보는 삶을 강조하는 사회성화입니다. 이 두가지는 두손과 같이 중요합니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중요합니다. 하나만 있으면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웨슬리의 후예인 우리들은 개인성화를 위한 열심 있는 신앙생활과 사회성화를 위한 이웃 사랑에 열정을 다하는 웨슬리의 후예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웨슬리안입니다.

한스 큉이라는 신학자는 “목사는 교회를 향해 파송된 성직자라면 평신도는 세상을 향해 파송된 성직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평신도들도 성직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성직자 답게 살아야 . . .
감리교회는 이러한 웨슬리의 신앙의 토대 위에서 뜨거운 가슴과 행동하는 신앙인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김구, 이승만, 주시경, 남궁억, 이준, 이회영, 이동휘, 이동녕, 우덕순, 이재명, 윤치호, 조병옥, 정일형, 문창모 등 기라성 같은 민족의 지도자들이 감리교 평신도들 가운데서 배출되었습니다.

또 감리교회는 여성들의 권리와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장한 교회로서 독립운동의 햇불이 된 유관순 열사, 샘골 예배당에서 상록수 운동을 전개한 최용신, YWCA 여성운동의 대부인 박마리아, 신 여성교육 운동을 뿌리내리게 한 이화여자대학 총장 김활 란, 중앙대학을 설립한 임영신 총장과 숙명여자대학의 임숙제 총장, 만주에까지 가서 농촌계몽운동을 펼치고 최용신과 같은 여성지도자를 길러낸 황애덕,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어 의료봉사를 시작한 박에스더 등 일제의 암흑시대에 이곳저곳 에서 등불을 켜들고 서 있었던 수많은 여성들이 한국 감리교의 여성들이었습니다. 많은 크리스챤 거장들이 많이 사회역군으로 나타나기를 . . .
평신도주일을 맞으면서 평신도들이 일어나서 사회와, 직자, 민족을 복음화시키는 도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일을 동역하라

하나님의 일은 동역하는 데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오늘날 혼자서는 잘 하는데 함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옛날에는 교역자가 팔방미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설교도 잘 해야 하고, 행정도, 전도도, 심지어는 성전을 건축할 때는 미장이도 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열 가지 재주보다 한 가지만 잘 하면 됩니다. 99%의 평신도가 가만히 있고 1%의 교역자만 애쓰는 교회는 성장 할 수 없는 교회입니다.
과거에는 목회자 중심으로 모든 것이 진행되었습니다. 단순한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가 멀티화되고 세계화 되어가는 이 때 목회자 혼자 모든 것을 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게 되었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동역자로서 하나가 되어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앞두고 목회자에게 의존된 교회가 아니라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공동의 목회를 만들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동역자’란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함께 일하는 자입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우리가 동역자라고 하였고(고후6:1) 서로가 하나님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동역자라고 합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동역자로서 하나가 되어 함께 하나님의 나라 를 위해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 한 마리의 끄는 힘은 2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두 마리가 끌 때는 23톤의 힘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동역함으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에 ‘레드우드 스테이트 팍’이라는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붉은 나무가 있는 도립공원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최고 112m나 되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 둥치에 터널(두대의 차가 왕래할 수 있는)이 있을 정도입니다. 20명이 손을 잡고 둘러서야 하는 굵기입니다. 높이는 까마득합니다.
학자들이 연구를 했습니다. 뿌리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파 헤쳐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통나무 깊이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상해서 계속 연구를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나무의 뿌리가 옆의 나무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나무를 ‘더불어 사는 나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평신도는 목사와 교회를 도와 말씀이 이 세상에 좀 더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교회과업에 가담하여 일하는 말씀의 조력자들이요. 동역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와 평신도의 협력이 없이는 교회가 건전한 부흥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협력이 이루어지는 교회가 부흥, 발전 . . . .
교역자와 평신도는 별개의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 돕고 보완해 가는 밀접한 관계입니다. 교권주의자들과 같이 평신도를 무시해서도 안 되며, 교역자를 견제하는 세력으로서가 아니라 . . . 교역자와 평신도는 하나입니다. 세상과 싸우는 한 부대의 전사들입니다. 함께 살고 함께 죽는 . . .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싸울 때, 아론과 훌은 모세의 기도하는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받쳐주었더니 아말렉과의 싸웅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했던(출17:8-13) 역사를 압니다.
천국에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목회자와 평신도의 상이 구별되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충성한 정도에 따라 똑같은 면류관이 주어는 것입니다.

3.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 바나바

최초로 파송 받은 평신도 선교사로 파송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직접 만난 적도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직접 훈련받은 제자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직접 보냄을 받은 사도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평신도입니다만, 성직자 못지않게 큰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바나바입니다.
박해로 흩어진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이라는 곳에도 이르렀을 때 복음이 그곳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회의 끝에, 가장 덕망 있는 평신도 지도자 한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위로와 격려의 사람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강림 후에, 초대교회는 놀랍게 부흥하고 날마다 구원받는 수가 많아져서 하루에 3,000명씩 믿는 사람들이 불어나고 교회가 급성장하면서 고아와 과부를 돕기 위해 막대한 물질이 필요했습니다. 그 때 ‘바나바’라는 사람이 밭을 팔아 바쳤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그 이름대로 격려하고 힘을 실어 주는 참 좋은 일꾼이었습니다. 연약한 자를 세워주는 사역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한 사역입니다. 격려는 지친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칭찬과 격려는 사람을 바꿉니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바로 복음 전도자로 나서게 되었지만, 바울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행9:26) 예루살렘 총회에서 사도 바울을 받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처절하게 잡아 죽이던 그가 예수를 믿고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바울의 신원 보증을 서 주었습니다.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우리의 모델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아는 훌륭한 인격과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주께 더하는 역사가 있기를 . . .바나바처럼 격려하므로, 인격적인 사람이 되므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므로 . .
바나바는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로서 바울과 함께 동역한 모델입니다.

4. 사회를 섬기는 교회로

지금 세상은 우리 교회들을 향해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달라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섬김이 오늘 교회를 통해 전 사회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사회의 필요이기 전에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상한 자들을 치료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눈먼 자를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누가복음 4:18)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말씀을 실천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은 교회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밖으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필요만 채워 주는 곳이 아니라 육적인 필요까지 정신적인 필요까지 채워줘야 하는 곳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는 사회를 섬기는 일을 열심히 실천한 선구자입니다.
웨슬리의 주변에는 늘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치료하고 가르치는 것이 복음전도자 웨슬리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요, 가난한 사람들의 목자,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사도로 살았습니다.

웨슬리의 경대의 서랍 속 안쪽 깊은 곳에 또 하나의 비밀 서랍이 있고 이곳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준비된 돈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웨슬리는 이 비밀서랍에 아무도 모르게 돈을 두었다가 모든 일에 의심과 질투심 많았던 그의 부인이 눈치 채지 못하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데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 존 웨슬리 목사의 아내가 세계 3대 악처중에 하나라고 . . ‘몰리 골드호크 바제일’

또 웨슬리는 스스로 의학을 공부하고 치료법을 연구하여 가능한 한 고통 받는 병자들을 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특별히 돈이 없어 병원도 못 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만나서 병을 진단하고 치료를 시도하였습니다.
초기 감리교회 집회소들은 대부분이 신앙훈련 모임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친교와 도움과 정보를 얻는 센터요, 가난한 집 자녀들의 학교요, 약국과 병원이요, 가난한 영세 상인들을 위한 신용협동조합이었습니다. 예수가 가는 곳마다 언제나 가난한사람들, 장애인들, 병자들, 어린아이들과 과부들 같은 사회의 모든 소외계층의 사람들이 따랐던 것처럼, 존 웨슬리에게도 똑 같았습니다.

요즘 ‘놀리는’ 교회 공간을 지역사회를 위해 개방하여 세상을 섬기는 교회 운동이 여기 저기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일을 제외하고 주중에 사용하지 않는 교회 공간을 지역 사회에 개방하자는 것입니다. 저소득 결손가정 아동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것 뿐 아니라 미술 피아노 등 특기교육 . .스포츠교실, 노인교실 등 . . .
지금 크리스챤 평신도들이 사회를 섬기기 위해서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훌륭한 웨슬리의 후예들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회를 섬기는 평신도 선교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입니다. 동역자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의 방주라는 큰 배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배가 항해할 때 키를 잡고 있는 사람만 움직인다고 배가 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저기, 구석구석에서 땀흘려 노젖는 사람이 있어야 배는 나아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승객이 아니라 선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승객은 조그만한 불편한 점만 있어도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선원은 그 모든 요구를 묵묵히 감당합니다. 여러분은 일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와 함께 하는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