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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지옥의 진리를 느껴야 합니다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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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설교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복음”에 대해서 말하기로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야말로 설교자의 가장 중요한 본분임을 깨닫고 복음에 대한 설교를 머리 속에 구상했습니다. 복음에 대한 설교를 하기로 하자 내게 부딪쳐 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복음을 말할 때는 언제나 지옥도 함께 언급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천국을 말하지만 지옥 없는 천국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으로서의 천국을 말해야 한다면 반드시 그 반대편에 있는 지옥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옥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존 파이퍼의 책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 직업인이 아닙니다』(Brothers, We are not professional)라는 책을 읽고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목회 사역이 전문 직업화함에 따라 점차 죽어가고 있습니다. 전문직업인의 마음은 선지자의 마음도, 그리스도의 종이 마땅히 품어야 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우리는 전문 직업인이 아닌 순전한 목회자로 서야 한다. 프로페셔널하지 않는 신앙과 목회의 중심으로 가차 없이 떠밀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중심이란 잔혹하고 피가 흐르며 소름끼치고 역겨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흐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어리석고 위험한 것이다.” 여러분!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애시당초부터 사람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었고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런데 우리는 그 십자가와 복음을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과 지혜로운 것으로 만듦으로써 복음의 약화를 가져왔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지옥에 대한 설교의 약화 역시 사람들에게 거리끼는 복음과 미련한 기독교 대신에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를 지나치게 따라간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옥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지옥을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지옥의 실체를. 지옥의 비참함을. 

  사람들은 지옥을 꺼립니다. 지옥을 반대하고 없다고 부정합니다. 지옥에 부정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 무신론적 입장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 천국과 지옥은 사람들의 관념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과 지옥을 수도 없이 말합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다고 거짓말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실이 아닌 것을 진리라고 우기지 않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2) 유신론적 입장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비참하고 고통스런 지옥을 만들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지옥의 교리는 사랑의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지옥에 대해서 가장 많이 말씀하신 분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서 내어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가장 사랑 많으신 그 분이 가장 지옥을 많이 말했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진실로 사랑합니다. 진실로 사랑하기에, 그 지옥에는 진짜로 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가장 많이 지옥을 말씀하셨습니다.

3)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멸절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지옥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존재의 그침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서 지옥에 떨어지면 나무가 불속에서 타서 없어져 버리고 재가 남는 것처럼 우리의 존재도 지옥 속에서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제 없어져 버림으로 이제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비록 나의 존재는 없어져 0(제로)이 되어 버렸지만 영원한 고통 같은 것은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영생과 영벌은 주님께서 너무나 자주 사용하신 말씀들입니다.

  지옥을 가리키는 용어들은 스올(히브리어), 하데스(70인역), 음부(개역성경) 게엔나(헬라어)등이 있습니다. 또 지옥을 가리키는 이미지들도 있는데 흑암, 바깥 어두운데, 불못, 유황불 등입니다.
 
그러면 지옥은 어떤 곳일까요?

1) 지옥을 가리키는 이미지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은 ‘불’ (Fire)
  오늘 부자는 절규합니다. “내가 불꽃가운데서 고민 한다.” 여러분 가운데 화상을 입어 본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의 육체를 가장 흉측하게 만드는 사고는 화상입니다. 불은 참으로 뜨겁습니다. 빨갛게 달아오른 냄비를 만져보았습니까? 삽겹살이 익고 있는 철판에 데어보았습니까? 불은 뜨겁습니다. 불은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줍니다. 그것은 사람을 가만히 있게 하지 못합니다. 펄쩍 펄쩍 뛰게 만듭니다.

  지옥이 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성경은 지옥을 단순한 불이라고 말하지 않고 유황이 펄펄 끓는 곳이라고 합니다. 유황불?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유황불은 우리에게 화산 폭발을 생각나게 합니다. 화산의 입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옵니다. 1992년 4월 에드나 화산이 폭발하여 자페라나의 시실리아인들의 마을을 덮치려고 했을 때 과학자들은 용암 온도가 10 초안에 단단한 쇠를 녹일 수 있는 정도인 섭씨 1000도가 넘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지옥은 이 보다 더 뜨겁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런 지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상징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 불의 이미지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상징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지옥의 고통은 경감되지는 않습니다. 불을 분노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누구의 분노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성경 구절 가운데 가장 두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는 “(악인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계4:10)”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맛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일 가벼운 진노일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에 우리가 다만 스쳤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 부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미미한 진노에 우리가 스치기만 해도 우리는 고통스럽다고 아우성을 치는데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용서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어떤 인간도 경험한 적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무한하고도 억제되지 않는 극심한 진노의 불 가운데 있게 됩니다. 지옥은 얼마나 두려운 곳입니까?

2) 죽지 않는 구더기
  예수님께서 “거기는(지옥)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막9:48)고 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 곳은 그렇게 미미한 벌레조차도 자기의 생명을 포기할 수 없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그곳에서는 내 뜻대로 나의 생명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천국에서 나의 생명이 계속되는 것처럼 지옥에서의 나의 생명도 계속됩니다.

  또한 이 구더기는 썩은 것에서 생겨서 계속 썩은 것을 파먹습니다. 구더기로 상징화된 “내적고통과 고문”은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 될 것입니다. 양심은 죄인들로 하여금 자유롭고 즐겁게 선택했던 자신의 믿음과 생활방식이 자기를 지옥으로 이끌었으며, 자신의 의도와 고집 때문에 지옥에 와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깨닫도록 합니다. 또한 양심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죄의 짐을 지고 형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하다고 자기의 양심에게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죽지 않는 구더기와 같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저질렀던 모든 죄를 기억하고 깨닫게 될 것이며, 도저히 없어지지 않는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가 평안해지려면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해결되었지만 여전한 양심의 가책은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런데 지옥에서는 그 양심의 가책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죄인의 영혼 속에서 양심은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할 것입니다. 그는 지옥에서 하루도, 한 시간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3) 수치와 모욕감, 고통이 있는 곳이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많은 부와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지옥에서 그가 누렸던 모든 것을 빼앗깁니다. 그는 이제 수치를 당합니다. 그 부자는 또 고통을 당한다. (23절)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25절) 아브라함은 그 부자에게 말합니다. “너는 고난과 괴로움을 그 곳에서 받아야 한다.”고.
  지옥은 고난과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그것은 부활한 후에 우리가 갖는 육체의 고통을 포함하며, 나의 생각과 마음의 고통을 포함하며, 내 영혼에 가해지는 고통을 포함합니다. 내 몸도, 내 마음도, 내 영혼도 지옥에서는 고통을 당합니다.

4) 아무런 도움도, 희망도 없는 곳이다.
(24절-26절)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또 나사로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큰 구렁이 있기 때문에 도저히 갈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이젠 모든 도움과 긍휼과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왜 부자는 지옥에서 함께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도움을 요청했을까요?    스웨덴의 영성 신학자 스베덴보리가 쓴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영계의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는데 그가 지옥을 묘사한 부분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천국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공동체로 묶여 있다. 공동체로 묶여 있어서 관계를 맺고 있을 것 같지만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만 생각하기에, 남에 대해서 경멸하기에, 자기를 받들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위협하기에,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지옥에서 비록 그들은 사람의 형상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빛이 비출 때 보니까 다 악마와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그는 그의 영적 체험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지만 이 힘든 세상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관계라는 축복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든 세상 속에서도 내 가족, 내 부모, 내 자녀, 내 친구, 내 이웃, 내 성도, 이런 많은 관계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속에서도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지옥은 이런 관계의 단절이 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고통 받는 자신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성품이 다 이기적이기 때문에 돕지 못합니다. 부자가 떨어진 지옥 속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왜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을까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고, 아무도 그를 위로해주지 못했고, 아무도 그와 함께 있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마저도 사라진 지옥에서만의 고독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5) 그 곳은 웃을 일도 없다.
  예수님은 복음서의 여러 부분에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결말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바깥 어두운데 쫓아내라.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슬피 우는 것’은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감정을 모두 밖으로 드러내며 큰 소리로 우는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슬픔의 통곡 소리가 가득할 것입다. 고통에 짓눌린 큰 소리로 우는 소리가 가득할 것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슬퍼하며 통곡을 할까?
  또 “이를 가는 것”은 분노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이를 갈며 분노하게 될까요? 그들은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즐겁게 재밌게 살았는데 지금 이 지옥에서는 고통만을 주는 것들 때문에 울고 분노할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망쳐버린 죄와, 현재 그들 자신의 비참한 모습과, 자신이 죄를 짓도록 유혹한 사탄과, 복음에 대해서 귀를 막아버린 그 악한 영들에 대해서 화를 낼 것입니다. 이제야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그분의 위엄과 거룩함과 영광을 알았지만 너무 늦게 그것을 깨달은 자신에 대해서 통곡하며 분노할 것입니다.

6) 지옥은 영원하다는 데에 더 큰 무서움이 있다.
  아무리 극심한 고통도 끝이 있기에 견딜만합니다. 아무리 심한 육체적 고통도 끝이 있기에 우리는 견딜힘을 냅니다. 아무리 자녀가 잘못된 길을 가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아무리 내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내 마음을 찢어놓는다고 해도 우리는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물질적 가난으로 빈털터리가 된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소망의 줄을 붙잡습니다. 왜죠? 이 모든 것은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것은 언젠가는 끝날 때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옥은 영원합니다. 천국이 영원한 것처럼, 지옥도 영원합니다. 영원한 천국을 다스리는 분이 영원하신 하나님이기에, 영원한 하나님이 다스려야 할 지옥도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치지 않는 양심의 고통, 불에 타는 극심한 고통과 나에게 쏟아지는 수치와 모욕감, 아무런 도움과 위로도 없는 곳, 그 흔하디흔한 웃을 일 한번 없는 곳, 그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일시적이 아닌, 10년이 아니라, 100년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됩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씀입니까?

  토마스 부룩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과 슬픔, 비참함과 불행을 한꺼번에 당한다 해도 그것은 지옥에서 가장 가벼운 고통에도 미치지 못한다.”  저는 이렇게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벌어진 모든 고통, 슬픔, 비참과 불행을 한꺼번에 모아도 지옥의 가장 가벼운 고통에 미치지 못한다.”

  이 지옥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아십니까? 이 말로 할 수 없는 지옥에 누가 떨어져야 했을까요?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그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지옥의 권세를 예수님을 보내셔 깨뜨리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경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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