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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푯대를 향하여 (빌 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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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축구를 잘하는 나라로 모든 사람들의 상식이 되어 있습니다. 그곳에는 신세대 스타 호나우딩요가 있는가 하면 두 걸출한 스타 호나우도와 히바우도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세계 정상이라고 하는 목표를 향하여 서로가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호나우도의 기량과 명성이 히바우도에 비해서 월등했으나 호나우도가 잦은 부상으로 결장이 빈번한 사이에 얼마 전에는 쉬지 않고 도약하던 히바우도가 M.V.P(이적료 740억)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2005년도 컨페드컵에 호나우도가 브라질 대표 선수에서 제외되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본인 스스로가 쉬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축구의 천재성을 오히려 걱정하고 있습니다.

홈런왕 베리본즈는 "그의 할머니가 들려준 개가 재주를 부리는 것을 멈추는 날 그 개를 소유할 가치가 없다는 말을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리는 신앙도 이와 같은 중단 없는 전진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중단하면 비록 신앙경륜이 뛰어난다 할지라도 뒤로 처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걸음에 과거라고 하는 뒤가 있고 미래라고 하는 앞이 있다고 했습니다. 푯대를 향하는 자는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하는 일련의 신앙 패턴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Ⅰ. 인간은 시간세계에서 자유 할 수 없는 실존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3장 13절에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한계 상황 속에서 자유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뒤도 없고 앞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의미가 시간이라는 한계상황에서 정직해 질 때 참으로 인간다워 집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바로 깨닫고 자신을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모세도 시편 90편 10절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그의 노년에 고백하기를 열왕기상 2장 2절에서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라고 했습니다.
욥은 욥기 7장 6절에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없이 보내는구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7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시간의 한계상황에서 자유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바로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Ⅱ. 인간은 쉬지 않고 전진하는 실존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본문 3장 13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렸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가 유대교 시절이든지, 그리스도 안에 부름 받은 이후이든지를 무론하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은 회개에 필요한 자기반성이나,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회고를 금하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이를테면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현재와 미래를 놓쳐 버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컨대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기 과거에 집착하면 전혀 용기를 갖지 못합니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즉시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달리다가 실족해서 넘어지면 빨리 일어나야 됩니다. 그리고 넘어진 만큼 더 달려야 합니다.
반대로 성공적인 과거를 회상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사람도 죽은 사람입니다. 이유는 참 성공은 뒤에 있지 않고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섰다고 할 때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쳐다 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창 19:26).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를 생각하다가 가나안 행군에서 실패했습니다(출 16:3).

예수님은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고 했습니다(눅 9:60).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눅 9:62).
라이트홀은 말하기를 "경주자가 뒤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그의 운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의 영적 경주가 바로 그러합니다. 죄 된 과거는 하나님께 자복하고 받은 축복의 공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앞을 향해야 합니다. 유명한 요한 번연(J. Bunyan)은 말하기를 "성도들의 등에는 갑옷이 없고, 앞가슴에만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은 과거가 아닌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장악하는 자가 미래를 장악하고, 현재를 장악하는 자가 과거를 장악하는 자라고 한 말은 한갓 정치적인 것에 국한된 파편적 술어가 아닙니다.

2) 현재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 3장 13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직까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상태를 뜻합니다. 성숙이 아닌 미숙의 상태를 뜻합니다. 완성이 아닌 미완성의 상태를 뜻합니다.
결코 현재는 자만하고 방종하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토끼처럼 자만해서 낮잠을 자는 동안에 거북이는 쉬지 않고 기어서 목표지점에 먼저 가버리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기독신자에게 있는 『현재』는 ① 잠깐 동안의 것입니다. ② 가변적인 성격의 것입니다. ③ 영구한 도성이 아닙니다. ④ 장차 무엇을 찾아가는 나그네 여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기에 비하여 『여기』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비하여 『땅』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에 비하여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상 그 어디에도 영구히 정착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라고 하는 제자리에 멈추거나 주저앉아 버리면 지금까지 달려온 과거는 송두리째 날아가 버립니다. 이유는 수많은 경주자가 뒤에서 계속해서 달려오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애써서 달려야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했습니다.
변화산의 영광을 본 베드로는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러한 발상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달리 무모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희성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모세의 일은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예언사명도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막을 짓고, 그 분들을 여기 세상에 다시 머물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초막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대로 죄의 값을 지불하고, 엘리야의 예언대로 대속의 죽음을 치러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변화산의 초막에 머물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의 영원한 집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므로 현실에 안주하려는 베드로의 생각을 제지하였습니다.

Ⅲ. 인간은 필연적으로 미래지향적인 실존 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3장 12절에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붙잡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붙잡힌 바 되었습니다. 그는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고 했습니다(3:14). 여기 '푯대'는 경주자의 미래적 목표지점을 가리킵니다. 그 푯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생의 결승지점입니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간다(3:14)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미래적 목적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붙잡힌 것도 미래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를 붙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사역이 끝이 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푯대도 미래적인 것이고, 부름의 상도 미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뒤에 것을 잊어버리고 현재에 머물지 않고, 곧장 달리는 경주자의 마음과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본문 3장 16절에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하므로 계속적인 전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굳게 붙잡히고 있다는 이 사실이 그로 하여금 용기와 힘을 내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른 교단교회에 속한 교인들보다 열심이나, 주를 위한 헌신생활에서 결코 탁월하지 못하다고 자평하는 것은 겸손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애써 정직히 말하면 오히려 평균 이하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열등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다른 교단교회가 가지지 못한 좋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개혁주의 신앙사상과 앞서간 신앙의 조부들의 순교정신으로 무장된 결코 오염되지 아니한 믿음의 전통입니다.

지금까지는 교회의 이러한 특성들이 일차적으로 교회의 보수성을 견지하는 상징적 효과로 작용했는가 하면 교회의 위상을 결정짓는 절대가치를 제공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는 전혀 다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개혁주의 신앙사상과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전통을 타 교단교회와의 수직적 차이로 본 나머지 우리 스스로 교만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수평적 차이로 보고 겸손해져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교파 어떤 교회와도 동일하게 수평적 교제나 수평적 가치관을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있는 신앙적 교만의 원인을 수직적 차이라는 부동의 고정관념에서 점검해 보자는 말입니다.

온정주의자(溫情主義者)들은 우리의 역사를 쟁투와 반목의 역사이지 복음의 역사가 아니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의 생리와 지상교회의 사명을 모르고 하는 무지의 소리입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변을 한다면 우리 역사의 첫째 특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방어수단으로서의 땀과 피의 흔적입니다. 그 다음은 빼앗긴 본래의 것을 되찾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공격수단으로서의 상흔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상처입니까?
언제나 역사의 생리는 미래지향적이기 때문에 은닉된 수많은 사건 등을 뒤로한 채 쉬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20세기의 파란만장한 역사도 한 세기의 마감과 함께 다음 역사를 위해 세기의 뒤안길로 사라지듯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도 그러한 역사의 사이클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립시다. 현재에서 자만하거나 그렇다고 실망도 하지 맙시다. 계속해서 앞으로,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길은 우리 스스로가 알 수 없는 미지의 행로이기 때문에 길 되신 주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그네가 석양을 등지고 길을 재촉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길을 서둘러야 합니다. 이유는 종말론적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역사의 황혼지점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옷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내 길의 나그네 세월"이라고 했는가 하면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이라고 했습니다(창 47:9).
엔드류 마벨(Andrew Marvell)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시간은 급히 달려오는 날개 돋친 마차"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날개 돋친 마차는 재빨리 타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6절에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습니다.
송나라의 대가 남송, 주자는 정원 연못가에서 놀던 봄꿈이 채 깨지 않았는데(味覺池塘春草夢) 벌써 뜰 앞에는 오동나무 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가을을 알린다(階前梧葉已秋聲)고 하였습니다.

이방원의 칼날 앞에 정도전은 인생여조로(人生如朝露)라고 했습니다.
시인 롱펠로우는 말하기를 "그대가 왜 그 일로 잘못했는가를 설명하는데 시간을 쓰지 말고 그대가 그 일로 어떻게 바르게 행할 것인가에 대해 시간을 사용하라. 그렇게 하면 오히려 더 많은 일을 창조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과거에 얽매이는데 소비적인 시간을 쓰지 말고 미래를 생산하는데 창조적인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갈보리인들이여! 우리 모두 푯대를 향해 사고의 전진을, 표현의 전진을, 행동의 전진을 합시다.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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