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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의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합니다. (창 2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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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누구도 대꾸할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믿음의 스승입니다. 그 삶이 우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아들이었습니다. 어느 여론 기관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젊은)여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이 좋습니까? 딸이 좋습니까? 그런데 78%가 딸이 좋다고 나왔습니다. 아들이 쓸 데 없다는 것 아닙니다. 아들이 최고라는 말은 이제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태중에 꿈틀거리는 생명이 원하지 않는 딸이라는 것 때문에 죽어간 생명이 참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 하나가 아브라함 역사를 엮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는 점점 많아집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아들은 소식이 없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습니다. 그 아내가 더 조급해 했습니다. 사라에게 자기의 몸종 이방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갈이었습니다. 남보다는 나으니 그 여인을 남편의 첩으로 안겨 줍니다. 제발 더 늙기 전에 이 여자의 몸에서 바라던 아들을 낳으라고 합니다. 그 남편 아브라함도 순순히 그 뜻대로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임신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미칠 것 같습니다. 질투심이 불타오릅니다. 그 때부터 그는 자기가 한 일을 수 없이 후회합니다. 그가 자진해서 자기 몸종을 남편의 첩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미워서 못 견딜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하갈을 학대합니다. 견디다 못해 하갈이 집을 뛰쳐나갔습니다. 가출한 그는 서러워서 펑펑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그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가 되었습니다. 늦둥이라도 이런 늦둥이가 있겠습니까? 그가 젖 뗄 즈음입니다. 애가 돌이었나 봅니다. 동네 사람들을 다 청했습니다.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들 이삭은 채색옷을 입고 모든 사람의 축하를 받습니다. 첩의 아들 이스마엘은 찬밥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스마엘도 속이 상했습니다. 이스마엘이 아기 이삭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놀려댔습니다. 사라가 이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그는 너무 속이 상했습니다. 이 기쁜 일에 찬물을 끼얹은 첩의 자식 이스마엘을 죽이고 싶도록 싫어졌습니다. 남편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이스마엘도 자기 아들입니다. 꾸짖고 지나가도 되겠는데 내쫓으라고 합니다. 잠 못 이루며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하갈의 말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은 하갈 모자가 쫓겨나는 장면입니다. 그가 물이 없어 광야에서 아들이 죽어가자 통곡하는 어머니의 눈물이 있습니다. 저도 오늘 “불의는 제거 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씀으로 같이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Ⅰ. 뿌린 대로 거둡니다.

아브라함도 비틀거렸습니다. 그 아내를 빼앗길까봐 두 번이나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해결사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자기가 살려고 삐딱하게 처신했습니다. 아내가 자기 몸종 하갈을 첩으로 맞으라 할 때 안 된다고 했어야지요. 그것 때문에 가정에 분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의 사건은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의를 용납하면 안 됩니다. 진리의 길은 외롭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진리 문제는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합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이 예뻐서 아내를 삼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 아내 사라의 강력한 청이었습니다. 아담도 그러했습니다. 선악과 먹으면 절대 안 된다는 것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담 부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내 이브가 선악과를 주었습니다. 그는 그 과일이 선악과인 줄 잘 압니다. 그는 당연히 먹을 수 없다고 했어야 했습니다. 아내 이브를 꾸짖었어야 했습니다. “야단났습니다. 하나님께 빨리 용서를 빕시다”라고 했어야지요. 아담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주는 것 넙죽 받아먹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꼴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일 다른 데 가고 하면 나무라야지요. 야단쳐야지요. “피곤한데 좀 자도록 두자. 몸이 아픈데 오늘은 그만 쉬게 하자. 다음도 주일이 오는데...” 이게 위험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아요? 돈, 공부가 전부 아닙니다. 바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탄은 늘 노리고 있습니다. 네가 말해라. 이것이 정의다. 네가 앞장서라. 그게 사회를 위하는 길이다. 이것이 위험한 일입니다. “진리는 좁게, 사랑은 넓게” 이래야 됩니다. 항상 그런 사람은 진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가정을 위하고 교회와 사회를 위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왜 진리 아닌 것 때문에 손해 봐야 합니까? 목숨은 진리에다 걸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어정쩡한 처신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와 동기동창인 이충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지금은 생사를 모릅니다. 함경도에서 피난 오시다가 폭탄 세례를 받았습니다. 온몸에 폭탄 조각이 박혀 있습니다. 그는 홀몸입니다. 아무 교회에서도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서울역 앞 대우빌딩 자리가 과거에는 세브란스 병원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전도 하셨습니다. 아마 지금쯤 살아 계신다면 여든 서넛 되셨을 것입니다. 그는 평생을 입조심입니다. 말조심 한다고 하루 종일 전도 하시는 일 외에는 말 한마디 안 하셨습니다. 행여 내 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을까...

아브라함은 한 마디 말을 못한 것 때문에 가정이 파탄 위기에 빠졌습니다.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둡니다. 선을 뿌리면 선을 거둡니다. 악을 뿌리면 악을 거둡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을 스스로 선이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선이라는 미명하에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선이라고 우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건 대단히 위험합니다. 아브라함은 첩을 맞을 때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별 생각 없이 아내의 뜻을 따르다가 그는 이런 곤욕을 치릅니다. 물론 당시에는 이런 관례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번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반드시 사라가 아들을 낳는다. 그 아이가 너의 상속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한 아브라함이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 때문에 가정에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오늘은 그 오고야 말 날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자기가 한 일을 뉘우치는 기색이 없습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그는 자기 남편 탓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하갈 모자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를 내쫓으라고 윽박지릅니다. 사람은 잘 된 것은 제 탓이고 못 된 것은 조상 탓(남)이라 합니다. 스스로를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선한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분명히 자기 생각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이건 분명히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으시는 일인데도 하나님의 뜻, 기도의 응답이라 합니다. 이런 마음 아픈 일들이 많습니다. 분명히 후회할 일인데도 계속 자기 생각대로 하면 손해 봅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실수를 했습니다. 참 어리석지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 죄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그릇 행하는 고집 센 양과도 같습니다. 이 길로 가면 안 된다고 합니다. 목자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Ⅱ. 불의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방송에서 종종 실수하는 장면을 봅니다. 저는 끔찍해서 그럴 때면 채널을 돌립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의사가 될 자격이 없었구나!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를 영적인 의사인 목사를 시키셨구나!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중대한 갈등을 앓고 있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자 하니 가족인 하갈 모자를 내쫓아야 합니다. 그냥 있자니 가정에 불화가 이어집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다 그가 뿌린 씨앗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1차, 2차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70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와 보니 나라가 말이 아닙니다. 성전은 흔적도 없습니다. 성벽도 무너졌습니다. 나라는 쑥대밭이었습니다. 남은 백성은 이방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에스라가 제일 먼저 한 것이 부흥회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는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팔이 아프니 다른 사람이 들어 주었습니다. 때에 그는 회개하라고 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마다 사람들이 엎드립니다. 아멘 아멘 합니다. 죄를 청산합니다. 에스라의 설교는 선조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라 합니다. 또 너희들이 지은 죄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삭개오도 자기의 재산 절반을 내놓았습니다.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은 네 배로 갚았습니다. 우리는 늘 회개하지요. 이것이 개혁입니다. 어느 정권마다 제일 먼저 부르짖는 구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개혁”입니다. 낡은 것을 뜯어 고치자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은 씻어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혁주의 종교입니다. 날마다 개혁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개혁자이셨습니다. 낡은 법률에 얽매인 그들에게 개혁을 외치셨습니다. 그의 첫 외침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 하셨습니다. 정말 죄의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항상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죄 씻음 받습니다. 저는 요즈음 “아! 내가 정말 목회다운 목회를 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자주 묻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열심히 외칩니다. 이것이 성도의 영혼을 깨워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이 메아리쳐 돌아옵니다. 그럴 때면 한 없이 허탈해집니다. 때로는 힘이 쭉 빠집니다. 탈진합니다. 목회는 정말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능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됩니다. 이것이 말씀(성경)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는다고 하셨습니다.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아지겠다고 하셨습니다. 잊을만하면 다시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기대에 어긋났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성화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것을 정리하자니 아픔이 따릅니다. 섭섭합니다. 저도 우리 집에 키우던 소를 팔 때 많이 운 적이 있습니다. 마구간을 볼 때마다 마음이 상당 기간 아팠습니다. 하물며 제 살점 같은 가족을 내보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겠느냐는 것 얼마든지 짐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의 편을 드신 것입니다. 이삭을 비웃고 얕보고 조롱하는 이스마엘을 쫓아버리라고 하십니다. 인정 이상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맺는 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 이삭을 얻은 지 돌이 되었습니다. 큰 경사입니다. 풍악을 울립니다. 춤과 노래가 있습니다. 손님들로 북적댑니다. 어른들의 축하 인사에 아브라함 부부는 마냥 즐거웠습니다. 100살에 낳은 늦둥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본 첩의 아들 이스마엘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이삭이 없을 때는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이삭이 나자 그는 찬밥 신세가 되었습니다. 속이 상했습니다. 이런 잔치를 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색동옷을 입고 아장아장 걷는 동생 이삭을 미워했습니다. 배 다른 동생 이삭이 싫었습니다. 그를 비웃고 놀려댔습니다. 이를 본 이삭의 엄마 사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습니다. 자기 남편에게 이런 몹쓸 놈의 모자를 당장 내쫓으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도 자기 아들입니다.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모자를 정리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잘못된 한 번의 선택은 크게 후회합니다. 불의는 정리해야 합니다. 병든 썩은 가지는 잘라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가 나무 뿌리까지 왔다고 하셨습니다. 늘 주 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박충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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