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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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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어느 회사에서 날마다 점심때가 되면 공장의 종업원들에게 점심 식사를 무료로 제공하였습니다. 힘든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제공되는 점심은 국수나 보리밥과 같은 값싼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 사장은 가끔 공장에 들려서 종업원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종업원들은 사장에게 고마와하면서 감격해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자신들과 같은 음식을 한 자리에 앉아서 나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청년 노동자는 고마워 하지도 않고 오히려 동료들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장이 평소에는 호와 호식하며 잘 먹다가 어쩌다 한번 회사 식당에 들러 근로자들과 함께 나누는 식사는 그에게는 별미<別味>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근로자들과 동고동락하고 그들의 고난에 참여하기를 원한다면 어쩌다가 함께하는 점심식사 정도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깜작 쑈 일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근로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법은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짊어지시고 해결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계십니다.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들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3-6절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1> 사람들에게 멸시 당해 버림 받고
  2> 간고를 <艱苦>를 많이 격었으며
  3> 질고<疾苦>를 지고
  4>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생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멸시 천대 다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어주신 구세주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어떤 분으로 믿느냐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분으로 보느냐에 대한 응답입니다.
  불란서의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는 어느 날 정원을 거닐다가 발밑에 밟히는 것을 뱀으로 알고 깜작 놀랐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뱀이 아니고 썩은 새끼줄이었습니다.
  그때 부터 그는 보이는 현상 세계를 의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보이는 이 세계와 사물이 정말 실체 내지는 본체 그대로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회의론에서 시작합니다.
  어쩌면 내가 현재 보고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실상이 아닌 허상인지도 모르며,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바로 알고 있다고 속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회의론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로 보느냐에서 출발합니다.

  사람을 바로 보지 못하면 그 사람에서 실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바로 보지 못하면 실패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바로 보지 못하면 신앙생활도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들과 제자들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보느냐 였습니다.
  마16:13-15에 보면 예수께서 가이샤라빌립보 지방을 여행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를 어떤 분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신앙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1. 부활한 세례 요한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관찰한 바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었다가 살아난 세례 요한으로 보고있다는 것입니다.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을 세례 요한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사람들의 기대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당시의 권력자 헤롯왕의 비리에 대하여 담대히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검소하게 선지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서민 군중들에게 그는 정의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를 돕거나 변호할 만큼 강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억울하게 옥살이 하다가 헤롯왕의 칼날에 죽고 말았습니다.
  군중들은 그를 아쉬워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이므로 혹시 부활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며 천국 복음을 전파 하셨습니다.
  설교 내용도 세례요한과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중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으로 본 것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들이 기대한 세례 요한이 아니었습니다. 군중은 그를 잘못 본 것입니다.

  2. 엘리야나 예레미아로 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엘리야나 예레미아는 애국자들입니다.
  엘리야는 나라가 우상 숭배로 어지러워졌을 때 민족의 신앙을 정화하고 우상을 타파하기 위해 비신앙적인 무리들과 외롭게 투쟁하다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아는 자기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로 인하여 불행한 것을 보고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하였던 선지자입니다.
  나라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가 백성들이 노예처럼 고생하는 이때에 그들은 엘리야와 예레미아 같은 지도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엘리야도 예례미아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엘리야이기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실망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3.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잘못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기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이지 우리가 기대하여 만들어 놓은 허상이 아닙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모습의 예수를 구하지 말고 내가 예수의 기대와 바람에 합당한 모습을 갖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에 대하여 누구라 하든 예수님은 나의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로 보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대와 소망에 어긋날 때 그를 떠나고 배반하고 나중에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보고 믿은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은 증거 되고 천국은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고백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사53:4절에서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서 질고와 슬픔을 당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리고 매 맞은 이유가 바로 우리의 죄를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위해 고난 받는 종으로 표현한것에 비해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야를 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가랴서 9:9-10에 보면 “시온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선지자의 이 예언은 마태복음 21:1-11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에 놓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는 장면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장면은 마치 전쟁서 승리한 한 왕이 자신이 정복한 도시에 당당히 입성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싸움에서 승리한 정복자로서 오히려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장면은 그가 겸손의 왕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왕이시면서 온유와 겸손으로 오신 예수, 그는 사상가가 아닙니다. 단순히 민족 운동가이거나 세상 정치적인 왕은 더욱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훌륭한 사상가나 성현 군자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 분은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처럼 우리의 질고와 죄 짐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시기 위해 나를 대신해 죽어 주신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일회적으로 끝나 버린 깜짝 쑈가 아닙니다. 지금도 그를 구원의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납니다.

  죄 사함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모든 저주와 불행이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풀어집니다.
  함께 동행하시고 도우시는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박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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