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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시는 분의 권세 2 (마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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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는 세 번째 시간이 됩니다. 마태는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수님께서 행하신 세 가지의 특별한 이적의 사건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또 하나는 수많은 군대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 내 주시는 강한 영적권세를 지니신 분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따라 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은 초자연적이며, 강한 영적 권세를 지니신 분이신 것을 마태는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권세의 또 다른 한 가지의 모습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즉, 사람의 죄를 없이 해 주시는 권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와 이러한 권세의 나타나는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발견되는 능력의 모습에는 과연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하나는 문제의 핵심을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중풍병자의 중풍병은 단순한 육체적 질병이 아닌 죄의 문제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지적해 내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환자를 대할 때에, 기계적으로 대하시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육신의 질병을 죄의 결과로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몸에 이상이 있으면, “내가 혹시 하나님께 뭘 잘못한 것이 있어서 이리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종교인들의 경우 더욱 심합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네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은 것”이라고 쉽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오늘날도 한국 교회의 어떤 교회는 모든 것을 다 귀신의 작용으로 여기는 경우를 봅니다. 감기에 걸려도 귀신들려 그렇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병은 이러한 죄로 말미암아 생기게 되는 병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의 경우가 그러한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은 이 사람의 중풍병이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의 마음과 영혼을 아는 것 말고도,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는 서기관들의 마음까지도 읽으셨습니다. 3~4절,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이러한 모습을 독심술(讀心術, 마음을 읽는 기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었음을 오늘 본문은 보여 줍니다.

이번에 제가 휴가를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통일교의 중견간부로 약 20년을 통일교(The Unification Church)에서 봉사하다가, 20년 전에 통일교가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거기서 뛰쳐나온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40년 전에 이미 한국의 유명한 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을 잘 아는 친구 분이 제가 잘 아는 분인데 이 분에게 물었답니다.  “통일교에는 왜 들어갔어?” 그랬더니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당신도 문선명이와 30분만 대화해 봐. 거기에 안 넘어가는 사람 없어.” 사람의 마음을 읽는 기술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의 마음을 그대로 읽는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 앞에서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마음과 영혼 뿐 아니라, 서기관들의 마음까지도 읽으실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는 문제 해결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2절에 보니,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또 6~7절에 보니,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료 능력은 단순히 육체의 질병만을 고치는 능력이 아니라, 이렇게 원인치료까지도 하시는 능력인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문제 발견의 능력 뿐 아니라, 문제 해결의 능력까지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치료의 능력은 우리가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사죄의 능력, 곧 죄를 용서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는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죄의 권세는 문제를 발견하는 능력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발견하는 능력이나 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물론 대단한 것입니다만, 이는 일부 특별한 사람들도 가질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하는 사죄에 대해서는 능력(power)이라는 말보다는 권세(authority)라는 말을 써야 합니다. 이러한 권세는 부여받아야 하는 성격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죄 사함의 능력과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다고 한 서기관들의 말에서도 입증이 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해 주심으로 이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확인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나 사람의 병을 원인치료까지 하실 수 있는 능력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죄 사함의 권세까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바로 제자들인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죄에 대한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죄란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죄란 것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란 그저 연기와 같이 흐지부지 없어질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결과가 어떻게든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란 무서운 것입니다. 옛날에 모세는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한 약속을 꼭 지키겠다고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도 많이 속아본 경험이 있었던 모세가 한 말입니다. 민 32:23,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you may be sure that your sin will find you out).” 우리는 이 말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의 죄가 나를 찾아낸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가 바로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밝혀준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죄와 싸우다시피 한 사람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입니다. 마틴 루터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죄를 안 지을 자유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죄인이란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유마저 없는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죄가 이끄는 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모습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롬 7:19~20).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받아 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든지, 아니면 죄의 권세 아래에서 살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이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죄의 힘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란 사실, 무서운 것입니다. 이 죄가 평소에는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한번 드러나게 되면 그 사람을 추악하게 만들기도 하고,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고, 고꾸라트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죄의 문제는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각의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실존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죄에 대하여 진정한 실감을 간직하지 못한다면,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사죄의 능력은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됩니다. 그저 “아, 예수님에게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가 있구나” 하고 여길지는 몰라도, 이러한 죄에 대한 사죄의 능력을 피부적으로 느끼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한 여인을 압니다. 이 여인은 무척이나 값나가는 비싼 향유를 예수님에게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았던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사용한 향유는 일반 사람의 연봉에 해당될만한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행위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향유를 허비한 것을 나무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이 여인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눅 7:47).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여인은 죄가 뭔지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아까울 것이 없다고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사랑함이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렇게 죄라는 것은 우리 사람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것이지만, 이 죄를 없이 하고자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담을 수 있는 그러한 성격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죄의 문제는 하나님과 연관이 되는 깊고 심오한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는가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연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 중세시대에 죄를 용서해주는 권세가 있다고 소문이 난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제에게 많은 사람들이 나아와 자기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사제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죄를 고백 받고는 한결같은 처방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깥에 나가서 돌을 구해서 가져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차이점은 큰 죄를 지었다고 여기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큰 돌을 가져오게 하고, 작은 죄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작은 돌을 여러 개 주어서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에 합당한 돌멩이들을 주어갖고 왔습니다. 그리고 명하신대로 돌을 주어왔노라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온 돌들의 크기를 다른 사람의 돌들과 은근히 비교하면서, 작은 돌을 주어온 사람들은 큰 돌을 주어온 사람들 앞에서 은근히 으스대는 분위기였습니다. 명하신 대로 돌들을 주어왔노라고 보고하는 이 사람들에게 사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내가 여러분의 죄가 다 용서받는 길을 제시하겠소. 이제 여러분들이 주어온 돌을 있던 그곳에 그대로 갖다 놓고 다시 오시오.” 큰 돌을 주어온 사람은 쉽게 그 돌을 갖다 놓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돌을 주어온 사람들은 제자리에 갖다 놓기가 아주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에서 그것을 주웠는지 확실하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죄에 합당한 돌의 크기는 얼마만한 것입니까? 여러분은 그 돌을 그대로 갖다 놓을 위치를 분명히 알고 계신지요? 나의 죄가 용서받고 해결 받았다는 객관적인 사실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여정의 삶에 잠시 중간평가를 제시받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느냐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집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로 죄 사함을 받은 것으로 간과하고 그냥 넘어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해결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오늘날 교회는 사죄의 은총에 따른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교회에 나온다는 이유로 나의 죄가 스리슬쩍 사라졌다고 여긴다면, 사죄의 은총의 체험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진지하게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진정, 나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는가?”

교회는 바로 이렇게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고전 1:26~2:2).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렇게 바울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자매들의 모임인 교회의 성격을 다른 인간적인 데에서 찾으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은 모습에서만 찾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나 스스로에게 이러한 죄 사함의 은총이 임하였는가를 가장 먼저 질문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첫 번째로 이루어져야 할 모습이고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서 찾아야 할 첫 번째 내용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한 사죄의 확인을 이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은혜에 참예해야 할 것입니다. 거기에 크리스천으로서의 진정함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시작해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귀한 은혜의 자리에 참예하실 수 있게 되시기를 진실로 기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중풍병자를 보시고, 그 죄를 사하심으로 그 중풍병 마저도 고쳐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회상하여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광경을 회상하면서 나 역시 이 중풍병자처럼 죄 사함을 받았는지를 다시 한 번 질문하게 됩니다. 죄 사함을 받은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 고유한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나의 모습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죄 사함의 은총에 참예하게 된 사람의 행복을 저희들에게도 허락하여 주셔서, 이 세상 속에서 어느 무엇에게도 얽매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얽매일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노강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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