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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의 상을 위해 좇아가는 삶 (빌 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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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침에 일어난다는 것은 그냥 잠자다 눈이 떠져서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할 일이 있고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와 가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가 우리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무게를 결정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은 인생관 혹은 세계관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이 해야 할 삶의 목표 혹은 삶의 소망과 의미에 대하여 매우 중요하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과연 무엇 때문에 숨 쉬고 밥 먹고 대화하고 행동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할까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 삶의 나침반은 정확히 우리가 가야 할 목표를 향해 지침의 방향이 놓여 있는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자기 삶에 대한 소회를 필역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는 많은 것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곳곳에 주의 복음을 전하였고 교회를 세웠고 사람들을 제자로 양육하였으며 교리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전까지 있었던 모든 일 그와 같은 것은 다 잊어버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뒤엣것은 다 잊어버리고 이제까지 한 모든 일은 잊어버리고 모든 업적과 공력을 잊어버리고 오직 푯대를 향하여 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 성도 역시 하늘의 상을 위해 좇아가는 삶으로서 과연 하늘의 상을 좇아가는 삶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은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오늘 성경 속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지표를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첫 번째로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의 모든 업적과 공적을 잊어버리고 오직 앞을 향해 달려가기에 묵묵히 자신의 과업을 수행하는 삶의 진정한 겸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공적에 매어있지 않는 진정한 자유자의 모습입니다. 과거의 공적에 매이고 도취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도취되어 그것에 매이게 되면 우리는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갈 수도 없고 진정한 진취와 발전의 자유를 상실하게 됩니다. 과거에 대한 집착은 간단하고 아름다운 추억의 회상과 감사로 현재와 미래에 힘을 줄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아름답고 또 화려했던 환상으로 변하여 지금 나의 현재와 비교되어 오히려 지금의 내 현재가 비하되고 과거가 장밋빛으로 아름답게 채색된다면 그것은 우리를 오히려 추락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을 교육할 때나 어떤 일에 같이 동역을 하게 될 때 헌신을 요청할 때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첫째는 말씀에 절대 복종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부인입니다. 세 번째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헌신하고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복종 없이 상황에 따라 내게 맞고 틀리고 그리고 내게 합당하고 합당치 않고 취사선택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지배당하여 어떤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 개인적인 인간적 욕심 그리고 죄악된 자아에 따라서 움직여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이 우리 삶에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입니다. 내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내가 나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일도 없습니다.

세 번째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예수 믿는 것이 마치 불쌍한 일이나 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가엾이 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날 어디 놀러가지 않고 할 수없이 교회 나온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모든 다른 일 좋은 일 있어도 그것보다 더 좋은 우리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최고의 것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하고 싶은 것 참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귀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과 은혜와 헌신의 역사를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가엽고 가련한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 당당하고 자유롭고 기쁜 일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은혜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헌신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헌신하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기억하게 되면 나는 어떤 대가를 바라게 되고 칭찬을 바라게 되고 그 결과 우리들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은 마음의 상처와 마음의 불평과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불행함 뿐입니다. 그 누구도 내가 기대했던 대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어떠한 사랑을 쏟아도 내게 사랑의 보답을 그대로 되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남에게 주는 것은 커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받는 것은 작아 보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보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절대 복종,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고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며 마지막으로 헌신하고 잊어버려야만 우리의 정서적 상태도 안정되고 영적인 상태도 유지되며 하나님의 은혜 속에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은혜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헌신하고 잊어버려야 더 높은 수준의 헌신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헌신하고 잊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마음에 불평과 불만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는 우리는 행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과거가 부끄러운 우리가 진정한 진보를 이룬 사람입니다. 우리는 뒤엣것을 잊어버릴 정도가 되어야 내가 이제까지 한 일 즉 뒤엣것은 잊어버릴 정도로 진보돼야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얼마 전에 박영석 대장이 북극 원정대를 구성하여서 북극점에 도달하였습니다. 히말라야의 가장 높은 14개의 봉우리를 정복하고 남극점에 도달하고 마지막으로 북극점에 도달했습니다. 세계의 오지라고 생각하는 16개의 지점에 도착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16개 지점에 도착한 사람은 오직 박영석씨 한사람이 이제까지 인류사회에 있어서 첫 번째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수많은 고통을 거치며 결국 마침내 북극점에 도달하였습니다. 마지막 북극점에 도달하였을 때 그가 기록한 것은 딱 한마디였습니다. “북극에 별을 땄다.” 마침내 그는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그렇게 끼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깎지 못해서 자란 수염에 고드름에 맺힌 모습으로 도대체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구별할 수 없이 기쁨의 환호와 절규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았습니다. 정말 그 기쁨의 환호 기쁨을 눈물일 수도 있듯 웃음일 수도 있고 감격이고 또 슬픔으로 그 마음에 북받치는 많은 아픔과 고통에 대한 마음의 절규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는 모든 할 것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화려했던 삶의 전적들을 추억하며 그는 나머지 일평생동안 살아가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산행을 하든지 탐험을 하든지 어느 날 그에게 주어진 새로운 목표를 향하여 또다시 주어지는 삶의 과제를 향하여 그의 삶을 진행하다 어느 날 그의 생의 마지막 시간이 다하는 날 어느 지구의 모퉁이에 묻히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과거의 영화가 내 삶의 전부였고 그것을 곱씹으며 우리의 삶을 살기에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그렇게 짧지만은 않고 오히려 그렇게 사는 것은 우리들에게 지루할 뿐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새로운 발전을 지속하는 것이 삶의 진정한 겸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이룬 일을 겸손히 생각할 수 있는 인격과 삶의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내 주변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급기야는 내 마음까지 움직이게 됩니다.

겸손은 결국 능력에서 나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은 겸손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겸손한 자리에 내려갈 수 없습니다. 비굴과 자책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능력이 있어야만 겸손할 수 있고 겸손할 수 있을 때 참된 자부심과 자신감과 우리는 더 넓은 세계를 포용할 수 있고 수용하게 되며 우리의 삶의 지경을 넓혀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만하다는 것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를 과시함에서 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능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과거에 내가 이룬 업적을 가지고 자랑하며 그것으로 내 이력을 삼아서 다른 사람에게 휘두르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일이 더 중요하고 더 큰 일이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현재의 일을 그리고 앞을 바라보며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뿐이라는 이와 같은 진솔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할 수 있을 만큼 새로운 영역이 그 앞에 있고 해야 할 일이 눈에 보이는 축복, 어제 그 일 또 할 수 없는가가 아니라 또 새로운 일이 있으니 우리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새로운 일에 전력을 다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음식점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연달아 닷새 동안 다섯 번 가서 계속 음식을 먹으면 음식 맛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잘 감동이 안 오는 것 같은데 그러면 제가 또 다르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음식점에서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열흘 동안 내리 가서 열 번을 드셔보세요. 그 음식이 맛있겠습니까? 아마 열 번 지나가면 질릴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과거의 사실을 곱씹어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위안을 삼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사모하고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개척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새로운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과거의 삶을 곱씹다보면 우리의 삶은 지루하고, 삶에 진보도 없고 마침내 우리의 삶 자체가 누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공력과 업적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지금과 앞으로 해야 될 일에 가슴이 설레는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떠시겠어요? 오늘 아침 잘 먹었어요. 그런데 소화도 안 되고 밥 먹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오늘 점심은 먹지 말아야겠다’고 하는 삶이 행복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아침 잘 먹었는데도 점심되니까 밥도 먹고 싶고 배도 고프고 또 먹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아침 먹었으니까 점심 그만 먹어야지. 나는 하루에 끼니마다 이렇게 먹지 못해’ 하는 것은 불행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고 점심에 대한 소망이 있고 점심 먹었는데도 저녁을 또 기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건강한 삶이고 축복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제가 화려했다고 할지라도 어제보다 오늘이 더 기대되고 오늘보다 내일이 더 바라보아지는 삶이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이요 은혜의 삶입니다. 과거의 것을 잊어버리고 현재에 충실하며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내일을 기대하는 것 그리고 과거를 가지고 휘두르지 않아도 될 것, 내 과거의 일을 가지고 휘두르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내 현재의 모습 속에 진실을 다하고 내 후의 있을 일에 대하여 나의 소망을 거는 사람들 그것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축복의 사람이요 은혜의 백성입니다. 날마다 더 큰 꿈을 보는 삶의 지경의 확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저는 요한복음 1장 50절을 바라보면 마음에 늘 감동이 됩니다. 빌립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는 감동을 받아서 나다나엘에게 찾아가서 ‘예수님께 가보자’라고 합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은 한마디로 제압합니다. ‘와보라’ 네가 만약에 와서 보면 네 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결국 그는 그 말에 제압되어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오는 나다나엘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다나엘은 깜짝 놀랍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기도하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당신을 만난 적이 없고 당신도 나를 본적이 없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나의 모든 일을 다 아시나이까’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너를 보았다고 함으로 나를 믿느냐 너는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 이유 때문에 아니라 이제는 예상치 못했던 더 큰일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수시로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체험했던 그 은혜보다 더 큰 은혜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우리들에게 고백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첫사랑의 고백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첫 감격의 기쁨과 고백 때문에 우리는 그 이후에 이루어지는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딛고 우리는 믿음의 생활을 이루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들에게 정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을 때 그 감격을 가지고 이제까지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빈한한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그 감격이 우리들에게 가장 충격적이고 우리들에게 매우 강한 감동이지만 우리는 시간이 가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것보다 더 능한 하나님의 귀한 은혜와 능력과 성령의 체험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이전의 은혜가 우리들에게 작아 보일만큼 우리는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역사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할 일이 넘치는 사람은 어제 일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보다 현재와 내일 일에 대한 더 큰 마음의 기대와 소망이 가슴을 채우는 법입니다.

두 번째 내용입니다. 푯대를 향해 갈 수 있는 분명한 삶의 목표가 있는 삶이야말로 축복과 행복의 삶입니다.
삶의 목표가 있는 삶은 축복입니다.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가야할 곳을 모르고 달려가면 그것은 우리의 비극입니다. 가야할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죠? 가야할 곳이 있죠?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는 일이 있었고 끝나고 갈 집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러 나오는데 ‘아, 오늘 어디를 가지? 어디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지?’ 행복한 삶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배 끝나고 갈 때 ‘나 오늘 어디로 가지?’ 저녁에 일을 마치고 ‘오늘 어디로 가지? 집에 가도 반겨주는 사람 없어, 들어가기만 하면 마음이 상해, 나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도대체 누구를 만나야 되지?’ 만나는 것도 한계가 있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보니 도무지 삶이 지루하고 우리 삶 가운데 모든 소망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야할 곳 있고 해야 할 일 있고 누군가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의 삶입니다. 가야 할 곳이 없는 사람의 삶은 비극입니다.

삶의 목표가 있을 때 우리는 삶의 낭비를 막고 효과적인 삶의 작품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목표가 있어야 우리는 삶의 낭비를 방지하게 됩니다. 우리는 삶을 너무 낭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켈란젤로라는 미술가는 돌멩이를 보면 이미 그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어떤 암석을 보면 그는 이미 그 조각품을 완성한 것입니다. 다만 남은 것은 완성한 조각품이 붙어 있는 군더더기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뿐입니다. 그는 돌을 쪼아서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돌멩이를 보는 순간 이미 그 작품은 완성되어 있고, 완성된 작품에 붙어 있는 나머지 필요없는 부분만을 쪼개어 낸 것입니다. 그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는 이미 완성된 것이고 필요없는 부분만 제거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우리는 그 목표 때문에 우리의 삶을 윤기있게 만들고 우리의 삶을 탄력있게 만들고 긴장있게 만드는 건강한 삶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연필 한 자루라고 수 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길거리에 낙서하고 다니고 필요없는 일, 쓸데없는 일에 쓰고 다니면 나중에 연필심은 제한되어 있으니 정작 우리가 써야 할 말을 쓰고 싶고 인생의 남길 말을 남기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삶을 낭비하셨습니까? 아니면 비축하여 두셨습니까? 정말 내가 남겨야할 일들을 지금 다 쓰고 계십니까? 우리는 해야 될 일 제한되어 있는데 힘이 제한되어 있는데 그것을 이루고 계십니까? 목표가 분명해야 낭비가 없고 마침내 우리는 한 가지 목표를 딱 이룰 만큼의 분량만큼의 능력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다른 것에 낭비한다면 그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좋은 일 하기에도 삶의 시간이 부족합니다. 행복하기에도 우리의 삶의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행할 시간이 없습니다. 왜 우리에게 부족한 시간을 불행하게 삽니까? 왜 불평하고 삽니까? 왜 미워하고 삽니까? 왜 시기하고 삽니까? 우리가 어리석을 때는 마음대로 시간을 활용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우리는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자,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행복해 하기에도 우리의 삶의 시간이 짧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행복한 것들을 다 누리기에도 우리의 삶이 너무 짧습니다. 그런데 왜 슬퍼하며 삽니까? 내가 슬퍼하고 불만하고 불평하고 미워하고 산다는 것은 내 행복의 부분을 던져버리고 그 슬픔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내 행복을 밀어내고 그 시간이 슬픔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그 슬픔과 고통과 미움과 불평을 내 행복을 져버리고도 해야 될 만큼 그것이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는 행복하기에도 내 삶의 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언제 불평하고 불만하고 불편한 관계 속에 살아갈 여유가 있습니까?

목표가 분명해야만 해야 할 일도 분명하고 또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도 분명해지고 주저앉거나 나태해지는 것을 방지해 주기도 합니다.
저희 교회는 20년 시간표를 짜놓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무슨 교회가 시간표를 짜놓고 이렇게 하나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1주년 2주년 3주년, 벌써 14주년이 됐습니다. 제2기 사역의 마지막 해가 되었고, 내년부터는 3기 사역이 시작됩니다. 이제는 교회의 모든 조직과 시스템이 완비되고 그것을 통하여서 이제 제3기 대 사회 봉사 및 기여의 연습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교회 모든 일은 교회 안에서 교회 외부로 이제는 중심이동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도대체 어떠한 일이 이루어지며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그 표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실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목포가 정해지고 목표에 대한 세분화된 단계가 결정되고 그 세분화된 단계에 대한 시간이 설정되면 우리는 그저 그 순간순간에 성실하게 하다 보면 그 목표의 부분이 이루어지면 부분이 조합되어 그 목표가 완성되어져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장 저급한 것은 시간제로 일하는 것입니다. 좀 고등해지면 성취 여부로 판단받습니다. 우리는 그저 목표가 생길 때 몇 십 년 살았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어떻게 우리의 시간들을 채색하며 꾸며나가 완성했는가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생각해 볼 때 과연 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현재 나는 내 삶의 작품을 내가 살아온 만큼 완성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제까지 내 삶을 소비해서 얼마큼 내 삶을 완성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나에게 얼마만큼의 기회와 시간이 있고 나는 그것을 그 시간 내에 완성하고 떠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주어진 시간들을 낭비하지 말며 삶의 주어진 힘들을 낭비하지 말고 우리의 그 일을 위하여 집중할 때 딱 그 일 하고 마치게 되어져 있습니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삶은 축복의 삶입니다. 달려갈 때 목표가 분명하면 우리는 슬프지도 힘들지도 지치지도 않습니다. 목표 달려가기도 바쁜데 언제 슬퍼할 틈이 있겠습니까? 언제 불평할 틈이 있겠습니까? 빨리 달려가는 사람은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빨리 달려가는 사람이 딴 생각하고 달려가면 크게 부상당합니다. 천천히 달려가는 사람이야 이리저리 생각하고 피해갈 수 있지만 빨리 달려가는 사람은 전력을 다해 집중하여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차라리 불평하고 한탄하는 시간이 있으면 한 걸음이라도 더 신속하게 달려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저는 요즘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하루하루 한시간 한시간 살아간다는 것이 큰 축복인 것 같습니다. 호흡 한 번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입니다. 호흡기 꽂지 않고 호흡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끼, 한 끼 도움받지 않고 내 손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 한번 호흡하는 것 걸어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제가 말을 하는데 누군가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 만약 제가 말을 하는데 내 앞에 사람이 전혀 못 알아듣는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글이라도 써서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축복입니까? 뭔가 말도 하고 싶고 뭔가 내 뜻을 알리고 싶은데 글도 쓸 수 없고 말도 할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 내가 원하는데 내 몸을 움직일 수 없다면 또 얼마나 불편한 것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큰 화판입니다. 어떤 붓질을 하든지 화판은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붓질을 하든지 결국은 채색되어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원대한 자신의 그림을 그리며 목표를 정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을 압니다. 더욱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제시해 주신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더 큰 좋은 것임을 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의 행적은 육신적으로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욕을 먹고 비난을 당하고 매 맞고 감옥가고 쫓겨나고 그런데 왜 그들은 기뻐하며 그 일을 중단하지 않았을까요? 그들에게는 분명한 푯대가 있었고 삶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을 보면 사도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합니다. 빌립보 도성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애매한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 갇힙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감옥에 갇혀서 밤중쯤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억울하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가는데 기도할 것은 무엇이며, 찬송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찬송과 기도를 죄수들이 듣습니다.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지진이 나서 옥이 흔들리고 그들이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의 삶의 모든 상황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가야할 목표가 분명하니 우리 삶의 주변 것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나이가 얼마가 되었건 내 삶의 상태가 얼마가 되었건 지금부터 출발하는 우리의 삶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야할 목표가 분명하면 삶의 상황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내일 달리기 대회가 있는데 만약 여러분이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한다고 합시다.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하려면 굉장히 연습을 많이 할 것입니다. 일 년 내내 연습했다고 합시다. 외국에서 열려서 비행기 타고 거기까지 가서 비용도 들었고 후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비가 왔습니다. 혹은 바람이 불었습니다. 혹은 날씨가 너무 더웠어요. 여러분 마라톤 포기하고 돌아오겠습니까? 여러분은 준비를 많이 해왔고 투자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여건은 누구에게나 있는 거야. 나는 이런 여건에서도 내가 해야 될 경기를 다 해야 돼.’ 하고 금메달을 향하여 달려갈 것이고, 금메달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는 완주하기 위해서 뛰어갈 것입니다. 그 달려가는 순간 그는 숨차고 가슴 뻐겨지는 고통이 있을지 몰라도 그는 오히려 이것은 참 좋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 일을 위해서 왔어 라고 생각하며 결국 경주를 하게 될 것입니다.

삶의 상황 때문에 생각 바꾸고 말 바꾸는 사람 있습니다. 삶의 상황이 우리의 생각과 말을 바꾼다면 우리는 너무나 누추한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삶의 상황이 바뀐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능가하는 내 마음에 믿음과 의지와 그리고 우리 마음에 신의를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하나님의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삶에 대해서 보다 더 살펴봅니다. 하나님의 부름, 소명 이것을 확신하는 삶입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부르신 삶이 분명히 보이는가? 나는 그것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나는 얼마만큼 그것을 이루고 있는가? 나는 지금 제 길 위에 있는가? 우리는 수시로 확인해야 합니다. 아무리 수고해도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마 남자분들 군대가셔서 총 쏴보셨을 것입니다. 보통 9발 가지고 평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표적지에 9발을 쐈는데 거기에 10발이나 11발이 들어온 경우가 있습니다. 참 이상하죠? 옆의 사람이 거기다 쏜 것입니다. 그 사람 표적지에는 분명히 몇 개 안 맞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혼나겠죠? 우리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과녁이 분명하고 그것을 향해서 달려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엉뚱한 것 위해서 수고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분주하게 살아도 아무리 애써서 살아도 내 삶 전력을 다해서 살아도 그것이 의미없는 삶이 되었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분주한가? 나는 무엇 때문에 가슴 설레이는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위해 달려갈 때 우리는 근본적인 감격과 환희가 있습니다. 제 자리에 맞게 있을 때 편안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이런 말씀드릴까요? 여러분 지금 지난주에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있지 않습니까? 대부분 지난주에 앉았던 그 자리에 앉아계시지 않습니까? 왜 그런지 아세요? 사람에게는 귀소본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있던 자리에 가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또 전용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 이건 내 자리야.’라고 생각하면 자기에게 전용의식이 생겨서 다른 사람이 앉으면 괜히 모르게 정서가 복잡해집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저 쪽으로 앉으시겠습니까?’ 하는데도 그 사람이 안 앉으면 괜히 마음이 비틀어집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대부분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자리라고 생각하는 그 곳에 앉아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성도의 자리가 있습니다. 성도의 자리가 아닌 곳에 가 있으면 불편함을 느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하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마비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이루고 있을 때 삶의 환희가 옵니다. 바르게 살고 있고 이루고 있고 헌신하고 있으니 우리의 감격입니다.

오늘 시간이 되어 말씀을 마쳐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목사니까 이러저러한 일을 살피기 위해서 신문을 여러 가지 봅니다. 주말에 보면 꼭 신문에 책을 소개하는 난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책이 수십만 종 이상이 나올 테니까 제가 그것을 다 볼 수는 없고 제가 그 중에서 신문을 보고 무슨 책이 나오나 생각하고 이리저리 좀 읽어보면서 볼 책을 골라서 체크를 하고 제가 직접 서점에 못나갈 때가 많으니 그 책을 사다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어제도 이리저리 여러 신문을 살펴보고 체크를 해나가고 있는데 신문에 한 시집 광고가 나왔습니다. 책을 열어가는 문구로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우리는 상처받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위해서 상처받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다 보면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에 대한 기대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 마음을 쏟았으니 거기에 대한 무엇인가 보답을 기대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상처를 많이 받게 됩니다. 사랑하다 상처를 많이 받다보니 이제는 사랑하기를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듭니다. 내가 이런 상처를 받느니 차라리 사랑하지 말자라는 마음이 살다보면 우리 마음에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처를 받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상처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를 받으며 사랑을 배우며, 상처를 받으며 사랑을 깨달아 가고 마침내 그와 같은 상처를 받으며 사랑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문구가 마음에 들어서 그 책도 한권 사기로 부탁을 해 놓았습니다. 마침 밖에 나갔다 오니 어느새 책을 갖다 놓아서 얇은 시집이기도 해서 이리저리 들춰보았습니다. 눈에 짧은 단문의 시가 들어왔습니다. 어부의 기도라는 시입니다. 17세기 작품으로 작자가 알려지지 않은 시입니다.
‘주님 저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당신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고 여겨 내던져짐을 당치 않게 하소서.’

어부에게 소원이 있다면 마지막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이겠죠.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나는 어부인데 마지막 날까지 내가 물고기를 잡다 갈 수 있다면 그것처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날 마지막 날이 되어서 주님이 던지신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정말 쓸모없는 물고기라고 여겨서 내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의 그물 안에 걸려 주님의 품에 있게 된다면 그것처럼 복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부가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처럼 우리는 죽는 날까지 우리 앞에 놓인 사명의 푯대를 향해 달려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삶의 과업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래하는 사람은 우리가 세상 떠나는 날까지 노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연주하는 사람은 끝까지 연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구하는 이들은 끝까지 공부할 수 있고, 또 뿐만 아니라 일을 하는 사람들은 끝까지 그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쓸모없는 자라 내던져짐을 당하지 않고 비록 부족하고 모자라지만 천국의 상 한번 받아보겠다고 허덕거리고 달려오는 것이 가상스럽게 여겨져 그 발 앞에 우리를 두시고 작은 상이라도 베풀어 주시고 은혜의 초장에 함께 거하게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주님의 은혜로 충만한 하루하루 그리고 한 순간 순간들 그리고 기쁨의 나절들을 이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최종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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