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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예수님을 믿는가? (요 5: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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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잘 가는 어떤 음식점이 있습니다.
이 음식점은 아버지대로부터 자식에게까지 대대로 가업으로 이어온 곳입니다. 그 아버지때에도 음식이 맛있었지만 그 아들이 하는 지금은 더 맛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가업을 잇는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음식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집은 장사로 가업을 잇는 경우도 있고 화문석같은 귀한 것들을 가업으로 잇는 경우도 있고 전통놀이를 가업으로 잇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업을 잇는 경우에 부모가 일부러 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어릴적부터 그것을 보고 자라서 자연스럽게 가업을 잇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오랜기간 닦아온 비법들이 자식들에게 전수되어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가업을 이어줄 때 엄격하게 훈련시키고 가르쳐서 가업을 잇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면 아버지가 하는 일이나 그 아들이 하는 일이나 같을 정도로 같은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나중에는 오히려 아들이 더 계승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때에 아들 에수님으로 인해서 더 발전시켜 완성해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 가에서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므로 유대인들과 부딪치게 된 후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을 넘어뜨릴 구실을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유대인들은 왜 안식일을 범하였느냐고 꼬투리를 잡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나도 일한다."(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더욱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자지간이라 하면 지위 계급의 차이기 있습니다만 유대인들에게는 동격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몰아 부쳤습니다.

18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여기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 격분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19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19절이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앞의 싸움에 대한 연결 부분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아버지와 다름이 없으니, 곧 나를 믿는 자는 아버지를 믿는 것이고 아버지를 믿는 자는 마땅히 나를 믿어야 되는 것이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더 적극적으로 나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십니다.얼른 생각해 볼때는 이해가 됩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못됩니다. 여기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이신 예수님이 하나이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같다라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도 하나님이시고 예수님도 하나님이라면 둘이 똑같으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믿으라고 하십니다.구체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할 근거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해서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으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이신 증거로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20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여기 두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가 행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은 바로 창조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창조하신 모든 것을 붙들고 통치하시는 섭리를 행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해오실때에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거기에 동참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그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지금 여기에서 나타내 보이심으로 아버지를 증거하게 하십니다. 지금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38년된 앉은뱅이 병자를 고치십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25절 이하에 보면 이 문제를 다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여기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합니다. 이것은 곧 지금이 구원의 때라는 의미입니다.지금이 심판의 때가 아니라 구원의 때라고 하십니다.
이 본문은, 이 본문이 안고 있는 역사적 배경을 살펴 보아야만 제대로 그 의미와 깊은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여기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가 주님의 말씀으로 일어나 걸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므로 그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권위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 단지 주님은 이제 그때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제 그 배경을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시내산에 도착해서 백성들을 산밑에 모아 놓고 자신은 산에 홀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받는 장면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20:18-21절을 보시겠습니다.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이것은 모세가 첫번째 시내산에 오를 때에 홀로 은밀히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것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 산 밑에 모여서서 영광과 권능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면인데, 무슨 소리였나 하면 그것은 마치 우뢰 소리와 번개와 나팔 소리라고 그랬습니다. 백성들은 그 소리를 듣고무서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하도 무서우니까 모세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듣고 와서 우리에게 전해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기억해야 될 사건입니다.

왜 이것이 필요하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구원하시는데 있어서 가장 큰 난관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우리를 만나러 오신다면 우리는 죽는다는 것입니다. 왜? 죽습니까?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죽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실 때 한 사람을 부르십니다. 바로 모세입니다.모세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산위로 불러 올리십니다.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그런데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장래에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가 그를 들을 것이니라”고 약속하십니다.

신18:15-20절을 보시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라고 하십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들을 수 있는 수준과 자격이 없어서 모세를 중보자로 세웠던 것입니다.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오른 모세에게 모세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정한 중보자를 하나 세우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세운 중보자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에게 주어 무리에게 고하게 하시리라고 하십니다.

구약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자신과의 사이에 모세와 같은 중보자를 세웠습니다.그러나 사실 그 모세는 바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지칭될 때는 그도 한 인간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백성 속에 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여기서 기억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접근하시기 위하여 중보자를 세우실 수 밖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자마다 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인지라 죄를 보면 그 죄에 대한 보응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빛을 비추면서 어두움을 존재케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얼음이 햇빛을 받으면 녹아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셔서 오실 수 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그 새로운 방법이란? 하나님께 있는 영광과 심판에 관한 거룩을 감추시고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갖고 계신 계획과 우리를 향하여 베푸실 모든 것을 접적으로 전달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은 일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만나시려면 드러내지 않으셔야 하는 것이 있으데 그것이 심판권입니다. 이 심판권을 감추시지 않으시면 그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만나기만 하면 또 죽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근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우리가 만나서 대화를 하면서도 놀라지 않을 뿐 아니라 죽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듯이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모든 하나님의 일꾼들이 그런 대접을 받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고 싶으신데 구원하려고 문만 두드려도 집안에 있던 사람들까지 죽어버립니다. 우리를 구원을 하시고자 하시지만 만날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시겠습니까? 이리하여 찾아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권, 즉 그의 영광과 무한하시고 엄위하신 그의 권위를 전부 비우시고 마침내 종의 형체로 찾아오신 것입니다.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그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히 믿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중보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행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요한복음 14:6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으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없이는 하나님께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종 믿음 생활을 하면서 “나는 하나님을 믿어”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의 고백과 증거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되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그 사람을 받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바울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믿는데 열심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그러나 바울의 결정적인 결함이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핍박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 말고 또 누구를 믿으라고 하는가? 하나님 외에는 신앙의 대상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나중에 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그런 고백을 합니다.

로마서10:1-3에서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죄인들이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하나님과 인간사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누구든지 그분을 믿을때 의롭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는 누구든지 믿기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를 믿는 믿음의 의만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위기가 있습니다.
예수없이 윤리과 도덕으로만 가려고 합니다. 교회 속에서 착하게 살라고 선행을 강조하지만 예수없는 선행은 의미가 없습니다. 고상한 사람이 되라고 윤리를 강조하지만 예수님없는 윤리는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없는 교회 생활은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오직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그분을 붙들어야 합니다. 오직 그분을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구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그분을 우리의 중보자로 삼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중보자로 삼으십시오. 기도의 중보자로 삼으십시오. 믿음의 중보자로 삼으십시오. 모든 삶의 중보자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24-25절을 보십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에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을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먼저 주시는 것은 생명입니다. 우리는 모두 허물과 죄로 죽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만약에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많은 고상한 종교들이 잇습니다. 그러나 강조하는 것은 선이고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38년된 병자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분은 모든 죄악과 질병으로 죽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누가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누구든지 그분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납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정말 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감당치 못합니다. 그래서 감당케 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려내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이 때'입니다.예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대로 믿고 들으면 38된 병자가 낫게 되는 것처럼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무엇을 구합니까?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구약에 하나님깨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자 결국 그들 선조들이 제발 우리에게 보여주지 말고 말씀하여 주옵소서 라고 했는데 정반대인 것입니다. 구약의 약속대로 주님께서 오셨는데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유대인들 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인간의 속성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일차적으로 무슨 실수를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 맨 먼저 요구하는 것이 당신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이들이어든 십자가 위에서 내려 와 보라!'고 아우성입니다. 우리 마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십자가로 다시 올라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려 와서 뺨이라도 한 대 때려 줘야만 속이 후련해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잠하십니다. 이와같은 반응은 얼마나 놀라운 대목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일일이 변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일에 열심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 변명에 급급한 사람만큼 가난한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인간의 아우성과 조롱 앞에서도 묵묵히 당신의 일만 하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찬송을 받으시지만 어느 곳에선가는 모욕을 감내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왜 그렇습니까? "지금은 구원의 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의 생명을 얻기 원한다면 먼저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믿으라고 하는 이 말이 어렵게 느껴집니다.왜 그렇습니까? 믿음으로 얻은 복들을 삶에서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이땅에 오셔서 미리 보여준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법을 보여주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엿더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38년된 병자가 고침을 얻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이땅에 생명을 갖고 오신 분이심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오직 믿음으로 이 모든 생명을 내가 지금 여기에서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 얻고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못된 적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나의 의를 버려야 합니다. 여기 나의 의라고 하는 것은 내가 옳다고 여기는 신념입니다.
그런데 나의 의 나의 신념이 강한 사람들의 내면 속에는 항상 분노감이 많습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내가 옳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옳지 못한 세상 사람들 때문에 세상 때문에 항상 그 마음에 분노감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수님 안에서 나를 용서햇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내가 용서받을 것이 없다고 믿으면 여러분 주님을 내가 믿을 수 없습니다.내가 내 안에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라고 믿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자기의가 무서운지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에 왜 많은 유대인들이 에수님을 못 받아들였습니까?
예수님이 분명히 병자를 살리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주었지만 내 안에 자기 의가 가득차서 결국 그것으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오히려 주님을 박해하고 주님을 핍박했습니다.
오늘 주님주시는 생명을 받았습니까? 영생을 얻었습니까?
이제 주님을 공경하면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책중에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고는 책이 잇습니다. 중국의 지하교인이었던 윈이라고 하는 형제가 자신이 중국에서 어덯게 에수님을 믿었고 전도햇는지에 대한 간증집입니다. 거기에 보면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믿고 증거합니다.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 바울이 힘에 지나도록 고난을 겪고 죽음의 위기를 수없이 경험하면서 믿는 것처럼 지금 중국의 지하교인들치 그렇게 믿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걸고 주님을 믿는 이유가 바로 주님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이제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고백하면서 인정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이 심판주이기 때문입니다.

28절의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는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죽은 자들이 주의 말씀을 듣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미입니다. 이것은 인류 마지막 날에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세상의 심판주로 강림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강림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고 영원한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자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심판으로 떨며 떨어질 자가 있다 는 것입니다.

며칠전 뉴스에서 사람들의 내세관을 조사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누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약 70%의 사람들이 대답하기를 ‘이 땅에서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갈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내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현세가 중요할 뿐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 내에서 많은 사람들의 믿음도 그렇게 변하여가고 있습니다. 지극히 현세중심의 기독교를 강조하면서 결국 이땅에서 잘 사는 것 웰빙을 누리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는 이땅에서 나그네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땅에서 진정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본향은 바로 하늘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 하늘에 들어가는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께서 이땅에 재림하여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날입니다. 그곳은 바로 우리 주님이 바로 친히 왕이 되어서 통치하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 그 영원한 나라의 일을 어느 때에 준비해야 합니까? 바로 지금입니다!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때는 지금입니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더 이상 심판을 두고 오시지않습니다.
무서운 심판의 권세를 가지시고 오시는 것입니다(27절).
그런데 주님게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누가 지옥에 가고 누가 천국에 갈 수 잇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심판하십니다.
요한복음5장 29절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십니다.
여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가장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이요 의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악한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 즉 구원주로 예수님을 보내시고 생명을 주신 일을 거역하고 믿지 않는 일입니다.이제 그 책임을 장차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삶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심판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기에서 믿음으로 장차 천국에 들어가는 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이것을 확신하고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안 믿는 자들을 나무랄 필요는 없습니다.
바다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긴급하게 구조선이 왔습니다. 구조선에서 손을 내밀었는데도 그 사람에게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파도가 자동적으로 휩쓸고 갈 뿐입니다.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만 구해가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의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습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천국을 주십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지금도 구원의 긍휼과 지비를 오늘날 까지 베푸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변에서 복음을 농락하고 하나님을 농락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우리는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화를 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심판하거나 화를 낼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은 구원의 때요, 은혜받을 만한 시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은 곧 지나갑니다. 그리고 깜짝 놀랄 때가 곧 옵니다. 우리에게는 그날이 기다렸던 기쁨의 날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히 오지 않기를 원했으나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날이 되고 말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믿음으로 최후 승리하는 그날까지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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