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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조연배우9>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린 아리마대 요셉 (막 15: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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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조연배우

이 시간 한 번 우리의 기억력을 테스트 해봅시다. 여러분, 지난주 설교 내용이 기억나십니까? 지난주에 우리는 마가복음 15장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등장한 두 사람의 조연배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과 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끝까지 목격한 후 결국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한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5장에는 이 두 사람 말고도 또 한 사람의 조연배우가 나옵니다. 비록 조연급이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 같은 존재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구레네 시몬과 마찬가지로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도 성경의 이 장면에 단 한번 등장하고는 바로 사라집니다. 다시는 그의 이름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 특이한 것은 이 아리마대 요셉에 대한 묘사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에 모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비록 성경에 단 한 번밖에 안 나오는 사람이지만 4복음서가 모두 그가 한 일이 정말 소중한 일이었다고 평가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이름은 어떤 뜻일까요? 구레네 사람 시몬과 마찬가지로 뒤에 나오는 이름 ‘요셉’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아주 흔한 남자 이름입니다. 야곱의 아들로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나 예수님의 아버지 목수 요셉 등이 있지요? 또, 앞에 나온 아리마대는 그의 출신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 ‘아리마대’라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예루살렘 서북쪽으로 약 35km 떨어진 도시로 현재는 ‘리다’로 불리는 지역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아리마대’와 ‘리다’ 발음이 조금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아리마대를 많은 사람들이 사무엘상 1장 1절에 나오는 라마다임소빔과 같은 곳일 것이라고 봅니다. 라마다임소빔은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가 살던 곳입니다. 사무엘의 고향이라는 말이지요. 아리마대 요셉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사사이며 선지자인 사무엘과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것은 의미 있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역사 상 위대한 구원의 사건을 이룬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화려하고 거창하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아니 온 인류를 구원한 사건에 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자이며 존귀한 공회원

그러면 복음서에 나온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한번 살펴봅시다. 재미있게도 4복음서는 이 인물에 대해 각각 조금씩 다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27장 57절과 58절을 제가 읽습니다.

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마태복음은 아리마대 요셉을 ‘부자’이며 또한 ‘예수님의 제자’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당당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고 빌라도는 그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부자라 한들 어떻게 대제국 로마의 총독이 유대인인 아리마대 요셉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 해답은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에 나옵니다. 15장 43절에 보니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당돌히’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했는데 그 까닭이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그가 ‘존귀한 공회원’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공회’란 유대인의 최고 의회인 ‘산헤드린’을 뜻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국회인 셈인데 아리마대 요셉은 국회의원 중에서도 ‘존귀한’ 국회의원이었습니다. ‘존귀하다’는 말은 ‘저명한,’ 혹은 ‘존경을 받을만한’이라는 뜻이므로 아리마대 요셉은 여러 국회의원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큰 영향력을 가진 저명한 국회의원이었다는 말이고 그래서 아무리 로마 총독인 빌라도라 하더라도 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본문 43절에서 아리마대 요셉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다고 말한 점입니다. 누가복음 23장 50절과 51절을 제가 읽습니다.

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누가복음에서도 아리마대 요셉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다고 설명하는데 나아가 50절에서는 그를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왜 존경을 받고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 51절의 괄호 친 부분에서는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쉬운 말로 성경을 풀어 번역한 표준새번역을 보면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는 예수를 죽이려던 의회의 결정과 행동에 찬동을 한 일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는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공회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의회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결의할 때 찬성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71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나머지 70명은 다 찬성했지만 아리마대 요셉 의원만 반대했다는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두가 다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찬성하는 방법이라 할지라도 나의 양심 상 아니라고 생각되면 반대할 수 있는 용기를 뜻합니다. 공의회 의원들이 모두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하는데 홀로 찬성하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릅니다.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나아가 자신이 애써 쌓아올린 지위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것이 무서워서 속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따라가곤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용기와 양심을 지닌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실패를 많이 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실패가 모두 자신의 신념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링컨은 1846년 휘그당 당원으로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지만 두 번째 선거에서는 떨어지고 맙니다. 그 까닭은 당시 미국이 벌였던 멕시코와의 전쟁에 반대하고 멕시코로부터 빼앗은 영토의 노예제도를 인정치 않는다는 <윌모트 조항>에 찬성해서 선거민들로부터 지지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1856년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공화당에 입당해서 1858년 일리노이 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선거운동을 하면서 행한 연설에서 링컨은 또 한 번 주민들에게 인기 떨어질 말을 하고 맙니다. 그는 기존에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주는 어쩔 수 없으나 새로 연방에 편입되는 준주(準州)에서는 더 이상의 노예제도를 반대한다는 연설을 했다가 선거에 패배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1860년 공화당은 그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하여 미합중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한 남부 주들은 링컨의 당선에 반발하여 연방으로부터 탈퇴하고 아메리카남부연합을 결성합니다. 하지만 링컨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타협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남북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링컨은 용기 있는 국회의원이었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소신이 옳더라도 내가 이 말을 하면 인기 떨어지고 선거에도 패할 것을 뻔히 알기에 자신의 소신을 굽히는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링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에도 이런 용기 있는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 아리마대 요셉은 정말 올곧고 용기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존경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런 정직하고 의로운 성격으로 인해 존경을 받게 된 것이지요.

여기까지 정리해보면 아리마대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부자였을 뿐 아니라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공회원(국회의원)이었습니다. 선하고 의로운 성품 때문에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공회원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의 제자, 즉 열두 제자들처럼 이미 예수님을 믿고 따른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임을 숨기다

그런데 이렇게 부자이며 높은 지위를 가진 아리마대 요셉, 그 의롭고 올곧은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당시에는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다같이 요한복음 19장 38절을 봅시다.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여기서 ‘은휘’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참 어렵습니다. 저는 처음에 38절이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제자들 혹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는 뜻인 줄 알았습니다. 말투가 그렇게 오해하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동번역을 보니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너무 쉽습니다. “그도 예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즉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알까봐, 자기가 기독교인이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실을 알면 자기 지위에 불이익이 생기고 손해 볼까봐 숨기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2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실제로 유대의 관원이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 중에 예수 믿는 사람도 많았지만 바리새인들이 알면 회당에서 추방 당할까봐 그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절인 43절에 정말 충격적인 말이 나옵니다.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무슨 뜻인지 제가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더 소중히 여기면 이런 일이 생깁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이런 사람 중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의롭고 용기 있는 사람이 이런 비겁한 행동을 했을까요? 조금 전에도 살펴보았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지위나 재산이나 인격이나 신앙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요즈음 말로 바꾸자면 돈 많지요, 집안 좋지요, 공부 많이 했지요, 얼굴도 잘났지요, 정말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 참 잘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런 사람이 오히려 예수 믿기 어렵습니다. 너무 잘난 사람, 뛰어난 사람이 예수 믿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왜냐?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이나 능력을 의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런 사람들은 혹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조금이라도 자기 지위나 물질이나 명예에 누를 끼칠까봐 두려워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손해 보기 싫고 내 소중한 것을 내놓기도 싫고 포기하기도 싫어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7절부터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청년은 큰 부자였고 관원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예수께 달려와서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대답하자 그 부자 관원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왜?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중요하고 영생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자기의 그 많은 재산이 너무 아까워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뭔가 많이 가진 사람은 그것을 포기하기 정말 어렵습니다. 그것이 재물이든, 지위든, 명예든, 학력이든 자고로 뭔가 많이 가진 사람은 그것을 포기하는 것이 어려워 예수 믿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본디 의롭고 용기 있는 사람이며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지라,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이 가진 그 지위와 재산에 손해 보는 것이 두려워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사실을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는 너무 소극적으로 비겁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다

그런데 이렇게 비겁하고 소극적이던 아리마대 요셉에게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다시 마가복음 15장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43절에 보면 아리마대 요셉은 ‘당돌히’(당당하게) 빌라도 총독에게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시체를 세마포로 싸고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둡니다. 좀더 상황을 자세히 알기 위해 누가복음 23장을 다시 봅니다. 23장 53절에 보면 이 바위 무덤은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무덤이었습니다. 무슨 무덤일까요? 성지순례를 다녀오신 분들은 다 보셨겠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무덤은 바위를 인공적으로 파서 만든 굴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헷 사람들에게서 사서 아내인 사라를 묻고 자신도 묻힌 막벨라 굴이 바로 이런 바위를 파서 만든 가족묘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위굴 무덤을 파서 가족 대대로 묻게 되는데 이 바위굴 중앙에는 돌로 만든 침상 같은 것이 있고 죽은 사람은 그 위에 누이게 됩니다. 나중에 시체가 다 썩어 유골이 남으면 그 유골은 바위벽을 파서 만든 선반 같은 곳에 올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무덤 벽에는 대대로 그 가족이 묻히는 것이지요. 부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은 아마도 자기를 위해 새 바위굴 무덤을 마련해 두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부유한 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때가 도래하기를 고대하며 사후에라도 그때를 맞이하기 위해 예루살렘 근방에 자기 가족묘를 마련해 두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무덤입니다. 한 번도 써 본 일이 없는 소중한 새 무덤이며 나와 가족들이 나중에 묻힐 소중한 소유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새 무덤을 기꺼이 예수님을 위해 내놓은 것이지요. 왜 그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를 모신 것일까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인은 십자가에 그대로 방치되어 새가 쪼아 먹게 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 시체가 매장되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죽하면 전도서 6장 3절에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낙태된 자, 세상에 태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은 자보다 더 못하다고까지 말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21장 22절은 죽을죄를 지어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일지라도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해 주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리마대 요셉으로서는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 위에 그냥 방치해 둘 수 없었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만도 억울한데 게다가 예수님이 매장되지 못하는 수치까지 당하는 것은 그 분의 제자로서 도저히 볼 수 없어 그 시체를 인수 받아 자기가 묻히려고 준비해 놓았던 새 무덤에 모신 것입니다. 여러분, 왜 부자가 예수 믿기 어렵다고 했습니까? 돈 때문이지요? 그 재산을 포기하지 못해서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아리마대 요셉은 그 중요한 재산인 새 무덤을 주님을 위해 기꺼이 드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당돌히’ 요구했는데 이로 인해 자기가 예수의 제자임이 드러나면 손해 볼 것이 뻔한데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손해 보는 것이 무서워 예수의 제자임을 숨기고 살던 비겁한 아리마대 요셉에게 예수님의 죽음 이후 놀라운 변화가 생겨서 지금 모든 위험이나 어떤 손해도 감수하며 주님의 시신을 모신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비겁한 사람이 내 새 무덤을 기꺼이 내놓음으로, 내가 내놓은 무덤이 주님의 부활의 현장이 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내 무덤에 예수님이 묻히고 게다가 부활까지 하시다니요! 이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을 때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시 또 한 사람의 조연이었던 아리마대 요셉은 어떤 점에서 훌륭한 사람입니까? 손해 볼 줄 뻔히 알면서, 자기 명성과 지위에 누가 될 줄 알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한 용기입니다. 또한 나의 소중한 새 무덤을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포기의 자세입니다. 비록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숨기기도 했던, 우리와 다름없는 연약한 사람이지만, 그는 예수님의 죽음 후 또 다시 용기를 되찾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내 것을 기꺼이, 과감하게 내놓음으로 위대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평소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까지 말하다가(요 11:16) 막상 주님이 돌아가시자 다 주를 버리고 도망합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았고, 또 일부러 숨기기까지 했으나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자마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당당하게 어려운 일들을 다 감당합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을 장사 지낸 영광을 얻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무덤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영광까지 맛보게 되지요.

내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놓을 때 그것을 통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 소중한 것을 주님을 위해 내놓지 못할 때, 부자 청년처럼 그것을 포기하지 못함으로 예수님을 진정 따르지 못하게 되면 그 것은 우상이 됩니다. 그것이 재산이든 지위든 학식이든 그 무엇이든 말입니다. 하지만 아리마대 요셉의 재산과 지위처럼, 그의 새 무덤처럼 주님을 위해 기꺼이 드릴 수 있고 포기할 수 있을 때 그 속에서 진정한 생명의 역사, 놀라운 구원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 소중한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에게 기꺼이 바치려 했을 때(창 22:12), 이름도 없는 한 아이가 주님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오병이어를 내어 놓았을 때(요 6:9),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전 재산인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을 때(막 12:41~44) 이러한 위대한 역사는 일어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자식 이삭, 한 아이이나 과부에게 있어 남들 보기에는 정말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자신에게는 가장 소중한 소유였던 오병이어, 나의 전 재산인 두 렙돈, 이 모든 것들이 우상이 되지 않고 과감하게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될 때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소중합니까? 아리마대 요셉처럼 우리의 재산입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놓은 지위나 명성입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처럼 내 소중한 자녀입니까? 아니면 한 아이나 가난한 과부처럼 내 소유 전부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나의 가장 소중한 것조차 주님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고 즐거이 드릴 수 있을 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아무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에 대핸 예고를 몇 번이나 미리 들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부활 사건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기꺼이 내놓은 새 무덤에서 말입니다. 그가 포기했던 소중한 것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역사,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구원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는 결단을 통해서 말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 지금 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니? 그렇다면 그것을 나를 위해 줄 수 있겠느냐?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그것을 통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룰 것이다.”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아멘으로 응답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하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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