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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려서부터 오늘까지 (삼상 12:1-5, 행 20:17-21, 눅 23;4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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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전 국민일보에 "三餘"라는 제목의 글이 있어서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첫째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나서 저녁에 가족들과 오손도손 둘러앉아 정담을 나누는 여유로움이요, 둘째는 일년동안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여 가을에 풍성한 추수를 하고, 그것을 창고에 가득 쌓아놓고 나서 온 겨울을 풍요롭게 지나게 되는 여유로움이요, 셋째는 한 평생 열심히 살면서 자녀들을 양육하고 교육시켜서 모두 다 자립시키고 난 후 노년을 즐기는 여유로움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루를 놓고 볼때는 저녁시간의 여유로움이요, 1년에 있어서는 연말의 여유로움이요, 일생에 있어서는 노년의 여유로움을 일컬어서 "三餘"라고 했습니다.  3가지 공통점은 하나같이 마무리를 어떻게 하였느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시작을 한다는 것은 매우 흥분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무리를 잘 하는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시간에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경건한 성도들은 하루를 시작하면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좋은 일을 이루어주실 것인가?”라고 하면서 기대를 가지고 힘차게 하루를 출발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루 종일을 살면서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나서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시간이 되었을 때 과연 만족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겠습니까?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온갖 몹쓸 일들을 다하고 나서 하루를 마감할 때 과연 그 마음이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루의 평가는 아침이 아니라 온 하루를 살고 난 뒤 저녁에 내려져야 합니다. 대체로 우리는 섣달 그믐날이 되면 회한에 젖게 됩니다. 정초의 결심과는 달리 지나간 일년을 돌아보면 탕자같이 너무 멀리 떠나 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한평생을 살고 나서 인생을 마감하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습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다 살고 났을 때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훌륭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주님을 목숨 걸고 믿고 전하던 사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승리의 개가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죄수는 그 참혹한 십자가 위에서 그 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을 가장 훌륭하게 장식한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한 사람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만일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면 무엇부터 먼저 해야 하겠습니까? 이 순간 나의 가장 우선적인 일 즉 나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정해지겠습니까? 만일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일상 삶의 우선순위에 엄청난 수정이 가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을 일컬어서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악한 종처럼 주인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니 생각하고 허구한 날 먹고 마시고 때리고 싸우고 하는 삶을 영어로 “everyday-ism(여느 때 주의)”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날이 그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이런 매너리즘에 빠져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시에 오십니다. 그때는 이미 늦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지금 여기가 우리 사람의 마지막 순간인줄 알고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사무엘서 본문은 사무엘의 고별설교라 일컫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사무엘은 젖 뗄 나이가 되면서 성전에 와서 에봇을 입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제 그는 백발이 성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역을 마무리해야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무엘은 자기의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왕 앞에서, 백성들 앞에서 검증을 받습니다. 그만큼 사무엘의 삶은 한평생 성결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만 충성했을 뿐입니다. 백성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에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코 자기 개인의 영달이나 부귀영광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온 백성이 그것을 검증했습니다. 지도자로서 참 훌륭한 본보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무엘의 이런 검증은 하나님께는 자기 고백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다면 그런 인생은 승리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무엘은 인생과 사역의 승리자입니다. 하나님의 벗이었던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다고 인정받았던 다윗도 역시 승리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왕을 향한 경고적 의미도 있습니다. 만일 왕이 그 주어진 권력을 하나님과 백성을 위하여 선용한다면 그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주신 권력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악용한다면 그는 실패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할 줄 모르는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쥐가 고양이에게 쫓겨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결국 그 쥐는 고양이에게 잡히고 말게 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급해서 도망칠 때는 최선을 다해 달립니다. 그러나 쥐구멍으로 피하는 동안에 조금 전가지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생각 없이 쥐구멍에서 나오다가 기다리고 있던 고양이에게 잡아 먹히고 말게 됩니다.

이미 사무엘은 과거 사사시대의 비극적인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백성들이 그렇게 끈질기게 요구하는 바람에 왕을 세우기는 했으나 미래를 내다보면 사사시대의 비극을 되풀이 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의 선두에 왕이 서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 왕도 지금은 화려하게 출발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처럼 사역을 마칠 때,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검증을 받을 때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무언중에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무엘서 1절을 보면 “사무엘이 온 백성에게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새 번역에는 “사무엘이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무엘은 단지 무슨 역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고별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신6: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말씀하실 때 맨 먼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들어라 이스라엘아!”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비록 무덤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내 말을 듣는 사람은 살아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속의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사는 길은, 신앙과 삶에 승리하는 길은 주의 말씀을 듣는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아주 불행한 말이 잇습니다. 그것은 듣기 싫은 말을 길게 할 때 그것을 “설교 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설교가 무엇입니까?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의 삼중성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는 육신이 되신 말씀입니다. 둘째는 기록된 말씀으로 성경입니다. 그리고 선포되는 말씀으로서 설교라고 했습니다. 설교를 잘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첫째 왕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행자지해서 결국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둘째 왕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가장 위대한 왕 승리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성도 여러분이 택할 인생은 어떤 것입니까? 스스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3. 사무엘은 그 어머니 한나가 눈물의 기도로 간구하여 낳은 기도의 아들입니다.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던 밀란의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말은 이미 그 옛날에 사무엘에게 적중된 일입니다. 그 사무엘이 나중에 이스라엘의 사사와 선지자로 사역할 때 그가 얼마나 열심히 기도생활을 했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국난에 즈음해서 사무엘에게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겠습니까? 그리고 사무엘 자신도 “내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않겠다”고 백성들 앞에서 다짐했습니다. 사무엘의 삶은 이와 같이 기도로 일관된 삶이었습니다. 그가 기도로 사역할 때 이스라엘은 주변의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기 기도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을 아는 사람은 기도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도착했을 때 애굽 군인이 뒤좇아 왔습니다. 그때 모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홍해를 헤엄쳐 건너자고 옷을 벗었습니까? 애굽 군인과 싸우자고 군인을 점검했습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엎드린 일이었습니다.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는 전후무한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기도의 능력을 아는 모세이기 때문에 그는 일만 있으면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때그때마다 해결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만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맡아 주실 때 하루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업을 기도로 lt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앞서 가시면서 홍해라도 갈라 주실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가장 작은 일이라도 하려면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그 일이 하나님께 받으심직한 일이 될 것입니다. 아니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서부교회를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3년간 목회하고 마지막 고별설교를 할 때 “아시아에 들어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라고 했습니다. 그가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할 때 그 원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겸손과 눈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눈물“이 무엇입니까? 눈물의 기도 아닙니까? 그리고 그가 지금 에베소를 떠나면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행20:32절에 보면 ”내가 여러분을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떠나면 교회에 어려운 시련이 닥칠텐데 이것을 어떻게 예방한단 말입니까? 바울이 할 수 있는 한가지 일, 가장 강력한 일은 기도를 통하여 주님과 그 말씀에 부탁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 생애의 결산입니다. 그 첫마디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즉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말씀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역시 기도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의 대업의 원동력이 아니겠습니까?

처음부터 기도로 시작하십시다. 항상 기도하면서 우리 삶을 살고, 우리 일을 감당해 나가십시다. 그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승리에 참여하십시다. 이것이 오늘 설교 제목 “어려서부터 오늘까지”의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첫 날부터 지금가지”라고 한 말의 의미입니다. 말씀과 기도, 여기 하나님이 주시는 큰 승리가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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