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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창 1: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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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지역사랑 새생명 초청잔치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옆에 계신 분과 인사 나눌까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많은 분들의 대답 가운데 첫번째가 “그럭저럭 삽니다.”, 다음이 “마지 못해 삽니다.” 세 번째의 답이 “죽지 못해 삽니다.”라고 합니다.
  아마도 표현은 안하지만 많은 분들이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마음을 반영한 조사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께서는 참 귀중한 시간을 내서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시간이 유익한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들께 잘 사는 법, 폼 나게 사는 법, 행복하게 사는 법, 사랑받으며 사는 법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혹시나 졸려고 작정했던 분들도 잘 들어 보시면 여러분들 인생에 유익한 시간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참 좋은 일도 일어나고, 그렇지 않은 일도 일어납니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좋지 않은 일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슬프고, 안타깝고, 괴롭고, 고통스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을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좋았던 일’이 뭐가 있었을까요? 아! 박주영이 골 넣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소식은 자다가 생각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입니다.
  반면, 안타까웠던 일, 가슴 아팠던 일, 답답했던 일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 인생은 늘 행복하지 못하고 이렇게 답답한 일을 경험하면서 살아가야만 할까요?

  첫째, 그것은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차를 가지고 주유하러 주유소에 들를 때면 어린 학생들은 종종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 얘기를 들으니 그 아이들 중에서 상당수의 아이들이 가출한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집을 나와 갈 데가 없는데, 주유소에 가면 밥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을 주니 그 일을 한답니다. 또 일 하다 자기 맘에 안 들면 금방 다른 주유소로 옮기고 또 옮기고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는 아니겠습니다만, 아이들이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부모의 속박을 벗어나 살아가는 게 꼭 합당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아이들이 정말 이 사회의 훌륭한 기둥들로 잘 자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면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잔소리가 많은 것 같아도 부모의 돌봄과 애정, 가정의 사랑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자칫하면 친구의 꾐에 넘어갈 수도 있고, 잘못된 길에 빠질 수도 있고 탈선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아니할 때 그 아이의 인생이 결코 행복하다고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비유, 또는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한 가정에 둘째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구속이 싫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게 돌아올 유산이 있으면 다 주세요”하고 받을 유산을 미리 받아서 먼 나라로 갔습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술과 창기들과 어울리며 가진 돈을 다 탕진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지 않아 거렁뱅이가 되었습니다. 돼지 우리의 쥐엄 열매를 먹는데 그것도 이제는 먹을게 없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하고 탄식하던 아들은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는 용기를 내어 집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맨발로 뛰어 나와서 아들을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송아지를 잡아서 아들에게 먹이고 축복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비극은 그가 있어야 할 아버지의 품, 가정을 떠났기에 맞이한 비극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불행, 인생의 비극, 가정의 비극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자리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자꾸 떠나려고 몸부림치기에 비극이 찾아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이 마이크를 보십시오. 이 마이크는 참 유용하고, 저에게는 꼭 필요한 좋은 물건 입니다. 그리고 이 강단에서 이 마이크는 귀하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마이크에 전원이 끊기고 마이크만 뚝 떼어 아무렇게나 길바닥에 버렸다고 칩시다. 그 물건을 누가 쳐다보기나 하겠습니까? 먹을 수도, 어디에 쓸 수도 없는 고물덩어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이 마이크는 있어야 할 여기, 이 강단에 있을 때 귀중하고 값지게 쓰여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만 가치가 있고 빛이 나는 것입니다.
  요즘은 직장에 나가는 주부들도 많이 있습니다. 가정에 돌아오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식사를 준비해서 아이들을 먹이고 남편을 대접하고 집안일을 돌봅니다. 참 피곤하고 힘들 것입니다. 그래도 주부, 어머니의 아름다움은 아이들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할 때 가장 빛나는게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가정의 행복이 있지 않겠습니까?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그 시간에 사업 관계로 친구들을 만나 맥주 한 잔 하고, 노래방에 가서 그 시간에 목 터져라 노래하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아름다운 모습이겠습니까? 거기서부터 가정의 비극이 시작되지 않겠습니까? 엄마의 따뜻한 밥이 필요한 시간에 아이들이 라면을 끓여 먹고 있다면 그것이 그 가정에 비극이 틈 타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누구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거기에 인간의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간에게 불행이 찾아오는 때는 자기의 가치를 상실할 때 입니다.

  우리들 자신은 참으로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잘 가치를 모릅니다. 내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행동합니다. 자살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 하나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때 슬픔과 고통 가운데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우리 가정에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귀하게 만드셨는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주를 보십시오. 진주가 장식품 안에 있을 때는 영롱한 빛을 발하고 가치 있게 쓰입니다. 그런데 누가 가다가 진주를 진흙탕에 떨어뜨렸습니다. 곧 사람들이 밟고 지나갔습니다. 같은 진주여도 진흙탕에 빠진 진주는 빛을 발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뜨일수도 없습니다.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돌덩이 하나에 불과합니다. 누군가 진주를 찾아서 흙을 걷어내고 먼지를 털고 잘 씻어서 가공할 때 그 진주는 빛을 발하고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모르는데서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 왕이 전쟁 통에 어린 왕자를 잃어버렸습니다. 전쟁 후 임금은 왕자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습니다. 그동안 왕자는 다른 사람의 손에서 성장을 했는데, 갈 데가 없으니 거렁뱅이 아이들과 어울리고, 넝마주이와 함께 어울리는 통에 거친 말을 하고, 못된 행동을 하면서 거칠게 자라났습니다. 이 아이는 자기가 왕자인줄 몰랐습니다. 전쟁을 통해 부모를 잃은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수소문 끝에 동굴속에서 이 왕자를 찾아냈습니다. 그에겐 왕자의 상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그 왕자의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인격이 달라졌습니다. 삶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내 가치를 깨달을 때 우리 인생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만드신 분을 모를 때 불행한 삶을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원숭이에게서 왔다고 주장합니다. 원숭이가 조상이라는 말입니다.  앞으로 제사드릴 때 원숭이 놓고 제사 지내야 합니다. 조상 중에서도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없는 잘못된 얘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증언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존엄한 존재요, 인격적인 존재요, 예배하고 대화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같은 피조물이지만 짐승과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짐승들은 예배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언어로 말할 줄도, 기도할 줄도 모릅니다. 본눙에 따라 움직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셨습니다. “너희가 모든 만물을 다스려라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라고 인간에게 복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마지막날에 만드셨습니다. 왜 하필 마지막 날일까요?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모두 준비해 놓으신 후에 사람을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이토록 우리는 너무나 귀한 존재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누구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어떤 이가 옷을 입고 갔습니다. 옷만 봐서는 잘 모르지만, “상표 좀 볼까?”하고 뒤집어 보면 어떤 물건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전자제품을 보더라도 어떤 회사가 만든 제품이냐에 따라 가격도, 상품의 질도 평가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기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귀중한 존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더니 우리는 존귀한 인생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같이 거룩하고 고귀한 인생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가치를 상실하고 우리를 만드신 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인간은 불행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왜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바로 죄 때문입니다. 이 죄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도록 충동질하는 이 죄가 인간을 탈선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들도 ‘에덴동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지어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을 그들에게 다 맡기시면서 “다른 모든 과일은 다 먹어도 좋은데, 이 선악과 열매만은 먹지 말아라 이것을 먹으면 너희들이 죽을까 하노라.”하며 부탁하신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악한 뱀이 와서 “하나님이 금하는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 질까봐, 하나님처럼 될까봐 겁나서 그런 거야. 이것만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라고 인간을 꾀었습니다. 이 꼬임에 인간이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인간은 불순종의 삶을 살게 되고, 사망과 파멸을 행해 나가게 된 것입니다. 아담 한사람이 범죄 해서 죄의 오염이 전 인류에게 번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불행의 시작입니다.

  인간들은 오늘도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란 말씀이 있습니다. 욕심 때문에 범죄 하게 되고, 범죄 하다보니 인간은 멸망과 지옥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에 오염된 인간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말세의 모습을 보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부모를 위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사랑합니다. 아내나 남편을 위하는 것 같지만, 자기를 위합니다.
  돈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돈은 필요하지만, 돈이 우상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쾌락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동물처럼 본능에 끌려 살아갑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제 신문을 보신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어떤 사기꾼이 희대의 사기를 쳤는데, 전국에 5급 이상의 고급 공무원들에게 전화를 해서 당신이 다른 여자하고 모텔에 들어가는 사진을 찍어놓았으니 이것을 무마 하려면 어느 구좌로 돈 입금하라고 했더니 확인도 안하고 53명이 100 ~500만원씩 입금해서 모두 1억 2천만 원이 입금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돈 있으면 우리 영신교회 건축하는데 더해 주기나 하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사람들은 뭔가 찔리는 데가 많은 모양입니다. 어려운 복지 단체에서 와서 만원만 보내 달라면 보낼까 말까 한 사람들이 사기꾼의 한마디에 그 자리가 위태할까봐 아무 말 없이 돈을 보내는 모습, 이것이 우리 사회의 타락한 모습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말을 못해서 그렇지 다 숨겨둔 것이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죄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죄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27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 놓고 보니 너무 좋아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죄로 오염된 우리들의 심령이 깨끗해지는 길, 하나님 앞에 나가는 길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 하셨으며, “천하 인간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 받을만한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뭘까요? 그것은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방향을 바꾸는 것을 성경에서는 ‘회개’라고 표현 합니다. 잘못된 길로 가던 사람이 바른길로 돌아서는 것, 하나님을 떠났던 인생이 하나님을 향해서 인생의 방향을 트는 것입니다.

  풍랑 치는 밤, 칠흑 같은 어둠이 몰려오던 그 밤에 큰 군함 한대가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배의 선장은 유명한 해군 제독이었습니다.
  배가 진행하는데, 불이 번쩍거리며 앞에 뭔가 나타나서 무전병을 통해서 무전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소속 해군 함대다 앞에서 비켜라 아니면 충돌할 것이다.” 그랬더니 그쪽에서도 무전이 날아왔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피할 수 없다. 피하려면 너희들이 피해라.”란 무전이 날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 제독이 더 세게 보냈습니다. “나는 아무개 해군 제독이다. 내가 이 배의 선장이다. 빨리 그 배의 방향을 틀어라. 아니면 큰일 날 것이다.” 그랬더니 그 곳에서 더 센 무전이 왔습니다. “나는 해군 제독은 아니지만, 이 등대를 지키는 이등병이다. 이 등대에 충돌하면 큰일 날 것이다. 어서 피하라.”란 무전이 날아왔습니다.
  배를 돌렸겠습니까? 안 돌렸겠습니까? 그 배의 선장이 해군 제독이래도 배가 방향을 돌렸습니다. 배가 돌려야지 등대를 옮길 수 없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브레이크가 파열된 기차나 자동차처럼, 우리가 정말 파멸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면, 브레이크를 잡던지 방향을 바꾸든지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파멸의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결국 모두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두 사람이 길을 걸어가는데, 강아지 한 마리가 따라 갑니다. 그런데 강아지는 그냥 똑바로 따라가지 않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해서, 그 강아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갈림길까지 왔고, 두 사람은 행선지를 따라 좌우로 갈라졌습니다. 강아지는 누구를 따라 갔겠습니까? 맞습니다. 자기 주인을 따라 갑니다.

  여러분,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주인으로 삼고 있습니까? 돈입니까? 세상입니까?
  세상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삼고 따라갔다면 여러분은 영원한 지옥의 불 못에 떨어질 것입니다. 마지막 인생길, 하지만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영원한 천국에 이를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은 번듯하고, 좋은 옷 입고 앉아 계시니까 누가 누군지 모릅니다. 뭐 어떤 사람은 “강남의 10억짜리 타워 펠리스 사니까 잘 사는구나!”, “어떤 사람은 남의 전세방에 사니까 좀 가난하게 사는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종말의 시간이 있습니다. 누구도 종말의 시간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엔 마지막 종말뿐 아니라 개인의 종말도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한 남자분의 고백입니다. 아내가 있을 때는 잘 몰랐답니다. 아내가 암으로 고통당하다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내를 땅에 묻고 돌아온 날, 아내의 자리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온 집안이 텅 빈 것 같았고, 자기 가슴 한 복판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답니다. 아내가 있을 때 싫은 소리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아내의 자리가 그렇게 큰지 몰랐는데, 아내가 떠난 지금 그 자리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지 누가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내일 일을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어느 곳으로 가게 될까요? 영원한 불 못의 지옥에 떨어지게 될까요? 아니면 영원한 천국으로 가게 될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지금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면 여러분은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땅에서 왜 고통당하는지 아십니까?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받고 싶은데,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독에 울고 있습니다. 불안해하고, 염려하고, 근심하고, 심지어 우울증에 빠집니다. 우울증에 빠지는 대부분의 경우는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우울증에 빠지면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기울여 줘야 합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버림받았다는 생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내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존재야’ ‘난 직장에서 버림받은 사람이야. 모두가 나를 싫어해!’라는 생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모욕적인 말이 뭔지 아십니까? “당신은 쓸모없는 사람이야.”란 말입니다. “당신은 우리 직장의 쓸모없는 존재야. 당신은 우리 가정의 쓸모없는 존재야”처럼 비극적인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곳에 ‘쓸모없는 사람, 그래! 쓸모없는 게 살아서 뭐해! 죽어야지. 나하나 죽는다고 누가 아쉬워할까? 눈물이나 흘릴까?’와 같은 위험한 생각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니까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내어 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격스런 사실입니까?
  여러분, 누군가가 나를 너무 너무 사랑한다고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별 미친 놈 다 보겠네!’일까요? 아마도 가슴이 뭉클해 질것입니다. 당장 만나러 가지 못한다 해도, 아마 감동이 올 것입니다. 나를 그토록 사랑해주시는 분이 있다면....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감동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난 너를 위해서 마지막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까지 내어 주었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랑하는데 조건을 따집니다. 결혼정보 회사도 사람들이 등록하려면, 간단한 것이 아니랍니다. 학교는 어디 나왔고, 점수는 어느 정도였고, 직장은 어디이며, 연봉이 얼마이고, 키가 몇 Cm이고 등등 수많은 조건을 따진다고 합니다. 저같이 작은 사람은 장가도 못갈 것 같습니다. 얼굴이 잘생겼는지, 터프한지, 대화는 어떤지 등등 별것을 다 따져 점수를 매긴다고 합니다. 90점짜리는 90점짜리끼리만 연결해 준다고 합니다. 낙제 점수는 평생가도 맞선이 주선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점수로 사람을 평가 합니다. 은행에 대출 받으려고 해도 땅이 얼마나 있는지, 신용도가 어느 정도인지 점수로 계산 합니다. 그 점수가 몇 점 이상 되어야 돈을 대출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있는 그대의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뻐하시고, 귀히 여기십니다. 성경에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너희를 맞아 줄 것이라는 뜻이며, 너희의 실패한 인생, 찢어진 인생을 내가 다 치유해주고, 싸매어 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오시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시기를, 복주시기를, 잘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정말로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예레미야 29장 11절의,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란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정말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다면, 결단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인간은 동물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을 따라 가야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그분의 영적인 속성을 우리 인간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듯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거울에 때가 묻고 더러워지고, 기름기가 껴서 잘 안 보이지만, 거울을 깨끗이 닦으면 자기 얼굴이 밝게 보이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피로 우리의죄사함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돌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업에 실패 하셨습니까? 가정이 깨지셨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을 해결해 주시시를 원하시는 예수그리스도 앞에 나오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젊은 교인들이 결혼해서 얼마 있으면, 아기를 앉고 축복해 달라고 데려옵니다. 아기의 모습이 그 아버지 어머니를 꼭 닮았습니다. 코도, 눈도 쏙 빼닮은 것을 보면 참 신기하기만 합니다. 자기를 닮은 아이를 낳고 보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할 수 있으면, 뭐든지 해주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부모 되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냥 축복하고 싶어 하십니다.

  제가 15년 전, 양평교회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저희 집 큰 아이 정주가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 때인데, 교회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제가 마당을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저를 보더니 눈이 휘 동그래지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야! 저 아저씨가 우리 반 정주랑 똑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속으로 “내가 정주를 닮았냐? 정주가 나를 닮았지.”라고 혼잣말을 하고 웃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또한 닮았기 때문에 미운 짓을 해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잘못된 길로 가더라도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예뻐하고, 용서하고, 안아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에 가면 꼭 가 보아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성베드로 대성당인데, 그 성당 안에 피에타상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것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끌어내려 피로 얼룩진 시신을 마리아가 끌어안고 있는 조각상입니다. 죽은 아들의 시신을 보는 어머니의 비통한 얼굴이 그려진 유명한 조각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어느 정신 나간 젊은이가 망치로 그 조각상을 다 깨버려서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많은 조각 애호가들이 세계적 권위가 있는 조각가들을 모아 몇 달 동안 기도하면서 피아타상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후 얼마나 감쪽같은지 전혀 금 간 자국 하나 없이 완벽하게 복원해 놓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회복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맹장수술만 하더라도 수술 자국이 남습니다. 또한 아기 낳을 때, 제왕절개 수술한 분들은 그 자국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프면 상처가 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오시면 여러분의 깨어진 상처를 다 회복시켜 주시고, 복원시켜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붉은 피를 흘리시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심으로 여러분과 저의 인생이 회복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분 때문에 우리가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이제 결단 하셔야 합니다. 내 나이 벌써 70에 80인데 내게 이제 무슨 소망이 있나, 이렇게 살다 죽는거지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앞에는 더 좋은 인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국의 한 어머니가 나이가 들어 임종이 가까워 자식들을 다 불러놓고 유언을 했습니다.  어떤 옷을 입히고, 어떤 절차를 하고 등등의 얘기 끝에 마지막 유언으로, 오른손에 포크를 쥐게 하고 관에 넣어 달라는 유언을 했습니다. 자식들이 “아니 어머니, 왜 그런 이상한 유언을 하세요?”라고 했더니, “얘들아 우리 집에서 명절 때나 온 가족이 모일 때, 내가 너희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지? 음식을 한참 먹고 난 마지막 즈음에 너희들이 포크를 놓고 나가 놀려고 할 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하니? “얘들아! 아직 포크를 꼭 쥐고 있거라. 더 맛있는 음식이 기다리고 있단다.”라고 했던 말! 난 그대로 살고 싶단다. 난 더 좋은 인생을 기다리고 있단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포크를 들고 관에 누워 있으면 사람들이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어머니는 아직 더 좋은 인생, 더 좋은 나라, 더 좋은 것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자식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더 좋은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실패했든지, 성공했든지 지금까지의 과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좋은 미래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신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여러분의 인생이 펼쳐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결단하십시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귀중한 이 시간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마음을 결단하시고  주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모셔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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