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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자기 신앙을 분명히 할 때 (신 3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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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흥집회에서 강사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는 썰렁해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바다는 어디일까요?" 성도들이 머뭇거리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그곳은 사랑해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항상 따뜻한 바다와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기를 원합니다."
평소에 남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 듣는 것이 소원이었던 여자 집사님이 집회가 끝나고 집에 가서 남편에게 온갖 애교를 부리면서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여보, 내가 문제를 낼게 한번 맞추어 봐요.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는 썰렁해∼래요. 그럼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바다는 어디일까요?"
남편이 머뭇거리면서 답을 못하자 온갖 애교섞인 소리로 힌트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럴 때 당신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있잖아" 그러자 남편이 아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자신 있게 하는 말. "열∼바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움과 분노로 가득찬 열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지 마십시오. 사랑과 감사와 기쁨이 가득한 은혜의 바다에 푹 빠지시기를 바랍니다.

에머슨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역사에 나타난 온갖 크나 큰 업적은 열심이 가져다준 승리이다" 그렇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는 사람만이 승리하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비전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내 안에 열심을 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여러분들의 가슴에 열심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항상 뜨거운 성령의 불이 있어야 합니다. 가슴에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불로 성령의 불로 임하소서 임하소서.
성령의 불로 성령의 불로 기름부으소서 기름부으소서"♬

성령의 불이 이곳에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으로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열정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열정이 있는 사람들까지 싸늘하게 만드는 방해물이 됩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하고자 하는 사람까지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인생 여정에서 걸림돌이 되지 말고 디딤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의 심령에 성령의 불이 임해야 합니다. 주님과 복음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그래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땅의 성도들을 보면 교회는 출석하고 있지만 냉랭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복음에 대해 감격하지 않습니다. 모임에 열심도 내지 않습니다. 울면서 부르짖지도 않습니다. 전도에 열심도 없습니다. 내 생활 속에 주님이 개입하시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시려는지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교회는 나오는데 그냥 나옵니다. 주님과 복음에 대하여 진지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무관심하고 결단력이 없고 그저 대충 대충 믿고 삽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치 환자가 병을 고치기 위하여 병원에는 열심히 들락거리고 있지만 병을 고칠 마음이 없는 상태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오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그 마음에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그 심령에 성령의 뜨거운 임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향상됩니다. 그래야 신앙생활이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야 심령에 감사와 감동이 넘치게 됩니다. 이 시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일에 열심을 내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영어 성경에 보면, 열심을 품고 앞에 성령 안에서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안에서 열심을 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열심을 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십시오." 그렇습니다, 여러분. 열심을 내십시오.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뜨거운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주님을 뜨겁게 섬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성령이여, 이곳에 임하시옵소서. 성령이여, 내 심령을 뜨겁게 태워주시옵소서"

♬"성령의 불로 성령의 불로 임하소서 임하소서.
성령의 불로 성령의 불로 기름부으소서 기름부으소서"♬

이 시간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여러분의 심령이 뜨거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성령의 뜨거워진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시기를 축복합니다.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이 있어야 삽니다. 열심이 있어야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열심이 없이는 영적 세계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열심이 없이는 죄악과 정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12명의 진지한 신앙인을 달라. 그리고 나를 어느 지역이든지 내려놓아라.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즐거이 노래 부를 것이다. 마음에 열정이 없는, 관심이 없는 여러분 전체를 나에게 주어본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지극히 옳은 말입니다. 천명이든, 만명이든 그 마음에 열정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들에게서는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에베소서 6장 10절에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의 능력으로 강해지십시오.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강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간곡히 말씀합니다. 주님 안에서 신앙의 열심을 회복하십시오. 그 길만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내 가족이 사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 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우리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마음에 열정이 없는 사람,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들이 아무리 많아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열정적인 진지한 믿음의 사람 12명만 있으면 이 언양 땅을 성령의 불바다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영국에 파라데이라는 과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학교 다닐 때에 신문배달을 하면서 학비를 조달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어느 부잣집에 가니까 신문함이 문안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문의 구멍을 통해 상체를 집어넣고 신문을 신문함에 꽂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상체를 안으로 집어넣고 신문을 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집 안에 있는 것인가, 집 밖에 있는 것인가?" 골몰히 생각하다가 다른 사람이 오는 소리를 못 들었습니다. 그 사람도 파라데이가 끼어 있는 것을 모르고 문을 확 열었습니다. 그 바람에 파라데이의 목이 부러질 뻔했습니다. 파라데이가 혼이 나 목을 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상태가 문안에 있는 것인지 문 밖에 있는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히 알게 된 것은 그러한 상태는 목이 부러지기 딱 알맞은 상태라는 사실이다." 가만히 보면, 오늘 이 땅의 교인들 가운데 그가 교회 안에 있는지, 교회 밖에 있는지 잘 구분이 안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불신자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지대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 어중간한 상태는 가장 위험한 상태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힘들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가 어정쩡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직장이 바쁘고, 사업이 바빠서 주님의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 일도 즐기면서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병균은 뜨거운 음식에서나 얼음같이 찬 음식에서는 번식을 못합니다. 그저 미지근한데서 가장 잘 번식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지근한 상태에 있을 때에 온갖 유혹이 틈타게 됩니다. 미지근한 상태에 있을 때에 불평하게 됩니다. 미지근한 상태에 있을 때에 비난하게 됩니다. 미지근한 상태에 있을 때에 게을러집니다. 미지근한 상태에 있을 때에 죄를 짓게 됩니다. 미지근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신앙생활에도 생동감이 없습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이것은 바로 변질된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열심을 내는 것도 아니고, 안 내는 것도 아닙니다. 헌신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중간 상태에 있는 어정쩡한 모습일 뿐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주님께서는 역겨워서 토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합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공동번역에서는 아주 재미있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이야기합시다.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언제까지요?

갈등이라는 것은 하나만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갈등은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어려울 때에 일어납니다. 이것은 가치 인식이 부족하거나 가치 결정 과정에서 의지력이 약할 때에 일어납니다. 이것을 선택할 것인가, 저것을 선택할 것인가? 이것이 좋은가, 저것이 좋은가? 신앙생활에서 갈등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세상을 섬길 것인가? 내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재물을 섬길 것인가? 내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세상 명예를 섬길 것인가? 우리가 이렇게 갈등하는 중요한 이유는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신앙의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은 신앙적인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하나님과 돈이라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한편을 미워하며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극진히 위하며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미온적인 신앙생활을 청산하십시오. 교회 안에 확실히 들어온 것도 아니고, 들어오지 않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 상태를 거부하십시오. 하나님께서도 이런 사람은 싫어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서 주님으로 인한 기쁨과 감격을 맛보십시오. 성령의 능력으로 사단의 진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이 시간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내 심령에 모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임재하심을 간절히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주님께서는 나보다 먼저 내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 생애를 향하여 두드리십니다. 우리 교회를 향해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 시간 마음 문을 열고 미지근한 모습에서 뜨거운 신앙의 모습으로 변화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뜨거운 열정을 회복하여 주님과 교제하는 삶의 맛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능력을 맛보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열심 있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십시오.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오십시오. 회개할 때에 참된 자유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회개할 때에 병도 치료받을 수가 있습니다. 회개할 때에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는 것처럼 마음 무거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왜 은혜를 못 받습니까?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피곤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완악하고 교만한 것 변케하여 줍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완악함과 교만함을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함께 하십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채워주십니다. 우리를 복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심령을 살찌우십니다. 우리를 평안하게 하십니다. 이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느 날 5살 된 여자아이가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엄마, 나 어떤 년이 되었으면 좋겠어?" 어린 딸아이의 뜻밖의 질문에 이 엄마가 몹시 당황했습니다. 요즘 친구들과 한창 어울려 다니더니 배운 것은 아닌지, 아니면 텔레비전을 보면서 배운 것은 아닌지 마음속으로 심각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 엄마는 약간은 당황스럽고 떨리는 목소리로 딸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얘야, 그게 무슨 말이니?" 엄마의 물음에 이 딸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응, 내가 3학년이 되는 것이 좋아, 6학년이 되는 것이 좋아?" 이 아이가 언니들을 보면서 학년이 높을수록 좋은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몇 학년이 되어야 좋을지 선택의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과거에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합니다." 선택의 고민, 이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주어진 고민이요 갈등입니다. 사실, 인생 여정에서 한번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 모두는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일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단 한 번의 좋은 선택이 일평생 즐겁고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생 여정에서 좋은 선택을 한 경우가 많을수록 행복하고 성공한 삶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잘못된 선택을 한 경우가 많을수록 그 사람은 불행하고 실패한 삶이 될 것입니다. 사소한 일들에서보다는 크고 중요하고 결정적인 일들에 있어서 좋은 선택을 할 때가 많은 것이 우리의 삶을 보다 행복하고 성공적인 것이 되게 해 줄 것입니다. 가령, 점심메뉴를 잘못 선택했을 때에 하는 후회는 잠간이거나 기껏해야 그날 하루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 없는 건달을 남편으로 선택했다가는 앞·뒤·주위 사람들을 다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도 두고두고 말입니다. 또 좋은 선택,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는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 여정에 있어서 앞으로 살아갈수록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일이 없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사망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은 복된 길이요, 사망의 길은 저주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을 택하는 사람은 생존하며 번성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망의 길을 택하는 사람은 화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현대어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택하고 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죽음을 택하고 저주를 받으시겠습니까? 부디 여러분은 생명을 택하여 후손들과 더불어 오래오래 사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동일한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여러분은 생명을 택하고 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죽음을 택하고 저주를 받으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을 위하여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우리의 신앙을 보다 분명히 해야 할 때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내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십시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에 서 있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내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주님께서도 하나님 앞에서 나를 시인하실 것입니다. 한마디로 give and take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take and take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주님을 시시때때로 부인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시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은 자신이 저질러놓고 그 결과를 하나님 더러 책임을 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인색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물질의 복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계획대로 하나님을 데리고 놀려고 하는 그런 생각을 버리십시오. 솔직히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얼마나 주님을 인정하십니까? 여러분은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믿는 내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노예나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책임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축복된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망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저주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에게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손 삼사대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어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십시오. 생명의 길을 택하여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버리십시오. 환경적인 요인에 굴복하여 절망하지 말고, 소망을 품고 생명과 복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행동을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끊임없이 문제만을 바라봅니다. 지나간 과거 속에 파묻혀 삽니다. 불나방처럼 이리저리 방황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쉽게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과거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내가 어느 길을 걸어왔던 과거를 묻지 마십시오. 지금이라도 생명과 복의 길을 선택하면 삽니다. 나도 살고 내 자손들도 삽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선택을 분명히 하십시오. 내 신앙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십시오. 이것만이 나와 내 가족이 사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의 두 길이 있다고 하면서 분명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백성들에게 선택의 두 길을 이야기하면서 모세는 자신이 걸어왔던 젊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당시의 상황을 히브리서 기자는 11장 25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일시적인 죄의 쾌락을 누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통 당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왕궁에서 누릴 낙을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 앞에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귀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러니까 모세가 애굽 왕궁에서 누릴 낙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통 당하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모세의 선택에 대해 실질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포기한 사람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위해 자신의 영광을 버리셨다. 그 분은 멸시 당하고 버림 받으셨다. 그분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셨으며 사람들로부터 맞고 채찍질과 부끄러움을 당하셨다. 모세 역시 그 당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다. 모세는 이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는 편한 삶보다 고난은 따르지만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을 택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의 신앙을 분명히 하십시오. 내 신앙을 분명히 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바로 주님의 관심이 머물러 있는 그곳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삶의 여정에서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관심이 머물러 있는 곳을 선택해야 합니다. 모세는 잠시잠깐 누리는 삶보다 비록 지금은 고난과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백성들과 함께 하기를 더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실 상을 기대하고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기준으로 살지 마십시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이런 것은 아침에 피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기준으로 사십시오. 주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며 사십시오. 이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모세는 거절할 것을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해야 할 것을 위해 버릴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생명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생명의 길임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백성들이 생명의 길을 택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길을 걸어가십시오. 이 길은 좁고 협착하다고 했습니다. 찾는 사람이 적다고 했습니다. 찾는 사람이 적고 길이 험하니까 걸어가는 그 길이 외롭고 고단한 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길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하늘의 복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두 팔을 벌리고 맞아주십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일지라도 그 길이 멸망의 길이라면 가지 마십시오. 아무리 편하고 좋은 길일지라도 그 길이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길이라면 지금이라도 돌아서십시오.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시간마다, 때마다 우리의 신앙을 분명히 해야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 안에서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십시오. 어정쩡하면 사단이 바로 시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이 복을 빌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서 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무엇이 복입니까? 재산이 많다는 것이 복입니까? 권세가 있는 것이 복입니까? 권세가 있어도 자기에게 찾아오는 외로움과 두려움 앞에 극복할 힘이 없는 사람들은 권세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돈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생에 진정한 복은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세상 전부를 가졌어도 그의 인생에 주님이 없다면 그는 전부를 잃은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 없는 인생은 미래에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스탠리 존스라는 사람이 어느 날 길을 건너가려고 할 때에 어떤 여자가 그의 팔을 끌어당기면서 말렸습니다. "빨간 불을 보세요!" 존스 박사는 그 여인에게 미안한 듯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기 건너가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러자 그 여자가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힘있게 충고하더랍니다. "그 사람들을 보지 말고 신호등을 보고 따라가세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고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낭패를 당합니다. 시험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어느 길을 가든 오늘 저와 여러분은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생명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의 죄악들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아무리 세상의 빛이 찬란하고 아름다워도 그곳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롯의 아내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길을 걸어갔다가 롯은 전부를 잃어버려야 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은 내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할 때입니다. 결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를 한 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잘 살아 왔습니까? 인생의 끝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처음보다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처음보다 마지막이 축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 안에서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마지막은 결코 아름답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고 주님 앞에 섰을 때의 그 마지막이 아름답기 위하여 순간 순간마다 내 신앙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모아놓고 말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세상입니까? 이 세상에서의 잠시잠깐 즐길 쾌락입니까, 아니면 지금은 고난을 받아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복락입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책임은 여러분 스스로가 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여러분에게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자손 삼사대까지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생명을 택하고 복을 받으시겠습니까? 죽음을 택하고 저주를 받으시겠습니까? 부디 여러분은 생명을 택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후손들과 더불어 오래오래 사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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