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자기희생 보다 절대적인 사랑 (고전13:3)

  • 잡초 잡초
  • 369
  • 0

첨부 1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3)

믿음 좋은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핍박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때마다 찬송가 395장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를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심방 온 성도들이 시어머니에게 전도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늘 며느님이 어머님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내 며느리는 왕내숭이에요. 기도한다기에 들어보니 시어미 이기자는 노래만 부르고 있습디다.” 다시 성도가 물었습니다. “무슨 찬송을 불렀는데요?” 시어머니는 곧장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 시어밀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너 시어밀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에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사람은 사랑가운데서 태어나서 사랑으로 함께 살다가 사랑이신 하나님의 품으로 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됨됨이는 사랑이라는 한 단면으로도 그 인격의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귀중한 사랑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내용이라는 사실입니다. 억지로 5리를 동행하자 하여도 10리까지 동행해주며 속옷을 갖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줄 수 있는 아량 있는 사랑을 가져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5:38-42)

이러한 점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소문난 교회였습니다.(살전1:6-8)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을 가져도 역사하는 믿음을 가졌고, 소망을 가져도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까지 인내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랑을 가지되 말로만 하는 쉬운 사랑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수고를 들어내는 사랑의 수고를 가지고 있어서 소문난 교회가 되었다고 바울은 칭찬하고 있습니다.(살전1:2-4)

진정으로 주님과 교회를 사랑 합니까? 진정으로 주의 종들을  사랑합니까? 진정으로 구역을 사랑합니까? 진정으로 아내를 남편을 그리고 자녀를 더 나아가서는 부모와 가정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주일 하루만이라도 주의 전에서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투자하였습니까?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기르는 짐승 중에서 사람을 가장 잘 따르는 짐승이 개인데 이 개를 향해서 "너를 미워한다"고 하면서 쓰다듬으면 반갑다고 꼬리를 치지만 큰 소리로"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때리면 그 개는 주인도 물어 버린다고 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인 것 같지만 웃고 넘기지 못할  교훈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언어의 표현으로만 생각할 문제는 절대로 아니며 마음의 문제로서 가장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라는 것입니다.

구제와 자신을 불사르는 일은 자기희생의 의미가 함께 합니다.

  남을 도와주고 구제하는 일은 아름답습니다.

  92세의 일기로 소천한 밀톤 페트리씨의 이야기입니다. 살아 있을 때 그는 많은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또한 죽은 다음에도 신문은 이러한 제목으로 기사화했습니다. "백만장자의 자선이 사망 후에도 계속되다." 본래 태생은 러시아에서 이민 온 전당포 주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여성 의류연쇄점을 운영해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죽어가면서 까지 유서에서 자기 재산 8억달러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써 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심지어 그 대상자들을 지명하였는데 무려 451명이나 되었습니다. 수혜자의 많은 수는 충실한 고용인들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인 친구들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그가 기사에서 읽고 그들의 어려움을 돕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인터넷 정보)

  프랑스 구제사는 빈민을 구제하는 단체입니다. 어느 날 구제사의 사원이 극빈자를 조사하려고 시내를 휘돌며 다니다가 무척 어려워 보이는 한 노파의 집을 찾아냈습니다. 그 집에는 노파 한 사람만이 일하고 있었는데 방에 가구라고는 별 쓸모가 없어 보이는 두어 개의 의자와 테이블뿐이었습니다. 이 사원은 노파의 이름을 물은 후 구호 대상인으로 장부에 올리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 묶음의 지폐를 주면서 '이것은 내가 평생 동안 삯바느질하여 얻은 돈이니 약소하지만 나보다 더 어려워 고생하는 자를 위하여 구제비로 보태 주십시오. 나는 입에 풀칠하고 있으니 구호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거절한 후 자기의 저금조차 구제비로 기부하였습니다.(구제)

F.B. 마이어는  "초대 교회의 구제는 단순히 먹을 것을 뒷문으로만 건네주는 차가운 의무의 수행이 아니라, 그들을 식탁에 초대하여 사랑과 기도, 관심과 복음을 나누는 사역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인 구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인호네가 살고 있었습니다. 인호네는 그래도 이 마을에서는 잘사는 축에 들었는데 뜻하지 않은 화재를 당했습니다. 불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잘살던 인호네는 무척 곤란한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친한 것처럼 드나들던 사람들도 별로 오지 않았고 걱정을 해주는 사람들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 멀리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친구들이 찾아 왔습니다. 먼 저 온 사람은 인호 아버지에게 "허 이 사람아, 이게 어찌된 일인가? 무엇이든지 어려운 일이 있거든 말하게." 라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인호 아버지는 "고맙네."라는 인사를 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친구는 새것을 사다 주자니 돈이 없고 헌옷이나 쓰던 것들을 가져다 주려고 하니 가져다 줄 수 없을 것 같고 그래서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가 마침 꽃가게에 들러 예쁜 꽃이 담긴 꽃병 하나를 사들고 왔습니다. 인호 아버지는 꽃병을 들고 와서 위로하는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성의는 고맙네. 그렇지만 지금 같은 형편에 그 꽃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져다 두어두게." 그러자 친구는 화를 내며 돌아가 버렸습니다. 다른 친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가 덮던 이불 중 하나와 입던 옷 중에서 몇 벌을 싸서 가지고 왔습니다. "내게 새 옷을 살 돈이 없어서 이 소식을 듣고 덮던 이불과 입던 옷을 싸 가지고 왔네.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받아 두게." 이 말을 듣고 있던 인호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세 번째 찾아온 친구의 손을 붙들고 말했습니다. "고맙네 고마워. 내 우정은 잊지 않겠네" 그러면서 몇 번이고 손을 붙들고 흔들었습니다.

  구제가 사랑과 함께 할 때 더 아름다운 열매를 맞습니다.

어느 마을에 열심히 주님을 믿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주일만 되면 생활이 어려운 교인들을 집으로 데려가 식사 대접도 하고, 가정을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의 장소로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마주치는 그 자매의 얼굴빛이 어두워 보였습니다. 마을에는 주민들로부터 정신이상자로 따돌림을 받는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가 어쩌다 교회에 들렀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집으로 모시고 가 식사 대접을 하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부터 아주머니가 스스로 자매 집으로 오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예배는 뒷전이고 밥을 얻어먹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낮은 자로 오신다던 예수님의 말씀 생각나 대접을 하긴 하나 자의가 아니라 억지로 하려니 주일마다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정말 예수님이 오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아주머니가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아주머니가 지저분하던 옷도 깨끗해지고 말씨도 고와지는 등 여러모로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심성도 점차 부드러워지고 정상인의 그것처럼 바뀌는 '기적'을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을 대하듯,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긍휼함에서 정성껏 대하면 외양이 달라지고 인격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며, 한 인격을 사단의 권세로부터 주님의 품으로 되찾아오는 능력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이웃에 대하여 물질로서 공궤하고 구제하며, 마음으로 도울 수 있기를 참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결국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넷 정보-교사의 벗, 1999. 1월호>

주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약 10만 명 있었는바 그들은 1만5천의 불행한 자의 생활을 담당하였다고 합니다. 또 후에 이곳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많은 인명이 손상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이것이 기독신자들이 우상에게 절하지 않은 탓이라는 말이 돌아가 이 때문에 신자들은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모든 불신자들이 이 병이 무서워서 앓는 자와 죽은 자의 시체를 그냥 내버리고 도망을 했을 때에도 신자들은 결사적으로 마지막까지 머물러 있어서 병자를 구호하며 시체를 매장하였습니다. 그 후 도망했다가 다시 돌아온 자들이 기독신자들이 한 업적을 보고 놀라지 않은 자가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흑사병의 유행은 갤러스(Gallus)황제 때에도 있었는데 당시 카태이지 교회는 사이프리안의 지도하에 그들을 간호했으며 매장하였다고 합니다. 유세비어스 당시에는 핍박이 너무 심하여 어떤 교우가 재산 몰수를 당하면 교우들이 서로 생활 책임을 졌고, 다른 데로 피신하여 가면 목사의 소개서 한 장으로 으레 그들의 생활 책임을 졌다고 합니다.

2세기초의 신학자 터툴리안의 변증론의 일 절을 보면“보라 저들이 어떻게 사랑하였는가를! 저들이 서로 죽기도 사양치 않는구나 저들은 아내 외에는 무엇이나 공동으로 가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불신자들이 경탄함을 말하였고, 그들은 또한 불신자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우리를 핍박하나 우리는 당신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당신들의 신을 위하여는 아무 것도 아니하나 당신들의 빈궁한 자는 우리가 구제하노라”하였다 합니다.

구제보다 귀한 것이 사랑입니다.

남을 도와주고 구제 하는 것 매우 중요한 일이나 우리에게 이 일을 하라고 성경은 권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함께 할 때 빛을 발하게 됩니다.

어느 전도자가 길을 지나다가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 앞에 섰습니다. 주머니를 뒤졌습니다만 마침 그에게는 한 푼의 돈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차마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속 깊은 연민 때문에 전도자는 손을 내밀어 걸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면서 말했습니다. "형제여, 마침 내게 준비된 것이 없군요. 그러나 당신의 너무 춥게 보이는 손을 잡아드리고 싶소. 부디 용기를 내서 일어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새 생활을 시작해 보십시오." 걸인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나에게 적선한 모든 이들보다 더욱 값진 선물을 주셨습니다."

  자신을 불태우게 내어 주는 일도 위대 합니다.

옛날 중국 진나라에 계자추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청렴한 사람으로서 세속적인 정치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마다하고 산중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갈수록 어수선해지자 사람들은 계자추를 필요로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가 있다는 산을 헤매며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고심하던 사람들은 산에 불을 지르면 그가 살려고 나오지 않을까 싶어 산에 불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오지 않았고 끝내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날 사람들은 불이 원수처럼 되었다고 하여 부엌에 불을 넣지 않고 전날에 만든 찬밥을 먹는 날로 정했다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식(寒食)의 유래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분신은 자기 교만일 수 있습니다.

아덴의 한 안도인의 무덤이라 불리워지는 기념비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합니다. 그는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불더미 속으로 뛰어 들며 그의 비석에 발고사 출신의 인도인 잘모케가스는 인도의 오랜 관습에 따라 자기를 불사신으로 만들고 여기 잠자고 있다고 써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신도 사랑과 함께 해야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일이라 합니다. 미군 폭격기들은 일본 도쿄 상공에서 가솔린을 뿌리고 난 다음 가옥이나 건물을 불사르는데 사용하는 소이탄을 투하했습니다. 시내는 온통 불바다로 변했습니다. 이튿날 아침거리에는 시체가 즐비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가진 여성들은 모두가 엎드려 죽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은 비록 불에 타더라도 아이만은 살려야 한다는 간절한 모성애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죽음 앞에서 더욱 찬란한 광채를 냅니다.

순교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사자 굴에도 풀무불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순교자 후스(Jan Hus)가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자로 단죄되어 화형에 처해질 때의 일입니다. 그때 집행관들은 그의 목을 무거운 쇠사슬로 묶었습니다. 그러자 후스는 감격에 찬 음성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두 손이 묶이셨는데, 나 같은 죄인이 감히 주님처럼 묶이는 영광을 받았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이제 나는 정말 주님의 종이 되었나이다."

옛날 로마에 도미티안 황제 때에 핍박을 심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습니다. 주로 화형을 해서 죽이는데, 그 중 순교자 한 분에게 마지막 소원을 물었을 때 "내가 이렇게 죽는 것을 제외하고는 여러분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사실로 그를 죽이는 자들이 그토록 훌륭한 모습으로 죽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하고 존경하며 부러워했다 고 합니다. 이런 역사들이 쌓여서 후에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고들 합니다. 순교자들이 주었던 그 감화가 대 로마제국을 바꾸어 놓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이 자존심과 자긍심을 충족키 위한 영적 교만과 영적 자존심이라는 이중적인 껍질로 장식되어 있다면 모조 순교를 각오 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습니다.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인을 심하게 박해한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서 거기에 절하지 않은 신자들을 처형했습니다. 황제는 자신이 직접 40명을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잡혀온 40명의 신자를 벌거벗긴 후 다음과 같이 명령했습니다. "자, 너희들이 믿고 있는 예수에 대한 신앙이 없어질 때까지 저 얼어붙은 호수 위에 서 있어라." 그들 40명은 휘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꽁꽁 언 호수 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며 서 있었습니다. "주님, 저희 40명은 당신에게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잠시 후 이들을 감시하던 호위대장은 40명의 신자 가운데 하나가 동요를 일으킨 것을 눈치 챘습니다. 그 한 사람은 슬슬 무리의 곁을 떠나 황제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자 남은 기독교인들의 용감한 행위를 보고 그 신앙심에 감동한 호위대장이 투구를 벗었습니다. 그리고 창도 던져버리고 스스로 벌거벗은 후 탈락한 신자가 서 있던 자리로 가서 함께 찬양을 불렀습니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었을 때 얼음 위에는 40명의 사체가 엎드려 있었습니다.

순교적 삶도 사랑 안에서 가능합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덥고 독사와 악어가 들끓는 곳으로 이름난 '랑바레네'라는 곳에 서양 집도 아니고 토인들의 집도 아닌 40여 채의 자그마한 집들이 있습니다. 그 집들은 그 지방민들을 위한 병원으로서 알버트 슈바이처가 세운 것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는 1875년 독일 알싸스 지방에서 태어나 26세 때 이미 철학, 신학, 음악의 세 가지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리고 의학박사의 학위까지 네 가지의 박사 학위를 가진 박학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1913년 그 모든 것을 다 저버리고 가장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려 아내와 같이 아프리카를 향했습니다. 그곳에 이르러 그는 병원을 세우고 토인을 돌보아 주며 주의 복음을 전하기에 갖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한 번은 "이 같은 야만인들을 고쳐 주기 위하여 이런 곳에 오다니? 나는 정말 바보가 아닌가?" 하고 말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때 통역은 "선생님은 과연 세상에서 제일가는 바보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위로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많은 지도자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 반란자들은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자신의 반대 세력을 죽이고 감금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한 부족에게 나타나서 그 부족의 추장을 죽이려고 했는데 이를 미리 안 추장은 산속으로 피신하고 없었습니다. 그러자 반란자들은 화가 나서 마을을 불 지르며 만약 추장을 내놓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한 사람이 몰래 빠져나가 추장이 숨어 있는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는 추장에게 반란자들의 협박을 알려 주고 피신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추장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는 주저함 없이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그가 희생당함으로써 그 부족은 죽음을 면하고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부족을 살린 추장-데이비드-미션바이블)

  사랑이 없는 구제 때문에 사람들은 받고도 치사한 부채감과 모멸감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여전히 괴로워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여도 하나님의 장부에 나의 자선은 기록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아닌 분신은 자기의 믿음과 열정에 대한 자기만족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순교 각오도 각오로 그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어떤 은사나 희생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니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하는 모두가 됩시다.
(강성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