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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따르는 자들의 권리 (1) (마 9: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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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이 해야 하는 마땅한 일의 모습을 “권리와 의무”라고 합니다. 권리란 “어떤 일을 자기의 마음대로 행할 수 있는 정당한 힘이나 자격”을 말하는 것이고, 의무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나, 법이나 규정에 의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나 의무를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사람됨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로서 지녀야 할 권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를 예수님의 경우를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그들의 권리를 어떻게 행사하였는가를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영국의 성경학자인 바클레이(William Barclay) 목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종교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첫째, 남의 연약함을 돕기보다 자기들의 신성을 보존하기에 급급한 사람들이다. 이는 마치 전염이 두려워 환자의 진찰을 거부하는 의사와 같다. 둘째, 격려보다 비난에 힘쓰는 사람들이다. 남의 허물 지적에만 힘쓰고 그 개선에는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잘못된 모습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셋째, 이들의 선행은 용서와 동정보다 정죄로 끝난다. 이는 병을 진단만 하고 치료는 하지 않는 의사와 같다. 넷째, 이들의 종교는 실제적 도움보다 외적인 전통에 치중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은 그들이 바리새인이요, 서기관이라는 신분에 대한 권리행사를 이런 식으로 하였다는 것을 언급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바클레이 목사는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마태는 바리새인보다 위대하다. 왜냐하면, 마태는 예수님을 따름으로 자기가 세리라는 구조와 틀에서 벗어났지만 바리새인은 그들의 전통과 틀을 끝내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믿는 종교에 충실한 사람이 된다는 것만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지닌 신앙으로 말미암아 나 스스로에게 어떤 변화를 꾀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야 비로소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종교인의 자리에 머무르기보다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바르게 따름으로써, 이러한 제자도에 따른 자기 변화의 폭을 더욱 깊이 있게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우리 자신의 의식의 변화를 위해서 지녀야 할 자세를 예수님의 모습에 빗대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저는 이러한 변화를 향한 자세를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있어서 어떤 의무감으로서 필요한 자세라고 표현하기보다는,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있어서 당연한 권리”가 되어야 한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필요하고 요구되는 모습의 차원을 넘어서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반드시 누려야 할 권리로 표현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러한 모습을 우리 크리스천들이 권리처럼 여기고 강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를 지녀야한다는데 점에서 더욱 강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주님/의 모습에 대해서, 이를 마치 우리들이 지녀야 할 당연한 권리처럼 여길 수 있는 자세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권리로서까지 받아들여야 할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것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에 근거한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행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 첫 번째 장면은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입니다.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를 보시자마자 이 사람이 죄를 많이 지어서 이렇게 중풍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시고, 이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 중풍병자 편에서 회개하고 고백하기도 전에, 또 죄 사함을 간구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선언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우리가 자세히 염두에 두지 않으면 그냥 넘어가기 쉬운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이런 면에 아주 예민했던 서기관 같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참람하다”라고 속으로 못마땅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 그 다음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태는 이 마태복음을 썼다고 알려져 있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하지만 이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로마사람들의 앞잡이로서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걷어다가 로마정부에 바치는 그러한 일을 하던 세리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리는 로마인의 앞잡이라 하여 일반 유대백성들에게서 미움을 받던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던 세리 마태를 향해 “나를 따라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되어, 결국 12사도의 한 사람이 된 마태입니다. 마태는 이렇게 자기를 불러주신 예수님께 감사해서였는지,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합니다. 그런데 이 식탁에 마태는 다른 동료들인 세리도 함께 초청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거룩함의 상징이었던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 죄인이나 더러운 사람으로 여겼던 사람들도 함께 초대하여 예수님과 한 자리에서 식사하도록 주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리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러한 자리에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도 데리고 가서 함께 식사를 하신 것입니다. 이 광경을 목도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아주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비난 섞인 말을 합니다.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파격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예수님 당시에 이렇게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다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이 볼 때,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눈 이러한 식탁의 교제가 그 당시 얼마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는 유대교의 율법적으로도,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의 민족적인 감정에서도 그리하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마태와 같은 세리들은 아주 경멸하였습니다. 이 세리들은 마땅히 거두어야 할 세금보다도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여서 로마의 앞잡이 역할을 하고, 자기들의 배를 불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러한 세리들은 사기꾼이나 살인자나 다름없는 따돌림을 받은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식사한 ‘또 다른 죄인들’은 또한 어떤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이들은 파렴치한 도덕적 과실을 저질렀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심하게 따지고 들었던 문제인 음식에 관련된 율법사항이나 예배에 관계된 율법조항이나 종교적인 정결함을 준수하지 않은 그러한 사람들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오늘날 학자들은 이 죄인들을 세리와 견주어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대금업자와 같이, 율법을 범하는 그러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유대교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러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셨을까요? 우리는 이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말을 듣고 대답하신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2~13절,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해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예수님께서 이해하는 하나님은 바로 선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들에게도 햇빛과 비를 똑같이 내려주시는 그러한 보편적인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를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마 5:45,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는 분이시니라.” 이러한 하나님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시라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감싸 안으시는 분이시라”는 확신에, 예수님은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식사도 나누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은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을 어떤 의무감에서보다 오리려 “권리”로 여기고 행동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선한 사람에게뿐 아니라 악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는 분으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 사함의 권세입니다. 8절,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여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그러므로 이러한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식탁의 교제를 나눈다는 사실에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마태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의 교제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그에게 부여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보여주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 그런 분께서 이렇게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을 기꺼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죄 사함의 권세를 지닌 분으로서의 그 권리를 이렇게 죄인들과 어울림으로써 이들을 용서하고자 준비되어 있는 하나님을 소개하는 모습으로 행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무슨 권세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이러한 권리를 자기를 드러내거나 아니면,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데 쓰고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죄 사함의 권세를 사람들에게 정죄 받고 구원의 소망이 끊어졌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권리로 나타내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권리행사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권리행사는 이 세상의 권세자들과는 질적으로 완연하게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람들은 어떤 목적이나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그룹을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경우, 이러한 그룹 안에는 어떤 규칙이나 행동기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러한 규칙이나 행동기준에 따르려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그룹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기피하거나 추방하려고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그 지방의 관습을 무시하고 턱수염을 길렀다는 이유로 핍박받은 사실도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교회에 있는 경우, 그 교회는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자기들 끼리끼리만 친교를 나누게 됨으로 결국은 쇠락해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끼리끼리의 모습이 무엇보다도 먼저 극복되어야 합니다. 18세기에 영국에서 생겨나서 부흥하게 된 감리교회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요한 웨슬레(John Wesley)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 어떤 교양 있는 부인들이 자기들의 집을 그 당시 소위 ‘하층계급’의 사람들에게 개방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영국의 교회인 성공회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있고 교양 있는 교인들이 자기들끼리만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감리교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요한 웨슬레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자세에서 벗어나 지체가 낮은 사람들을 향해서도 문을 열고 마음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국에서 감리교는 부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장로교도 영국의 지배계급에서 따돌림을 받은 이른바 청교도들이 따로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서 비롯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미국으로 건너와서 신앙의 부흥을 꾀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의 장로교는 소위 귀족이나 특권층의 교파가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소위 부흥하는 침례교나 오순절교 같은 교회나 교단을 보면 이렇게 하층계급의 사람들에게 문이 열려 있는 현실을 보기도 합니다.

각 시대에 따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리들과 죄인들’의 모습은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제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찾아 나서고,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의 잔치에 이끌어 올 길을 부단히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의 권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의무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하는 권리행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권리를 행사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의 권세를 받았던 예수님과 같은 권세를 지닌 제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죄 사함의 권세를 주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8절에서 알 수 있게 됩니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영광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 번역은 부분적으로는 조금 틀렸습니다. 하지만, 이 틀린 모습은 비중이 아주 크기 때문에 중요한 점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이 8절을 바르게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영광을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런 영광을 사람에게”가 아니라 “사람들에게”라고 복수형으로 써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이러한 죄 사함의 권세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만 아니라, 이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제자들에게까지 주신다는 의미의 말씀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권리로 행사하신 모습을 그대로 자기의 권리로 행사하는 그러한 모습인 것입니다. 햇빛과 비를 선한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악한 사람들에게도 내려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에 사로잡혀서 그렇게 행했던 예수님처럼, 그러한 모습을 죄 사함을 지닌 자의 권리로 당당하게 행하셨던 예수님처럼, 이러한 모습을 권리로 알고 행하는 사람 - 이런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바른 제자된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예수에게 죄 사함의 권세를 허락하신 것처럼 죄 사함의 권세를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의 근거를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권리행사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라는 어떤 의무감에서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권리를 행사하는 그 모습이 이렇게 죄인들을 향한 개방된 마음가짐과 삶으로 나타난다면, 바로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당당히 참여하는 모습을 지니는 권리를 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아니라, 그를 온전히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죄 사함의 권세를 허락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죄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어떤 의무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권리로 행사하신 예수님처럼, 저희들도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것이 이상하게 여김을 받더라도 권리로 행사할 수 있는 그러한 제자도를 지닐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의무감에 사로잡혀서 하느니 못하느니 망설이는 저희들이 아니라, 권리를 주장하듯 감당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노강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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